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86화 (86/202)

# 86

27. 백조의 모험(2)

서울 한복판에서 옆에 백조를 달고 다니는 건 꽤나 주목을 받는 일이다. 만약 관심이 고달프다면 백조를 데리고 다녀 보자.

“저 사람 지금 백조 데리고 다니는 거야?”

“…….”

“백조 키워도 돼? 불법 아냐?”

“…….”

“저기요.”

“……네?”

“이거 진짜 백조에요?”

그 여동생은 정말 오빠 두 마리를 죽여도 된다. 되고말고.

“꽤액.”

여동생이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백조는 선량한 눈동자로 가증스럽게 울었다.

진짜 무슨 짓을 한 걸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백주연을 보았다. 윽박질러 봤자 말 못 하는 백조가 대답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사실 버려 두고 가고 싶은데 뒷감당이 자신 없어서 말았다. 이리저리 꼬이긴 했지만 직장동료 비슷한 거 아닌가. 고등학교 선배라고 해 봤자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따진다고. 원래 세계에서도 대학 선배라면 모를까 고등학교 선배와는 딱히 친한 적이 없다.

“저기요, 선배.”

“꽥?”

좋아. 앞으로 싫어하는 동물에 백조도 올려 두자. 애초에 이건 동물원 같은 데 가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없는 동물이니 괜찮다. 여기서만 더 안 마주치면…… 될 리가 있나. 이 백조 두 마리가 박서원팀의 핵심 멤버일 텐데.

“저 집에 가고 싶은데 알아서 가실 수 있죠?”

도서관에서 자료 찾기도 별 진전이 없었고 정신 사나운 백조를 보다 보니 지쳤다. 육체보다는 정신 쪽이.

“꽤애액…….”

백조는 어떻게 네가 날 버릴 수 있냐는 얼굴로 울었다. 생각보다 울음소리 섬세하잖아.

“계속 이러고 있자고요? 선배 때문에 아무 데도 못 들어가고 이러고 있잖아요. 우리 여기서 갈 길 갑시다.”

백조는 거칠게 항의했다. 도대체 백하연은 얘넬 어떻게 데리고 다니는 거야. 그래도 마지막 양심으로 여동생 앞에서는 얌전한 건가.

아.

“최근에는 동생 말고 박서원 씨가 돌봐 주고 있지 않았어요? 박서원 씨한테 연락해요?”

백조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애초에 허락을 구하려고 말한 건 아니었다. 가뿐히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탁.

“…….”

지금 백조가 내 손을 친 거야?

미친 거 아냐? 무슨 백조가……. 아니, 원래 인간이었다고 해도.

“…….”

백조가 사납게 노려봤다.

“그럼 어쩌라고요.”

“…….”

백조는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거 귀찮을 정도로 섬세하네.

생각해 보면 백조와 단둘이 있어 본 적은 처음이다. 애초에 이야기를 해 본 것도 처음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한쪽은 꽥꽥거리며 우는 것도 대화에 속한다면.

그동안은 백하연이나 박서원이 중간에 있었고 나도 백조도 서로에게 관심을 길게 주지 않았다. 나야 신기해서 쳐다본 게 다였고, 백조도 내 주위를 기웃거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친한 척이지.

애초에 10년 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직 ‘정해준’의 과거는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으니 뭔가 접점이 있을 수야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동생 말대로 내가 선배를 죽일 수도 없고.”

백조 모습일 때 죽이면 이건 동물 학대인가 살인인가.

내 손으로 시험해 보고 싶진 않지만 재판 결과가 궁금하긴 하다. 원래 인간인 걸 알고 있는 채로 죽이면 살인죄이려나.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가서 죽어라 비세요.”

“꾸으윽.”

백조는 풀이 죽은 채로 꾸르륵거렸다. 그 모습이 안타깝진 않았고, 여전히 귀찮았다. 이건 ‘정해준’의 감정이라기보다는 내 소감이다. 난 왜 팔자에도 없는 백조한테 선배라고 부르고 있어야 하냐고.

“까악.”

그때 까만 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배 부분이 하얗고 머리와 등이 까만 까치였다.

