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25. 공공의 적(3)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이가 있었다.
“킁.”
작매는 작게 훌쩍이며 코를 훔쳤다.
“아무리 봐도 집에 가야 할 느낌이었는데…….”
“우리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죠, 작매 씨.”
“변명이 아니라…….”
그래 봤자 변명은 변명이었다. 작매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백조가 까치를 비웃었다.
박서원이 작매가 날아간 창문을 보며 황당해했던 불과 삼십 분 전. 박서원은 일 얘기는 시작도 안 했다며 혀를 끌끌 차며 어디론가 전화했다.
그로부터 삼십 분 뒤, 허둥거리며 까치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엎어질 듯 굴러 들어왔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인간으로 둔갑한 작매는 손수 창문도 닫고 거실로 걸어왔다. 아까 먹다 만 사과도 정리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음료수 병도 주워서 바르게 세워 놨다.
그리고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이제 일 얘기 할 준비가 되었어요?”
“네, 박서원 님.”
작매는 다소곳하게 말했다. 다리를 꼬고 작매를 내려다보는 박서원은 재수 없게 웃었다. 작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이었지만 아까 홀라당 날아가 버렸던 죄로 입을 다물었다.
박서원은 즐거운 얼굴로 작매의 속을 긁었다.
“작매 씨가 성격이 많이 급한 건 알지만 우리 그래도 프로답게 해야죠. 네?”
“끄으윽…….”
“대답해야죠.”
“끄윽, 네…….”
작매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새가 그러면 안 돼요. 작매 씨는 사회생활을 안 해 봐서 모를 테지만…….”
아니, 그럼 본인은 사회생활을 얼마나 해 봤다고……. 아슬아슬하게 고등학교 졸업 전에 각성했으니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을 해 보지 않은 건 저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박서원을 봤는데 여전히 재수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냥 작매를 긁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거구만.
물론 작매는 손쉽게 박서원의 속셈에 넘어갔다.
“작매 씨가 비록 새인 건 알지만 그래도 지킬 예의는…….”
“너 지금 내가 새대가리라고 무시하냐?!”
“작매 씨가 새니까 틀린 말은 아니죠?”
박서원은 정말 재수 없게 웃었다. 저것도 재능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새대가리 취급을 받고 싶지 않으면 이제 진짜 일 얘기
하죠?”
“큽, 네…….”
작매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으, 뱀들이 전부 꼭꼭 숨어 버리기는 했는데…….”
아까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박서원이 보이는 대로 죽여 버려서 몸을 숨겼다는 뱀들.
10년 전의 사건도 있었고,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뱀은 썩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쐐기를 박은 건 10년 전 사건이 맞긴 하지만.
보아하니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물들과도 사이가 나쁜 듯하고.
“그래도 몇 마리 찾은 게 있는데 너무 어려. 끽해야 30살 정도 되었을까.”
“도대체 이 땅에 뱀이 얼마나 많은 건가요? 그렇게 잡았는데도 아직 새끼가 발견되네요.”
“시끌벅적했을 때 죄다 땅속에 틀어박혀서 새끼만 쳤나 보지, 뭐.”
작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박서원은 거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물었다.
“그래서 지하는요?”
“으으응, 이 몸은 가기 싫고, 내 사촌 동생이 내려가기로 했어. 그렇지만 아무래도 지하라서 까치만 내려가는 건 너무 위험하단 말이지.”
작매는 쭉 뻗은 다리를 통통 굴렀다.
“원래 이 얘기 하려고 왔던 건데……. 내 사촌 동생이랑 지하국 안 갈래?”
작매의 두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개봉하는 정해영의 눈이 딱 저랬다. 내 선물을 개봉하던 정해영의 눈.
“지하국? 난 거기 잘못 내려가면 못 올라와요. 알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 까치한테는 너무 위험한 곳이라……. 원래 우린 길잡이 역할이지 정찰병 역할까진 하지 않는다고?”
