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26. 의미 없는 공양(1)
“안녕하세요.”
“아, 해준 씨 왔습니까?”
임상규가 반갑게 인사했다.
“네, 뭐……. 오늘은 사람이 좀 많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복작복작하게 모인 초능력자들이 있었다. 수만 따지면 봄에 산불이 났을 때 모였던 것과 비슷하다. 어째서인지 구급차도 몇 대 와 있었고.
“……?”
모여 있는 초능력자들의 얼굴들이 유례없이 심각했다. 구급차 근처에 모여 있는 구급대원들이나 경찰들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고 불안하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나왔길래 분위기가 이렇습니까?”
의아해서 임상규를 봤지만 임상규는 또 분위기가 가볍다. 하하, 웃고 있는 걸 보면 심각한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신선비 잡을 때는 아예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별거 아닌데 다들 괜히 심각하다니까요.”
“별거 아닌데 이만큼이나 모였다고요?”
모든 공무원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서 요괴대책팀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초능력자 부리기를 아주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 일이 그거니까 어쩔 수 없긴 한데, 매일같이 전화를 받고 불려 다니다 보면 원망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본래 사람 마음이란 게 다 그렇지 않던가?
“진짜 별거 아닙니다. 하하, 저 못 믿습니까?”
“…….”
굳이 생각을 숨기지도 않았다.
임상규는 서운한 얼굴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 할 일이 있다며 사라졌다.
내가 저러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실 따지면 요괴대책팀은 초능력자의 주적 아닌가.
한평원과 손요운이 초능력자 인권 운동을 한다면 이쪽부터 해결해 줬으면 싶다. 뭔가 하려고 하면 불려 다니니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원래라면 오늘이나 내일 작매를 따라 30살짜리 새끼 뱀을 만나러 가려고 했다. 물론 박서원도 함께였고.
‘설마 죽이려고요?’
‘내가 뭐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니는 줄 압니까?’
‘딱히 안 그런 것도 아니잖아?’
‘조용히 해요, 작매 씨. 전 여우와 달리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아서 인간에게 해 끼치지만 않았으면 안 잡아요.’
‘그럼?’
‘탐문이죠.’
‘폭력을 써서?’
‘그건 필요할 때만.’
라는 대화를 나눴었는데, 솔직히 따라가긴 싫었다. 수틀리면 신선비 때처럼 죽일 게 뻔했고. 뭐, 박서원의 말대로 신선비는 인간을 납치하기까지 했으니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놈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니 간다고 하긴 했다.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봐야 하니까. 거기에는 다른 이유…… 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점차 내 감정이 이곳에 동화되어 가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새까만 뱀을 생각할 때마다 울화가 치밀었다. 비이성적인 분노다.
적어도 이곳에서도 ‘정해준’이 있는 건 확실하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쪽의 기억이 넘어오고 있고.
……그 복숭아 때문이겠지. 내 영혼이 이 몸에 매여 있는 거라면 이 몸은 ‘이쪽’ 정해준의 것일 테니까.
어쨌든 원래는 새끼 뱀을 만나러 가려고 했다. 임상규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박서원은 얄미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고, 나는 터덜터덜 소집 장소로 향했다.
박서원의 능력이 필요 없는 일인가 했는데 이만한 초능력자들이 모여 있는데 박서원을 부르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다. 산불 같은 일이면 박서원이 쓸모없겠지만 경찰들이 교통을 막고 있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고.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 정도 되면 정부의 갑질도 피해 갈 수 있나 보다. 정부에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대체할 수 없을 만한 능력을……. 가만, 그럼 나도 포함되는 거 아냐?
그래서 박서원이 그런 재수 없는 얼굴로 날 본 건가?!
“어, 역시 너도 왔냐?”
“왈!”
백성찬이 개를 끌고 다가왔다. 검은 삽사리. 불개다.
“이런 데 데리고 와도 돼요?”
“괜찮다던데. 그리고 얘가 나보다 인기 많아. 다들 나보고 똘이 두고 꺼지라더라.”
“그러게 평소에 행실을 제대로 하고 다녀야…….”
백성찬은 못 들은 척했다.
나는 백성찬의 옆을 걸으며 물었다. 불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런데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요? 평소보다 모인 사람들도 많고. 임 팀장님은 별로 안 심각해 보이던데.”