……내가 아는 까치는 한 마리뿐이다.

“작매 씨?”

벤치에 내려앉은 까치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길게 한 번 울었다. 종종거리면서 벤치를 걷던 까치는 내 무릎 위에 올라오더니 다시 울었다.

“까악. 깍. 까아악.”

까치가 다시 날았다. 날았다기보다는 살짝 뛰었다. 몇 발자국 앞에서 바닥에 내려와 날 보며 울었다. 따라오라고 말하는 모양새였다.

까치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따라갔다. 백주연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끽끽거렸지만 나와 함께 까치를 따라갔다.

까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차장 구석으로 향했다. 길게 늘어진 자동차 사이로 쏙 들어간 까치는, 곧 머리를 하나로 땋은 여자아이가 되어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작매 씨.”

“안녕하세요, 해준 씨!”

작매는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같은 조류라도 백조와는 차원이 다르다. 역시 한국인은 까치지. 인사성도 좋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지 않는가.

역시 나이를 먹으려면 저렇게 먹어야 한다. 요즘엔 나이를 허투루 먹는 사람이 너무 많다. 동물도 포함이다.

물론 작매는 본인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긴 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 동물이 좀 동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까치 세계에는 제 나이처럼 보일 수도 있지. 인간이 강아지나 고양이 나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어쩐 일입니까?”

저번에 봤을 때는 한복을 입고 있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평범한 인간 여자아이처럼 알록달록한 반팔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라고 신경 쓴 건가. 역시 이런 백조와 비교하기에는 실례다.

“박서원 그 또라이가 혼자 새끼 뱀 보러 가서 알려 주러 왔어요!”

“…….”

“……?”

“……아뇨. 혼자 갔다고요?”

“그놈이면 별문제는 없지만 일단 알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작매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나야 그렇다 쳐도 해준 씨는 동료 아닌가요?”

……딱 잘라 부정할 수 없는 사이란 게 안타깝다. 하긴 초능력자가 막 되었을 무렵에도 박서원과 같이 일한다며 주위에서 호들갑 떨었었다. 정작 그 뒤로 같이 움직인 일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지적당할 줄이야.

“그런 동료를 놔두고 혼자 갔단 점에서 빵점이지만!”

작매는 깔깔 웃었다.

“뭐, 지금은 여기에 있지만 곧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그 전에 다 해치우려는 생각이겠죠. 그놈 생각이야 뻔하지.”

“또 해외에 나갑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인간 잡아먹는 괴물 놈들 잡기에는 박서원만큼 유용한 게 없으니까…….”

“꽤액!”

작매의 말에 백조가 꽥 울었다. 동의를 하는 건지 항의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작매는 날개를 퍼덕거리는 백조를 봤다.

“근데 얜 왜 여기 있어요?”

“그러게요.”

“해준 씨랑 같이 있잖아요?”

“그냥 같이 있는 거죠.”

백조가 날개로 내 다리를 후려쳤다. 백조의 날개는 생각 외로 가동성이 좋다. 솔직히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아프진 않았다.

“사고 치고 도망친 걸 만났어요. 여동생이 죽이라던데…….”

“대단한 사고를 쳤나 봐요.”

작매는 백조를 보았다.

“너,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 돌아갈 수야 있겠느냐?”

백조는 고개를 홱 돌렸다. 할 말이 없어 보이는 뒤통수다.

“그런데 작매 씨.”

“네?”

“진짜 그냥 그 얘기만 해 주려고 온 건가요?”

드라마적으로 생각하면 슬슬 단서가 나올 시기기는 하다. 서울이 폭파되었던 시기를 방영 시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겨울이다. 지금은 딱 반년 전이니 이제 하나 정도는 튀어나올 만하지.

아마 정해영이 보았던 드라마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보통 드라마에서 악당의 사정까지 세세하게 조명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정해영도 이 내용을 떠들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야 한다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가슴은 납득하지 못했다.

걘 박서원의 행적이 드라마에 나왔어도 얼굴 얘기하느라 안 했을 애다.

