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26. 의미 없는 공양(3)
“왔다!”
“다들 준비!”
갑자기 살기 싫어졌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 해도 2m 지네가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기어 다니는 걸 보고 있으면 살기 싫어질 것이다. 심지어 그걸 잡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으…….”
곳곳에서 신음성이 들렸다.
거의 검은빛을 띠는 어두운 고동색 껍질, 마디, 다리……. 자세히 보기도 싫다.
보통 볼 수 있는 평범한 지네도 징그러운 마당에 그게 크기가, 대충 2m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큰 키다. 아니, 일어서지 마! 차라리 엎드려! 다리 흔들지 마!!
“왈!”
백성찬의 불개가 크게 짖었다. 모두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백성찬이 지네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미리 땅에 뿌려 둔 기름 위로 불을 질렀다. 지네를 잡기 전까지는 한평원이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으, 이, 이거, 진짜 이 방법밖에 없어?!”
지네를 잡아야 하는 근접 전투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주춤거렸다. 그들이 이해가 갔다. 너무 이해 가서 문제지. 지네는…… 너무 컸다.
삐익!
“여러분, 얼른 잡고 집에 갑시다!”
뒤쪽에서 임상규가 외쳤다.
그간 비상근무를 하면서 임상규가 호루라기를 불며 지시를 내리는 걸 처음 들었다. 그만큼 초능력자들이 망설이고 있었다. 이래서 초능력자들을 잔뜩 부른 거였군…….
심지어 손요운조차 움찔거리며 지네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지 않은가. 그래. 잡기 힘들지. 이해한다.
그때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왈! 왈왈!”
지네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불개가 사납게 짖으며 앞으로 뛰쳐나갈…… 뻔했으나 백성찬이 가까스로 목줄을 붙잡았다.
“안 돼! 똘이야, 안 돼! 지네 물면 못 쓴다!!”
백성찬은 필사적으로 불개를 말렸다. 아, 그래……. 애완동물이 바퀴벌레를 물어오면 좀 싫기야 하지…….
초능력자들이 지네 주위를 빙빙 도는 동안 마네킹에서 떨어져 나온 지네는 땅을 꿈틀꿈틀 기었다. 마네킹이 넘어지면서 지네가 물어서 난 구멍에서 쌀이 쏟아졌다.
“으, 으아아악!”
지네는 가까이 있던 초능력자를 덮쳤다. 초능력자는 비명을 질렀다. 내가 저 위치에 안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진짜로. 이곳에 온 뒤로 이렇게까지 진심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지네가 빠르긴 했지만 크기가 크고 불 때문에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따라잡지 못할 건 아니다.
하지만 왜 초능력자들이 지네에게 덤벼들지 못하고 있는가? 이유는 뻔하다.
손요운 같은 능력이 아니면 대부분의 초능력자들이 쓰는 무기는 칼이다.
그리고 칼은 보통 찌르거나 베는 물건이다. 그런 물건으로 지네를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
푸욱.
“히이익!”
“꺅!”
“아니, 거기서 그렇게 도망치시면 어떡합니까!”
임상규가 답답한지 뒤에서 외쳤다. 지네의 체액을 피해 사방팔방 달아나던 초능력자 중 하나가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긴 뒤에서 소리나 지르는 주제에!”
“…….”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목소리가 너무 컸다. 불쌍한 초능력자는 공무원에게 개기면 안 된다. 비상 상황에 초능력자를 부르는 건 요괴대책팀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계산하여 초능력자를 소집한다. 요괴대책팀은 생각보다 권한이 막강하다. 가여운 초능력자 하나쯤은 손쉽게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손요운과 한평원 손을 들어주고 싶단 말이지. 은근슬쩍 말을 보태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의 단 두 명밖에 없는 보호 능력자로서 꽤 갑질을 할 수 있는 위치지 않은가.
말은 이렇게 해도 이 나라는 보호 능력자가 없던 시간이 길다. 내 능력은 아직까지 있으면 편리하지만 필수는 아니다.
“으, 으아아악!”
목소리가 컸던 게 죄였던 초능력자는 눈을 딱 감고 지네에게 뛰어들었다. 뛰어든다고 해 봤자 지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손을 휘적거리는 정도다.
“아니, 허재환 씨! 재환 씨 사정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잖아요! 얼른 더 붙어요!”
자비 없구먼. 초능력자를 다루는 정부 기관인 만큼 임상규는 능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허재환은 울상을 지으며 다가갔다.
“으, 저 모기도 못 잡는데.”
허재환은 손을 움직였다.
사실 능력 조건에 ‘반드시 손을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능력은 별로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초능력자들이 능력을 사용하면서 손을 움직이는 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였다. 능력이 어느 방향으로 발동하는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허재환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손을 그었다.
“재환 씨, 아직 멀어요! 조금 더 가까이!”
