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26. 의미 없는 공양(4)
“안 돼!”
오늘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성찬이 불개를 끌어안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임상규가 감탄했고, 초능력자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했다. 이쯤 되면 백성찬에게 선택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절대 안 돼! 물론 우리 똘이는 똑똑하고 강하니까 지네랑 싸워도 이기겠지만!”
“그럼 딱이네요. 해준 씨가 성찬 씨에게 보호막을 두를 때까지 잠깐만 시간 벌면 되니까, 불개가 지네를 막으면…….”
백성찬은 임상규의 말을 가로막으며 고함을 빽 질렀다.
“지네 물면 우리 똘이랑 더 이상 뽀뽀 못 하잖아!”
……얼씨구?
* * *
백성찬이 불개와의 뽀뽀와 헤어질 준비를 하는 동안 수사관들은 지네가 먹다 남긴 마네킹을 정리했다.
제일 먼저 주위를 장식한 꽃을 태웠다. 종이로 만들어진 꽃은 금방 탔다. 그다음은 조심스럽게 마네킹 얼굴에 있는 부적 떼서 촛불에 태웠다. 흩뿌려진 쌀도 정리하기에 마네킹을 태우나 싶었지만 술을 뿌리고 끝났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이루어지는 의식은 일견 평화롭게까지 느껴졌다.
공양(供養)이라. 이것저것 잡다하게 섞여 있는 곳이지만 이런 것까지 있을 줄은 솔직히 몰랐다. 미끼로 인간을 내놓는 건 아니었지만 마네킹은 어쨌든 인간 형상 아닌가? 저 거대 지네의 식성도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고.
서울 한복판에 매년 한 번씩 나타나는 인간 잡아먹는 지네라니. 아니, 과연 서울에만 나타날까?
차단막 안에서 꿈틀거리는 지네를 봤다. 정해영이 봤다면 기절하겠군.
“저건 안 태워요?”
수사관들은 마네킹에게 술을 뿌린 후 더는 건들지 않고 물러났다. 저쪽에서의 괴담에서는 보통 불에 태우고 끝났는데.
“지, 지네를, 잡, 고, 태워야, 해요…….”
흠. 지네라.
아직도 백성찬은 불개를 끌어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슬슬 불개는 지겨워하고 있는데.
애초에 불개는 다음 월식이나 일식 때 돌려보내기로 되어 있다. 월식이 먼저인지 일식이 먼저인지 모르겠는데 옆에서 주워들었을 땐 여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렇게 정이 붙어서야 어떻게 보내나.
“그런데 오늘 씨.”
“네, 네?”
“저런 지네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겁니까?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뭐 그런 종류라면 엄청 싫을 것 같은데…….”
그러면 저기 있는 벌레를 싫어하는 허재환 같은 경우에는 죽을지도 모른다. 저런 놈들을 계속 상대해야 하는 초능력자들도 마찬가지고.
“어…… 여러, 가지, 설… 이 있는데, 유, 유력, 한 건…….”
“유력한 건?”
“지, 지하, 국?”
이게 또 이렇게 나오는구나.
지하국을 내려가니 마니로 한창 이야기하던 까치와 박서원을 떠올렸다. 뱀이 지하국으로 숨었을 거라 하더니 지하국은 무슨 요괴 세상인가 보다.
“거기서 뭐, 배고파서 기어 올라오는 거예요?”
“그, 그것까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나타나니 죽인다, 이 말이었다. 다른 놈도 아니고 인간을 공격하는 데다가 독까지 있으니 나타날 시기가 되면 이렇게 공양물을 준비해서 지네를 부른다는 것이다.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비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의 요괴대응방법들 대부분이 70~8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납득은 가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걸까.
“그놈의 지하국……. 뭐, 막거나 할 수는 없습니까?”
“지, 지금도, 지하, 국이, 실존, 하는…… 지, 도, 잘 모르고……. 이, 있다고, 해, 도…… 인, 간은, 갈, 수… 없어서, 요…….”
까치가 없는 곳 가지고 자긴 못 간다며 투정하진 않았겠지.