지하국이라.
아무리 영물과 귀신이 돌아다니는 세상이라고 해도 너무 막나가는 건 아닌지? 이런 세상이 어떻게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거야 알고 있긴 하지만.”
“복수도 좋고 다 좋은데 그러다 가족이 더 죽는다면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건 이해해요.”
작매와 박서원의 대화를 들으며 내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드라마와 이쪽 세계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한다고 해도 드라마에서 이곳의 이야기를 다룬 건 사실이다. 드라마적으로 생각하는 건 사고에 꽤 도움이 된다.
드라마적으로 생각해 볼까? 박서원은 난색을 표하지만 결국 뱀의 행방을 쫓아 까치를 따라 지하에 내려가게 될 것이다. 박서원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메인 악당이니 무사히 돌아오겠지. 이게 마지막 스테이지도 아니니까 오히려 악당의 레벨업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악당 패거리 중 하나인 나도 따라가게 될 확률이 높…… 지.
“일단 그건 고민을 더 해 보죠. 지하국과 관련해서는 확실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니까.”
“치사하기는.”
“뭐가 치사해요? 정 힘들면 작매 씨 사촌보고도 내려가는 걸 미루라고 해요. 구 회장님한테 말하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왜 그 이름이 거기서 나와?
“구 회장님이요?”
“그 사람 꽤 발이 넓거든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영물 쪽으로도 아는 사람이 많아요.”
이쪽 세계에서 대기업 회장… 아니, 부회장 정도 되면 인간만 상대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군. 기업 운영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박서원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재물이 많은 건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영물 사회에서도 통하거든요.”
……현대 사회에서 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만 그래도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긴 하겠지.
“정부지원금은 최저임금도 안 되니까요.”
“……영물들도 생활하기 퍽 힘들겠어요.”
기본적으로 영물의 존재는 숨겨져 있다. 정확히는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영물의 존재다.
정부에서 신분을 보장받은 영물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멀쩡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영물이 인간 모습으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겠지. 영물이 인간으로 둔갑한다는 건, 그만큼 영력이 높은 요괴도 인간으로 둔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니까. 신선비만 보아도 인간으로 변해 사람을 홀렸다.
독립군 호랑이 정도 되면 모를까. 그쪽은 교과서에 실려 있는 몸이다.
“아, 일이 다 꼬여 버리네.”
박서원은 갑자기 짜증을 냈다. 작매가 화들짝 놀랐다.
“왜, 왜? 나 뭔가 잘못했어?”
“작매 씨 말고요. 저놈들이 저 모양이 되는 바람에 손이 부족하잖아요.”
박서원의 시선이 백조들을 향했다.
일전에 임상규도 백 쌍둥이의 빈자리를 아쉬워했었다. 아무리 고등학교 친구라고 해도 박서원마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저 백조들의 능력이 꽤 좋았나 보다.
“저 백조… 분들이 무슨 능력인데요?”
“아, 정해준 씨는 저 녀석들과 일을 해 본 적이 없겠군요. 딱히 대단한 능력은 아니고…….”
“꽥!”
백조들이 항의했다. 물론 박서원은 그런 백조들을 무시했다.
“굳이 말하자면 쓸모 있는 능력이죠.”
“……대단하다는 말 아닙니까?”
“달라요.”
“……대단하지는 않은데 쓸모 있다?”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녀석들은 자기들만 있으면 정말 별 볼 일 없거든요.”
* * *
초능력은 종류가 많다. 70억 인간이 있고 70억 인간 수만큼 생각이 있다면 70억 인간만큼의 초능력도 존재한다.
물론 전 인류가 초능력자가 아니니 그보다는 적겠지. 하지만 굳이 소수점까지 들먹이며 초능력을 구분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능력의 차이가 있는데.
“쉽게 얘기하면 맥가이버 칼?”
박서원은 과자를 백조에게 던졌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뛰어가서 과자를 받아먹는 모습이…… 진짜 인간인 걸까? 백조 생활에 너무 잘 적응한 것 같은데.