이렇다 할 피해는 못 줬지만 지네가 남자를 인식하기에는 충분했다. 남자는 흠칫거리며 뒷걸음질 쳤지만 그보다는 지네의 속도가 더 빨랐다.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지네는 발을 마구 꿈틀거렸다. 여차하면 보호막을 쳐 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지네의 움직임이 멈췄다.
“히이익, 가, 감사합니다!”
손요운이 지네의 꼬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헬멧과 장갑을 끼고 있다고는 해도 저 지네를 잡을 생각을 하다니. 소방관이라서 그런가? 순수하게 감탄밖에 들지 않았다.
허재환은 벌레를 무서워한다는 말이 사실이긴 했는지 거의 울면서 손을 움직였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사선. 거리가 한결 가까워진 탓인지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시작 전 브리핑에서 들었던 허재환의 능력이 바람이었던가? 허재환의 의지대로 날카롭게 벼려진 바람이 지네의 머리를 베었다. 검은빛을 띠는 체액이 퍽 튀었다.
“으아아……!”
허재환은 가까이서 칼부림하는 타입의 초능력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헬멧을 쓰진 않았다. 지네의 머리는 허재환보다 위쪽에 있었고.
……맨 얼굴에 지네 체액을 뒤집어쓰는 건 너무 고통스럽잖아. 내가 더 고통스럽다. 김유신의 묵주가 아니어도 원래 보호막을 치는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니다. 새하얀 빛을 띠는 투명한 막이 허재환을 감쌌다.
“어, 어어?”
치이익…….
독이 있다더니 저 체액에도 독이 있는 건가? 체액이 닿은 보호막에서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올라왔다. 미약하게 나에게도 충격이 돌아왔다.
“허, 허억,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허재환은 엉덩방아를 찧었다가 더듬거리며 물러났다.
2m나 되는 크기만큼이나 겉껍데기도 단단했는지 꽤 깊게 베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네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스럽기는 했는지 다리가 마구 꿈틀거렸다. 손요운은 용케 저걸 잡고 있는군. 멀찍이서 봐도 속이 안 좋아지는 풍경이다.
“체액 뒤집어쓰지 않게 조심하세요. 독 있습니다.”
“네?”
“체액에도 있어요?”
브리핑에서 임상규가 특히 주의를 줬던 건 지네에게 물리는 것이었다. 체액도 어지간하면 피하라고 말하긴 했는데 애초에 누가 원해서 저걸 맞고 있겠는가.
“꽤 강한 것 같으니까 맨몸에 튀면 꽤 고생할 겁니다.”
허재환이 일어나는 걸 보며 보호막을 풀었다. 허재환은 냉큼 뒤로 달렸다. 지네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인간이 달아나는 걸 보자 더 사나워졌다.
결국 손요운이 나가떨어졌다.
바톤 터치하듯 다른 초능력자들이 달려왔다. 헬멧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뒷모습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초능력자들을 보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
“음?”
지네에게 달려들던 초능력자들이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해준 씨?”
임상규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아니, 이거 너무 비효율적인 방법인 것 같아서요.”
나는 땅을 툭툭 걷어차면서 말했다. 주머니에 넣은 손이 하얗게 빛나는 중이다.
지네는 땅바닥을 기었다. 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보호막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박물관 앞에서 말도 딱 저 모양으로 돌았는데.
“좀 더 간단하게 저놈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임상규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보호막에 갇힌 지네를 구경하고 백성찬을 불렀다.
“성찬 형.”
“응?”
“할 수 있겠어요?”
“……뭘?”
나는 픽 웃었다. 흠. 결코 예전에 저 형이 날 산불 속으로 밀어 넣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 * *
“못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성찬 씨, 성찬 씨가 우리 희망입니다.”
“빛! 앞으로 빛이라 부를게요!”
“이 사람들이 미쳤나!”
“왈! 왈왈!”
“해준아, 내가 뭘 잘못했어? 왜 그런 미친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된 거야?”
백성찬은 자기 손을 붙잡고 애원하는 초능력자들을 겨우 뿌리친 채 나에게 달려들었다.
“미친 생각이라니. 효율성을 따진 거죠.”
“야! 정해준! 아니, 해준 님! 제발요!”
“성찬 씨, 성찬 씨만 희, 아니 도와준다면 금방 끝납니다!”
“허재환, 너 인마, 지금 희생이라고 말하려고 했지?”
“잘못 들었습니다.”
“내가 들었거든?”
“잘못 들었다니까요?
백성찬이 실랑이하는 동안 임상규는 감탄했다.
“보호막을 두 겹 펼치셨다고요? 아니, 언제부터요? 등급 새로 받으셔야 하겠는데요.”
보호막을 두 겹 펼친 건 신선비 잡을 때였지. 그때 말 안 했던가? 안 했던 것 같네. 그 뒤로 딱히 이 사람 앞에서 두 겹이나 쓸 만한 일도 없었고.
“신선비 잡을 때요.”
