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26. 의미 없는 공양(2)
제물을 바친다.
가발을 쓴 마네킹에는 표정이 없다.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힌 부적이 붙어져 있다.
밤에 보기도 싫지만 대낮에 보기에도 조금 기분이 나쁜 생김새였다. 수사관들은 마네킹 안쪽에 쌀을 채워 넣었다.
정해영은 자기가 보던 드라마가 호러물이라는 소리는 안 했다. 양심도 없는 년. 이 정도면 솔직히 호러물 아닌가? 하다못해 귀신이 나오더라고 말하기라도 하던가.
신라인의 미친 이기주의에 대해 설명하던 오늘은 지네를 잡고 다시 이야기하자며 일터로 돌아갔다.
‘그, 그러니까, 해준, 씨가, 자, 자길, 도울, 수, 있는, 것도, 영광, 이니까… 도, 도움이, 된, 다고…… 말한, 거, 일, 수도…… 요.’
이 무슨 정해영 같은 개소리인가?
‘서, 선량하고, 가, 강한, 혼, 을 돕… 는 건, 공덕, 을, 쌓는… 거니, 까… 요…….’
정말 정해영 같은 소리다.
‘그, 그, 그래서, 신, 라… 인들이, 시, 싫어, 요…….’
싫어할 만하지.
하긴 애초에 김유신은 자기가 늘 가던 길을 갔다고 말 목을 베어 버린 인간이다. 김유신과 관련된 일화는 하나같이 그런 식으로 정신이 좀 나가 있었다. 그런 성질머리라면 천 년, 정확히는 천오백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법했다. 원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댔지 않나. 별 속담이 진실이 되어 있는 이쪽 세상의 법칙대로라면 세 살 버릇이 죽어서도 유지될 수 있겠지.
아사달 쪽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같은 신라 출신일 잠실의 청룡을 떠올리자 조금 납득이 갔다. 그쪽도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고 의미심장한 말만 날렸지. 이쪽 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아니 생각해 보니 아사달은 아내 찾는답시고 탑 그림자를 없앴다 돌려줬다 난리였다. 역시 이쪽도 제정신이 아니다.
물론 모든 신라인이 그렇지는 않겠지. 하지만 천 년도 훌쩍 넘은 시간까지 신(神)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자들이다. 자아가 확고한 이들이기에 오늘의 말처럼 인간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해준 씨.”
“……오랜만이네요, 평원 씨.”
“하하, 얼마 전에 누나와 만났다면서요?”
혼자 우두커니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수사관들을 보고 있으니 한평원이 서글서글 웃으며 인사했다.
한평원이 정말 주인공일까?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이미지가 좀 약한 것 같은데. 어쩐지 한평원은 주인공보다는……. 묘하게 희미한 분위기다.
얜 옛날에도 그랬다. 그래서 영화에서 반전으로 범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뒤집어졌었지. 선량한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고.
“평원 씨가 바빠서 연락을 잘 안 받는다고 하던데.”
정확히는 인권 운동하느라 정신이 팔렸다고 했다.
인권 운동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가족으로서는 걱정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한평원은 여러모로 공격당하기 좋은 위치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니까.
정황상 한평화는 박서원을 돕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에 그리 분노하는데 복수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다. 서천꽃 새싹을 나를 통해서라도 박서원에게 전해 준 것만 봐도 그렇다. 박서원한테 한평화도 돕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좀 일이 있어서요.”
……그럼 한평원은 어떨까.
한평원은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평화보다는 덤덤히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못해도 한평원은 주인공 근처의 조연일 테니 덤덤하게 받아들였을 확률이 높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나름의 방법으로 복수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초능력자 인권 신장이라는 방법으로.
한평화의 말을 어디까지 사실로 생각해야 할지는 애매하지만 10년 전 강철이 사태 때 남매의 아버지, 한수현이 거의 혼자서 달려든 건 사실이었다. 검색해 보니 다 나오던데. ‘10년 전, 우리에게는 수많은 영웅이 있었다. 그중 초능력자 한수현은…….’
“누나는 평원 씨 엄청 걱정하던데요.”
“누나가 잔걱정이 좀 많아서요.”
“손위 형제가 다 그렇죠.”
“해준 씨도 형제 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동생요.”
“여동생…… 귀엽겠네요. 전 사촌들도 다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동생 가지고 싶었거든요.”
“진짜 가지면 그 말 안 나올걸요.”
한평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뒤통수에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시할까 싶었지만 아까 그 방향에 누가 서 있는지 봤었다.
어깨너머로 흘깃 돌아보았다.
“아, 저번에 신선비 잡을 때 요운 형이랑 만났다면서요?”
손요운과 서다흰이 있다. 이쪽이 바라보자 두 사람 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나도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했다.
“네, 뭐…….”
“형이 해준 씨 능력 덕분에 되게 편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요?”
“요운 형이 능력이 능력이다 보니까 좀 땜빵 식으로 불려 다니는 일이 많거든요. 좀 얻어맞아도 멀쩡하니까.”
“뱀 잡을 때 보니까 대단하긴 하던데요.”
“요운 형이 첨부터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거든요. 원래 3등급 아슬아슬하게 받았던가? 소방관 출신이기도 하고, 저등급에서 올라와서 여러 일에 불려 다니느라 초능력자들을 많이 봤었대요.”
손요운 쪽이 주인공인가…….