“어느 능력자와 붙여 놔도 편리하고 쓸모가 많죠. 이건 직접 겪어 봐야 아는데. 전달, 증폭, 공명…… 조건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범위가 달라져요. 뭐, 저래서야 지금은 쓸모도 없지만요.”
백조들은 모르는 척 뒤뚱뒤뚱 걸었다. 능력은 모르겠지만 새로 지내는 생활에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모습이다. 의외로 자기 의사 표현도 잘 한다.
“악, 새대가리들! 자꾸 그러면 벌 내릴 거야!”
최소한 까치 괴롭히기는 잘하고 있다.
거실에 모여 있는 인원을 다시 확인했다. 인간 둘, 백조 둘, 까치 하나. 장소를 제공해 준 사람까지 합하면 인간은 셋.
“그놈요.”
“네?”
“……잡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네요.”
“음, 뭐.”
“저놈이 쫓기 전부터 잡아먹은 게 워낙 많아야죠.”
작매가 박서원을 흘깃 보았다.
“여우 놈이 그 자식한테 아내를 잡아 먹혔던 게 40년 전이던가? 내 동생도 그렇고, 사슴에, 토끼와 매, 호랑이까지. 아주 고루고루 드셨지. 근데 그 전에도 사이 나쁜 이들이 많았어요.”
작매는 이어 말했다.
“……그렇게 잡아먹어서 어디다 씁니까?”
“그놈은 나이가 많고, 아주 옛날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이야기해 본 사람이 별로 없어요. 우리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옛날에도 심보가 아주 고약해서 다들 싫어했다나 뭐라나.”
영물의 감각으로 옛날은 몇 년일까.
“몇 살인데요?”
“할아버지가 봤던 게 오백 년 전이랬으니까 최소 오백 살?”
“……실례지만 작매 씨 올해 연세가?”
“음, 하나하나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임금님이 영조라고 들었었는데…….”
역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영조 시대라면 대충 삼백 살 정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백 살 정도 살았던 한진열과 이백 살 언저리라는 혜사가 비슷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근데 그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영물은 나이와 외관이 동물마다 다를 수 있다는 말이겠지.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 게 맞았다.
“여하튼, 그놈과는 제대로 이야기한 자가 없다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짐작 가는 건 있죠.”
“작매 씨, 진짜 정해준 씨 좋아하는가 봐요? 나한테도 좀 그래 보지 그래요?”
“헹,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않겠냐.”
작매는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마음씨가 고우니 원한다면 해 줄 수 있지. 서원 님, 이렇게 해 드리면 될까요오옹?”
박서원은 곧바로 질색했다.
“해 달라고 안 했거든요.”
“해 줘도 지랄이야.”
작매는 코웃음을 쳤다.
자꾸 이야기가 튄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몇 명 안 되는데. 뭐가 문제지? 박서원? 까치?
“그래서 목적이 뭐라고요?”
내가 보기엔 다 문제다. 저주받아서 백조가 된 쌍둥이나 복수에 미친놈이나 까치가 구성원이다. 처참하지 않은가. 물론 나는 빼고. 나는 불우한 피해자지.
“음…….”
작매는 눈을 또르륵 굴렸다. 설마 여기서도 결과만 말하고 과정과 이유를 말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제발 입이라고 뚫려 있으면 끝까지 말을 해라!
역시 다음번에 이산래를 만나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묵주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복숭아 때문에 조만간 만나긴 하니까 그때…….
“확신하는 건 아닌데, 아마…….”
무슨 거창한 이야기가 나오려는 건지 작매는 자꾸 뜸을 들였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폼이 여간 심각한 이야기가 아닌가 보다.
“……용, 이 되려고 그런 짓을 한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잠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가 된다고?
“그러셨는데…….”
사람 수백 명을 잡아먹고서는, 그게 지금 뭐가 되려고 한 짓거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