“신선비…… 허, 진작 알았으면 좀 더…….”
임상규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옛날에 정말 이 사람이 부른 노래를 좋아했었는데.
“하나만 펼칠 때보다 기력이 많이 소모돼요. 어지간하면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아, 물론 그렇겠죠. 당연합니다. 제가 초능력자는 아니지만 이해하고말고요.”
임상규는 과장된 목소리로 맞장구치고는 백성찬에게 말했다.
“그럼 성찬 씨가 수고해 주는 걸로…….”
“아니, 누구 맘대로요? 난 못 해요, 못 한다고요!”
“그러지 마시고…….”
백성찬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생각해 봐요. 해준이가 보호막을 두 겹 펼친다고 해도, 하나는 저기 지네를 감싸잖아요?”
“그렇죠.”
“하나는 나를 포함해서, 아니, 내가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어쨌든 나를 포함해서 크게 있고요?”
“바로 그거죠.”
“그리고 내가 그 안에서 불을 지른다, 이 얘기잖아요. 지금 정해준이 얘기하는 건.”
“그렇다니까요, 형.”
사실 처음 생각했던 건 큰 보호막 바깥에서 백성찬이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럼 지네를 감싼 차단막만 풀어도 알아서 잘 죽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은 거대 지네의 발화점이 내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었다. 백성찬이 주위에 지른 불처럼 평범한 불은 지네의 발을 당장 막을 수는 있지만 죽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지네를 죽일 만큼 온도가 높은 불은 백성찬이 계속해서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불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생각해 봐, 해준아. 지네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큰 보호막은 풀 수 없다, 이 말이잖아.”
“네.”
“근데 나도 내 손을 떠난 불은 위험하단 말이지? 온도를 조절한다고 해도 내가 그 속에서 멀쩡하다는 건 아냐. 그러니까 네가 지네를 가둔 차단막을 뺀 다음 바로 날 감싸야 하잖아.”
“날 못 믿어요?”
“널 그냥 믿기엔 지네와 내 사이가 너무 가까워지잖냐…….”
백성찬은 음울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보호막을 치기 전에 지네가 나한테 달려들면? 불이 나한테 붙으면? 내가 약한 소리 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이 너무 낮지 않아? 진짜 내가 널 못 믿겠다는 소린 절대 아니고…….”
보통 저렇게까지 강조하면 못 믿겠다는 소리지만 모른 척 넘어가 줬다.
“좀 더 안전한 길로 가자는 거지.”
백성찬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뭐, 나는 그냥 의견만 낸 거고, 실행하는 건 또 다른 문제긴 하다. 나야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거지 아까 방식 그대로 해도 문제는 없다. 초능력자들이 위험할 때 보호막만 쳐 주면 되니까.
“그것도 그렇죠. 괜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고…….”
“안 돼!”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남들도 다 받아들인 건 아니다. 벌레가 너무 싫다는 허재환을 필두로 다른 초능력자들이 백성찬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하긴 아무리 벌레를 잘 잡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2m 크기의 지네를 잡고 싶진 않겠지. 일단 생긴 게 너무…… 그렇다. 이게 영화라면 최종 보스쯤 되는 생김새다.
“제발, 날 위해서라도, 백성찬 님! 성찬 형님!”
허재환은 숫제 울면서 빌었다.
“아, 몰라, 난 더 못 해 먹겠어. 팀장님, 제발 지네 같이 벌레 종류일 때는 나 부르지 말아달라니까요!”
허재환이 다시 백성찬을 붙잡고 토로하기 시작하자 다른 초능력자들도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 현장에 모인 이래로 초능력자들이 가장 활기를 띠는 순간이었다. 그중에는 어쩐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한평원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쟤도 참 기구한 인생이다 싶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 저기.”
참고인 자격으로 이 난장판 회의를 관전하고 있던 오늘이 조그맣게 손을 들었다.
“그, 그…….”
물론 워낙 작은 목소리라 다들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잠깐 다들 조용히 해 주세요.”
“네?”
“수사관님이 할 말이 있다 하시네요.”
오늘이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귀 끝이 빨갛다.
“저, 저, 불개, 요…….”
“네? 우리 똘이요?”
“초, 초능, 력자님…… 개, 지요?”
알레르기가 있다더니 어느새 애견가가 되어 버린 백성찬은 주둥이 가볍게 나불거렸다.
“제가 잠깐 데리고 있는 아인데, 엄청 똑똑해요. 수사관님도 불개 아시죠? 성격도 순하고 머리도 좋다니까요.”
“사, 사냥, 개니까…… 사, 냥도, 잘, 하죠?”
“얘가 어떻게 발견됐는지 모르세요? 아니, 얘가 글쎄 여우를 잡아다가…….”
“그, 그, 그럼, 사냥, 도, 잘, 하…… 고, 불…… 에, 피, 피해, 안, 입…… 는, 거죠?”
백성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일 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