“아…… 너 방금 와서 오늘 뭐 나오는지 못 들었지?”
“네? 네.”
곳곳에 모여 있는 초능력자 중에 아는 얼굴이 많았다. 대개 비상근무를 뛰면서 한 번씩은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중에 좀 더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있긴 했다.
저기, 모여 있는 북천의 사람들처럼.
한평원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 옆에 손요운이 있었고, 지난번 고깃집에서 잠깐 인사했던 서다흰도 서 있었다.
이성은 저 무리에 다가가서 뭐라도 알아내라고 하는데 본능이 가길 거부했다. 왠지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놈…….”
“네?”
“아주 지독한 놈이 나와.”
백성찬은 뭐가 그리 거창한지 자꾸 뜸을 들였다.
“도대체 뭔데요?”
백성찬은 입에도 담기 싫다는 얼굴로 툭 내뱉었다.
“지네.”
“……네?”
“지네라고.”
지네?
물론 벌레를 싫어할 수야 있지. 나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심각해질 일인가?
음. 여태 상대했던 것들을 떠올리면 지네는 크기가 좀 작긴 하지. 크기가 작은 만큼 잡기 힘들 수도 있고……. 아니, 그렇지만 그건 이 분위기와는 좀 다른데. 더군다나 작은 게 문제라면 이렇게 초능력자가 많이 모일 필요도 없다.
“크기가 보자…….”
백성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한, 이 정도?”
머리 위로 손이 쭉 뻗었다. 심지어 백성찬은 까치발까지 들었다.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뭐가요?”
“지네가.”
백성찬의 손을 봤다. 올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올린 손.
“……진짜요?”
“응.”
손 높이를 보았다.
“진짜?”
“진짜라니까.”
백성찬은 손을 내렸다.
“다들 괜히 칙칙하게 죽어 있겠어? 2m짜리 지네 상대할 생각에 그런 거지. 왜 이렇게 많이 모였냐고? 2m짜리 지네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안 되거든.”
“아…….”
“그래서 다 부른 거야. 제대로 못 싸우니까 쪽수로 밀어붙이자 전술이지.”
갑자기 이 분위가 이해됐다. 이해되고도 남았다. 나까지 무서워지기 시작했으니까.
“날씨가 습해지면 한 번씩은 꼭 나온다니까. 길이가 2m 정도 되고, 몸통도 엄청 두껍다? 그게 다리가 수천 쌍씩 달린 채 널 덮치는 거야…….”
“악, 말하지 마요!”
“최고는 불에 태워 버리는 거고, 하책은 베어 버리는 거야. 왜 베는 게 안 좋은지 알아? 보통 베려면 가까이 가야 하잖아? 근데 그 정도 크기의 지네를 베면 몸에서 체액이…….”
“으으윽.”
백성찬은 껄껄 웃었다.
“괜찮아. 난 지져 버리면 내 곁에 안 오거든. 넌 여차하면 보호막 펴고 있으면 되잖아?”
“왈!”
불개는 사람 속도 모르게 밝게 웃었다.
나는 한평원을 슬쩍 보았다.
“그럼 물 능력자는 왜 온 겁니까?”
소집 장소는 늘 그렇듯 산. 이 나라 토지 대부분이 산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뭐가 생기기 좋은 곳이 산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7할 정도의 비율로 산에서 모인다. 이번에는 지네라서 그런가. 원래 산에는 기상천외한 벌레들이 많은 법이다.
불 능력자인 백성찬이나 하다못해 신체 강화 능력 쪽인 손요운 정도는 이해가 되는데…….
“저쪽? 저긴 청소 담당.”
생각지도 못한 업무가 나오는군.
“지네 체액에는 독이 있거든. 땅에 튄 것들은 물로 최대한 중화시켜야지 나중에 사고가 안 생겨. 구급차가 와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야.”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소리다.
대한민국의 초능력자,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
……지금이라도 한평원과 손요운을 응원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언제 집에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그동안 사람대접 좀 받으면서 지내도…….
아니면 박서원처럼 능력 믿고 배 째라고 하던가. 인간으로서의 양심만 살짝 내려놓으면 이쪽이 간단하긴 하지. 시간도 뺏기지 않고.
* * *
지네는 위험도가 높은 요괴다. 날씨가 덥고 습해지면 간혹 나오는데, 도심지에서도 종종 목격되고 독을 가지고 있어 장마철 최우선 처치대상이라고…… 한다.