“지금, 은, 가는, 방법이, 모, 두, 소, 소실, 되어서…….”
다른 것도 아니고 소실되었다는 말에 아득한 비현실성을 느꼈다. 그런 건 다 전래동화일 뿐이라는 말이 돌아오지 않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옛날에는 알지 못했다.
“그런가요……. 만약 가는 방법이 있다면 오늘 씨는 가시겠어요?”
작매와 박서원이 지하국에 간다면 아마 나는 높은 확률도 가게 될 것이다. 아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야 한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놓칠 순 없지. 그건 드라마에 나왔을 만한 중요한 사건일 테니까.
그리고 나에게도 가야 할 이유가 있다. 단순히 복수니 뭐니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하국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봤을 때, 오늘의 말대로 내려가는 구체적인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나와 있는 것이 있었다. 지하국에 사는 사람들, 지상의 인간을 납치한 괴물들, 신묘한 힘을 가진 존재들……. 그곳이 이 세계에 남은 괴물의 집합소라면 박서원에게서 도망친 뱀들이 그곳에 모여들어도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박서원이 그토록 열심히 잡아 죽이던 이무기들도 있지 않을까. 용이 되기 위해 여의주를 만드는 이무기들.
가는 방법을 알아 놓으면 길잡이가 없어도…….
“아, 안전, 하다면…… 가 보고, 싶, 어요…….”
“안전하다면요?”
“뭐, 뭐가, 있, 는지… 모르, 잖아요…….”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호기심 채우다가 죽으면 곤란하죠.”
“마, 만약…….”
“네?”
오늘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가, 가는 게, 가능… 하, 다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멈췄다. 말을 더듬긴 했지만 이렇게 망설이는 일은 잘 없던 사람인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입, 구, 를, 막아, 놓… 고, 싶, 어요…….”
가볍게 충격을 받았다.
아니, 사실은 정해영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을 때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지, 지네, 같은… 게, 그, 곳, 에서, 올라…… 온, 다면…… 더는, 못, 올라, 오, 오게…….”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거 좋네요.”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이렇게 깨닫게 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 * *
“이제 우리 똘이와는…….”
“거 이제 그만하고 갑시다.”
“허재환, 너 자꾸 네 개 아니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데…….”
“그 불개도 백성찬 씨네 개 아니잖아요?”
허재환은 당당하게 말했다.
비록 백성찬의 연락처가 새겨진 개목걸이와 백성찬이 사 준 목줄과 백성찬만 보면 꼬리가 세차게 흔들렸지만 맞는 말이다. 백성찬은 어디까지나 불개의 임시보호자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네, 그럼 똘이도 성찬 씨를 잘 지켜 주겠군요. 다행입니다.”
임상규가 백성찬의 헛소리를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등을 떠밀었다. 백성찬은 끔찍하다는 얼굴로 지네에게 다가갔다.
“하하하. 형, 얼굴 풀어요.”
한평원은 축 처진 백성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성찬은 왈칵 짜증 냈다.
“뭘 얼굴을 풀어? 내가 지네를 태우러 오긴 했지만 살아 있다 못해 팔팔하기 짝이 없는 놈…… 을, 태우…….”
다만 말을 끝까지 잇진 못했다.
왜냐, 한평원도 백성찬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준 씨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맹세컨대 그렇지 않다. 그냥 깜빡했을 뿐이다. 내가 산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한평원이 무슨 역할을 했었는지.
“난 그냥 매년 하는 것처럼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한평원은 즐겁게 웃었다. 정말 즐거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웃었으니 된 거 아닐까. 한평원은 솔직히…… 생각 못 했다. 정말로.
아까 그렇게 말은 했긴 했는데 한평원이 아주 못 할 말은 아니었다. 한평원은 나름대로 신경 써 준 것일 테다. 그럭저럭 사정은 알고 있는 모양이니 복수랍시고 온갖 것들을 죽여 대는 박서원과 어울리다가는 못 볼 꼴을 보게 될 거라 생각했겠지. 괜한 걱정이고 솔직히 오지랖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넘어가 줄 만했다. 백성찬과 같이 지네를 마중 나가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처럼, 이건 내 의사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지만.