그리고 그 드라마. 그 ‘빌더쓰’인지 빌어먹을 더러운 쓰레기 같은 드라마인지는 몰라도 그 정체에 대해서도 고민을 그만두기로 했다. 정체가 어쨌든 지금 이곳의 이야기가 그 드라마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정해영의 말을 떠올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내 새끼 진짜 너무 예쁘다…… 미친 거 아닐까? 내 새끼는 분명 요정일 거야. 이슬만 마시는 거지.’

단서, 를…….

정해영이 뭐라 말했든 이곳이 진짜 존재하는 세계인 건 맞는 것 같고, 내 세계도 당연히 존재한다. 김유신의 의미 모를 도움 덕분에, 오늘의 말대로라면 ‘혼’이 한 번 흐릿해졌더니 오히려 구분하기 쉬워졌다. 덕분에 좀 더 또렷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김유신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기는…… 했나?

그런고로, 이제 내 원망은 다시 고스란히 정해영을 향했다. 얘는 왜 드라마를 보고 내 새끼에 대해서만 지랄을 했는지. 드라마 줄거리라도 한 줄 더 말했으면 도움이 됐을 텐데. 진짜 이렇게 되고 나서까지도 도움이 안 된다.

“음…… 원래 지하국 이야기 좀 하려고 그랬는데, 박서원이 먼저 새끼 뱀한테 출발했다고 해서요.”

작매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래 봤자 여덟 살 여자아이로 보여서 귀엽기만 했다. 그래. 까치들 사이에서는 저 모습이 이백오십 살 먹은 할머니일 수도 있지.

“그런데 그동안 산함박 목격담은 없었다면서요? 새끼 뱀들이라고 알 것 같진 않은데.”

“얘네가 지하국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거든요. 지하국 사정을 좀 더 알지 않을까요?”

나는 작매의 말을 곱씹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작매 씨는 지하국에 내려가 보신 적 있으세요?”

“난 없는데 우리 아버지가 길잡이로 갔다 오신 적이 있다 했어요.”

도서관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나가던 선비가 까치가 안내해 준 동굴을 통해 지하국에 내려갔다고 했던가. 역사 기록이었군.

“정확히 그 지하국이란 게 어떤 겁니까?”

“어…….”

작매는 눈을 한 바퀴 굴렸다.

“지상에서는 제대로 설명 못 해요. 듣는 귀가 너무 많아서.”

“……듣는 귀요?”

작매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잖아요.”

좋은 소식을 준다는 까치가 눈앞에 있는데 그 속담도 진짜라고 해도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놀라긴 했다.

“새는 작매 씨잖아요.”

“쉿.”

“네?”

“하늘도 듣고 땅도 듣잖아요.”

“아, 네…….”

그것도 진짜였어? 아니, 도대체 어떻게?

“아까는 또 지하국 얘기하려고 했다면서요.”

“요즘 인간은 그 뭐냐, 콘크리트? 그걸로 건물 짓잖아요. 그 위에 올라가면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니 아무도 못 듣지요.”

인간 문명이란.

나는 뒤쪽에 있는 도서관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는요?”

“너무 낮아서…….”

기준도 까다롭고.

역시 이 세계는 제정신이 아니다. 특히 날짐승 쪽은.

“어쨌든! 박서원이 저어기 백조 두 마리랑 해준 씨 몰래 갔다 오려는 것 같아서 알려 주러 왔지요. 흥, 그 속내 시꺼먼 놈이 뭔가 숨기려고 하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다니까.”

뒷감당할 자신은 있으시고?

그러나 나는 현명하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으음, 어쨌든 새끼 뱀은 박서원이 찾아갔으니 괜히 신경 쓰지 말라고요! 그 말 하려고 왔어요.”

“……수고 끼쳤네요.”

“으으응,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는걸요.”

“꽤애애액.”

“요 백조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작매는 백조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럼 나는 박서원 따라가 볼게요. 박서원이 혹시 딴 맘 먹거든 꼭 알려 줄게요.”

고마운 이야기다. 나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옆에 백조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지금은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내 속셈은 다르지만 겉으로만 보면 딱히 걸릴 만한 대화도 아니고.

옆에서 백조가 물끄러미 날 보긴 했지만 모른 척 웃었더니 꽥, 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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