지극히 정상 범주의 사고를 하는 현대인으로서 도시 한복판에 독을 가진 2m 지네가 나타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정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거 아냐?
……잠실 타워에 수십 미터짜리 용이 살고 있는 걸 보다 보면 현실 감각이 이상해질 만도 하지. 그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자.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람을 백조로 변하게 하는 저주도 있는 판에 지네가 대수냐.
“아, 안녕, 하세요…….”
“수사관님, 오셨습니까? 더우신데 고생 많으십니다.”
“아, 뇨…….”
이런 건 경험담을 들어야 한다면서 지네 생김새를 묘사하려 드는 백성찬을 피해 구급차 뒤쪽에 앉아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더듬거리는 작은 목소리.
구급차 너머로 슬쩍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임상규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수사관님 오셨으니까 이제 슬슬 시작할 수 있겠군요.”
“네에…….”
사람 불러놓고 왜 대기만 시켜놓고 있나 했는데 특별수사관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네잡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휴대폰이나 보고 있었는데……. 사실 이런 전문적인 작업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다. 단청에서는 자료집을 왜 종이로 줘서는. 파일로 줬으면 휴대폰에 넣어 다녔을 텐데.
싫지만 백성찬을 불러서 들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다.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일은 오늘을 따라온 다른 수사과 사람들이 하고 있었다.
“오늘 씨.”
“히, 히익, 해, 해, 해준, 씨?”
깜짝 놀라는 오늘을 향해 씩 웃어 줬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 지, 지네, 부… 르는 데에, 피, 필요한, 물건을, 제, 공, 하려고요…….”
“아까 그 커다란 상자요?”
“네, 네에…….”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뭐가 들었어요?”
“그, 지네, 한테, 바, 칠…… 제, 물, 이요…….”
뭔가 무서운 단어가 나왔다.
“워, 원래, 지네, 는… 인간, 을, 먹는, 스, 습성이, 있… 는데, 그, 그래서…….”
“인간 형상을 한 인형을 뒀다고요?”
“네, 네…….”
짚으로 만든 거대한 인형 같은 걸까. 원래 누구한테 저주할 때 그런 인형 많이 쓰던데.
그때 마침 수사과 사람들이 상자를 개봉하고 있었다.
“……마네킹이네요.”
“벼, 별도의, 주, 주술, 절, 차를, 거쳤으니, 거, 거, 걱정하지, 마세요…….”
여긴 현실이었지. 그래. 완전히 드라마 속도 아니고, 나름대로 현실이니까 괜히 인간 모양으로 짚 인형을 만들 바엔 처음부터 인간 모양으로 만들어진 마네킹을 사용하는 게 낫지.
내 마음속의 동심 하나가 부서진 기분이 들어 알 수 없는 심란함에 휘말렸다. 원래 짚 인형이 나올 타이밍 아닌가? 괜히 머리만 긁적였다.
“아……!”
“네?”
“그, 무, 묵, 주는…….”
오늘이 손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이 준 이후로 매일 하고 다녔던 묵주였고, 당연히 오늘을 만났을 때도 항상 하고 있었다. 오늘은 비어있는 손목을 바로 알아차렸다.
머리를 마저 긁적였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김유신이 능력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줬지만 이산래에게 찝찝한 소리를 들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뭣 모르고 쓰다가 망하는 공포영화는 많이 봤다. 적어도 이산래에게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듣기 전까지는 하고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때 이 팀장님한테 안 하고 다니는 게 좋을 거라는 소릴 들었거든요.”
“티, 팀장, 님이요……?”
“네. 이유는 못 들어서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려고 했는데……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어요?”
“으음…….”
오늘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에 빠졌다.
“아마…….”
“네?”
“시, 신라, 인들은… 좀, 제, 제정신이, 아니라서……. 무, 무엇이든, 자기, 기준으로, 새, 생각하, 는, 경향, 이… 있어, 요…….”
무슨 의미인지 와 닿지 않아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오늘이 좀 더 자세히 말했다.
“그, 그때, 해준 씨, 에게…… 도, 도움이, 된, 다고, 했, 잖아, 요?”
“네.”
“그게, 그, 해, 해준, 씨 기준이… 아니, 라…… 자, 장군님, 기준, 일,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