한평원은 쓰게 웃었다.
“설마하니 지네잡이에 나서게 될 줄은…….”
한평원의 서브 능력은 정화. 정확히는 자기 주변의 공기 정화이다.
아직 내 능력은 공기를 걸러 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지네를 태우기 위해 백성찬이 차단막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연기에 질식해 죽을 수 있었다.
중간에 서다흰이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어쨌든 그렇게 얘기가 끝났다.
백성찬과 한평원, 그리고 불개가 지네에게 다가갔다. 나는 두 사람과 한 마리를 반겼다.
“어차피 움직일 일은 없죠?”
나는 바닥에 나뭇가지로 대충 그려놓은 원을 가리켰다.
“지네 차단막을 풀고 여기에 보호막 칠 거니까 이 선 나오지 마세요.”
백성찬은 원 안에 서서 지네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데…….”
“저쪽 선이 큰 보호막 위치고요. 조금 여유는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불개가 지네 물고 빠져나가지 않게 해 주세요.”
“그건 똘이한테 말하렴, 해준아.”
“주인은 형이잖아요.”
“난 주인이 아니라 친구인 거고.”
이 사람 좀 이상해지지 않았나? 원래 이런 성격인 건가? 연수원 때는 용케 얌전했군.
“그런데 해준 씨.”
“네?”
한평원은 태연한 척하지만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보호막을 이런 식으로 펼쳐 본 적 있으세요?”
“이런 식으로요?”
“그러니까 큰 보호막 안에서 보호막을 이동…… 다시 펼치는 거요.”
“아.”
나는 아무렇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본 적은 없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걱정 마세요.”
“야, 정해준! 실패하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실패할 거라는 기분이 안 든다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났다.
“일단 큰 것부터 세우고…….”
김유신이 힘을 넣어 줬던 묵주는 없지만 어쩐지 힘을 끌어 올리는 게 쉬웠다. 이것도 경험이 쌓이면 느는 건가.
하얀빛을 띠는 반구가 백성찬과 한평원, 불개와 지네를 뒤덮었다. 만약을 대비해 초능력자들이 주위에 대기했다. 필요 없을 거라 얘기했는데 말이지.
“준비됐어요?”
불개를 도닥이던 백성찬이 불개를 가볍게 떠밀었다. 불개는 컹, 하고 한 번 짖더니 지네 주위를 탐색하듯 돌았다. 불개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지네는 거칠게 파드득거리더니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불개가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해준아, 시작할게!”
백성찬이 크게 소리쳤다. 백성찬의 손에서 작은 불꽃이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바닥에는 이미 불이 잘 붙도록 휘발유가 뿌려진 짚더미가 깔려 있었다. 백성찬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하겠다고 하자 임상규가 어디서 가져온 것이다. 당연히 백성찬과 한평원이 서 있는 곳에는 깔려 있지 않다.
불은 쉽게 붙었다. 보호막 너머로 나에게까지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차단막 풉니다!”
지네를 가둔 차단막을 풀었다.
“컹!”
불개가 앞으로 달려 나갔고, 지네가 불개를 덮쳤다. 불개는 훌륭하게 제 역할을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백성찬과 한평원 주위로 손쉽게 보호막이 둘러졌다.
“좋아! 이대로 다 태워 버려!”
허재환이 큰소리로 외쳤다.
보호막 안이 곧 새까만 연기로 가득 찼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불개가 힘차게 짖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렸다.
“이거 보호막 풀 때 조심해야겠습니다. 잘못하면 연기 때문에 민원 들어오겠어요.”
임상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해준 씨? 뭐가 잘못됐습니까?”
“아뇨…….”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하얗게 빛나고 있는 손. 두 겹의 보호막. 딱히 이상할 건 없다.
“……?”
하지만 이상하다. 왜 이렇게 능력이 쉽게 끌어 올려지는 거지?
마치, 김유신이 힘을 넣어 주었던 묵주를 차고 있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