“그때마다 합이 안 맞으면 큰일 날 뻔한 일이 많았는데 신선비 때는 해준 씨가 다 막아 줘서 편했다더라고요. 하긴, 산불 속에서도 멀쩡했으니까 해준 씨 등급 더 올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손요운이 주인공이라면 나를 좀 좋게 봐 줬으면 하는데. 주인공과 척지긴 싫다. 어쨌든 드라마 15화 때 유일하게 살아남는 놈 아닌가.
“전 특수 능력이라서 등급은 크게 상관없으니까요.”
“하긴 보호 능력자는 수가 워낙 적어서 등급 매기기도 힘들 거예요. 쓸모 있다고 자주 불려 다녀서 그렇지.”
“그러니까요. 무슨 일만 생기면 부른다니까요? 제가 3등급이었어도 임 팀장님은 부를걸요.”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안 좋은데. 이번엔 뭐가 문제지.
“……저기, 해준 씨.”
“네?”
한평원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주제넘은 참견인 건 아는데…….”
거봐. 불안하다니까.
저런 말을 하는데 불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인간의 감각은 의외로 믿을 만하다. 보통 오감으로 말하던 ‘저쪽’과는 달리 여기는 ‘육감’이 정식으로 인정되는 세계니까.
“그, 박서원 씨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초등학생도 아니고 말이지.
아주 예상 못 한 말은 아니지만 육성으로 들으니 기분이 달랐다. 아직 이쪽을 보고 있는 손요운이 보였다. 분명 신선비 때의 일을 한평원에게 말해 줬다.
……뭐, 그래. 손요운이 그 날 박서원을 말리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인간을 납치하고 초능력자들을 공격한 놈이지만 그때 신선비는 명백히 도주 의사를 잃고 순순히 항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반항이 없는 이를 죽이는 건 꺼려질 만한 일이다. 납치되었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도 아니었고. 반항도 하지 않는 이를 구속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인간이 아니라고는 해도 침팬지 같은 동물이 아니라 그냥 인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화도 가능했고.
……마치 박서원이 사형을 집행하는 꼴 아닌가.
결과적으로 박서원의 공범 비슷한 게 되었지만 지켜보던 입장에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만약 그 날 내가 보호막을 거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손요운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박서원과는 척을 졌을지도 모른다. 손요운과 한평화와 함께 초능력자 인권에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겠지. 그럼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서원과 한배를 탔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다.
한평원을 보았다. 저쪽에서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배우일 텐데 어쩐지 한평화와 닮아 보였다.
“어…… 해준 씨?”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한평원을 불안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실제 배우도 나보다 어렸고 한평원으로서도 나보다 어리다.
이쪽도 나름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다. 10년 전 가족을 잃은 사람들.
“평원 씨.”
“네?”
“평화 씨가 박서원 씨와 잘 아는 사이 같던데……. 평원 씨도 박서원 씨 알죠?”
박서원이 막 능력을 각성했을 때 한훈열에게서 힘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한평화가 그때 박서원을 만났다면 한평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 어릴 때 만난 적이 있어요.”
한평원은 내 예상대로 긍정했다.
“언제 처음 만났어요?”
“어…….”
한평원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서원이 형이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니까…… 9년쯤 전이죠?”
얼씨구. 원래는 형이라고 부르는 사이였구만. 그만큼 친한 사이인데 나보고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한평화도 집안 어르신 눈을 피해서 내게 꽃을 전해 달라 부탁했었지. 그렇다면 한훈열과 한진열은 박서원과 완전히 갈라섰다고 생각하면 된다.
강원도에서 한훈열이 했던 말이 이거였을까. 박서원 욕도 엄청 했었지.
그 집안 사람들은 여동생을 잃고 악만 남았던 박서원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다.
“저, 해준 씨?”
한평원이 다시 날 불렀다.
지금이라도 내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이러면서 손요운과도 좋은 관계를 만드는 편이 나을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박서원과 계속 움직인다면 필시 손요운과 부딪칠 일이 또 생긴다. 어정쩡하게 간만 보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제가 박서원 씨를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아세요?”
당연히 모르겠지.
한평원은 고개를 저었다.
“10년 전 장례식장에서요.”
내 입으로는 처음 그때 일을 담았다.
한평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10년 전 장례식장. 한평원은 내가 언제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평원 씨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손요운 씨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어쩐지 기분이 좀 좋아졌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조금 미쳐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새빨간 종이꽃이 흩날렸다. 끝부분이 흰색으로 염색되어 하얀 눈이 얇게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김유신의 말이 나타나서 난동 피웠을 때 봤던 의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좀 더 전통적으로 보였다. 알록달록한 꽃이나 상 위에 잔뜩 올린 과일, 떡 같은 것들이 그랬다.
틈틈이 인터넷으로 찾아보거나 자료집을 보며 공부한다고 해도 이쪽은 영 모르는 분야이다.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백성찬이 불개 목줄을 꽉 잡는 게 보였다. 인간들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불개의 꼬리도 얌전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능력자가 아닌 공무원들은 이미 뒤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각자 맡은 자리에 서 있는 초능력자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공양 의식을 하는 수사관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2m 크기의 지네를 가까이서 상대하고 싶지 않아 했다. 당연했다. 그러나 일이란 건 꼭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는 법. 근거리에서 지네와 부딪쳐야 하는 초능력자들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입던 능력자용 슈트를 입었다. 머리에도 보호 장비를 착용했다. 지네 독을 뒤집어쓰면 위험하니 어쩔 수 없었다. 손요운 또한 슈트와 헬멧을 쓴 채 몸을 풀고 있었다.
딸랑.
방울 소리가 멈췄다. 수사관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오늘이 내 옆을 지나가며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화이팅!’
“…….”
지네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