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25. 공공의 적(2)
“이야기만 들었을 땐 설마설마 했는데!”
여덟아홉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정수리에는 배씨댕기를, 다홍색 치마와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다.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은 하나로 잘 땋아 치마와 같은 색의 댕기로 묶었다.
아이는 백조 두 마리 앞에서 두 손으로 볼을 감싸며 즐거워했다.
“세상에, 너어무 완벽한 백조네!”
즐거워했다.
“그러게 그 주둥아리를 얌전히 놀리라 하지 않았나! 결국 일을 치를 줄 알았지!”
정말 즐거워했다.
“꼴좋다! 이 천벌 받을 것들아!”
웃음을 주체 못 하고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입을 가리며 푸풉 웃기 시작했고 백조 두 마리는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날갯짓을 했다.
“으하하, 날 새대가리라 그렇게 놀리더니 새대가리가 된 기분이 어떻느냐!”
아이는 아예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도 먼 이국의 땅에서 괜히 잘난 체하다가 걸렸다지! 으헤헤헤!”
겉보기는 초등학교 1학년처럼 어리지만 말투는 묘하게 할아버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한진열이나 혜사도 나이는 세 자리지만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려 보인다고 그 속까지 어릴 이유는 없다.
까치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열정적으로 웃었다. 깔깔 웃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한이 느껴질 정도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박서원도 팔짱을 낀 채 구석에 서서 숨넘어가게 웃는 까치를 구경했다.
“으헤헤, 으헤헤헤, 푸하하, 학, 켁, 컥, 콜록콜록!”
그리고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이던 까치와 눈이 마주쳤다.
“켁, 케엑! 소, 손님이 계시면 말을 해야지!”
“너무 즐거워하길래.”
박서원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까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미, 미친 사람아!”
바닥을 뒹구느라 부스스해진 머리를 정리하고 치마를 탁탁 털었다. 그래 봤자 헝클어진 머리가 깔끔해지진 않았지만 그걸 모르는지 까치는 새침한 얼굴이 되어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작익의 4대손 작매가 고인께 인사드리옵니다.”
흐트러진 머리가 아니었다면 방금 전 그렇게 방정맞게 웃은 아이인 줄 몰랐을 것이다.
“흐엉…….”
실제 나이야 어쨌든 외관은 어린아이였다. 어린애가 울상 짓는 것도 보기 안 좋아서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영물을 놀려 봤자 좋은 꼴을 못 보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원래 까치는 성질머리 더럽기로 유명한 새다.
“정해준이라고 합니다.”
풀 죽어 있던 작매의 머리 위로 느낌표 하나가 반짝였다. 얼굴이 환해진 작매는 환하게 웃었다.
“좋으신 분이네! 이따 이 작매가 점이라도 봐 드릴까요?”
“허, 작매 씨. 사람 너무 차별하는 거 아냐? 정해준 씨와는 처음 봤잖아요?”
“그거야 네놈은 성격이 더럽잖아. 그런데 여길 봐라. 우리 해준 씨는 내가 어려 보여도 처음부터 말도 높여 주고 허리도 숙여서 인사해 줬다고. 딱 보이잖아! 성품이!”
어린애 얼굴로 그런 말을 해 줘 봤자 기분만 요상해진다. 박서원은 미묘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식거렸다.
“작매 씨 정도면 내가 엄청 착하게 대해 주는 건데.”
“으음, 뭐…….”
작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헤실헤실 웃었다.
“우리 그냥 일 얘기나 할까?”
“끽끽끽!”
백조가 높은 소리로 울었다. 백조의 생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저 백조들이 원래 인간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저건 분명 비웃음이겠지.
* * *
까치는 길조다.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있고 이른 아침에 보면 운이 좋다는 말이 있다.
원래 세계에서야 그냥 속담이고 미신이지만 여기서는 까치가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곳.
그런 세상에서 까치가 가져온 소식은 무엇일까?
“좋은 소식? 그런 거 없는데.”
까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놈이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아무 소식도 안 들린다니까? 음, 하늘로 솟진 않았겠다. 그럼 땅으로 꺼졌으려나?”
“그럼 다른 뱀은?”
“다들 너 무서워서 땅굴 파고 꺼졌더라.”
작매는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냉장고를 뒤져 과일을 꺼냈다. 사과 한 알을 통째로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서 구석구석 더 돌아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소식이 없어.”
작매는 그간 박서원과 백조들에게 뱀 소식을 물어다 준 소식통이다. 인간 사회를 피해 산속에 있는 영물들에게 뱀 소식을 묻고, 산함박의 흔적을 찾았다.
산함박에 관해서는 소득이 없는 모양이지만 신선비를 잡았을 때처럼 강철이의 행방을 알 만한 뱀들의 신상을 캐서 박서원에게 넘기기도 한다는 모양이다.
“진짜 땅으로 꺼졌나 싶어서 아래도 찾아봐야 하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이 작매는 하늘을 나는 몸이라 거기까지는 무리! 깔끔하게 포기이이이.”
당당하게 얘기하던 작매는 양옆에 앉아 있던 백조 두 마리가 부리로 머리를 물어 당기자 비명을 질렀다.
“꺅! 그만해, 이 새대가리!”
“새라서 학습 능력이 떨어지나?”
박서원은 한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속에 든 게 무엇이든 간에 애가 자기 몸통만 한 새한테 쪼이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려면 일단 백조들을 멈추는 게 먼저일 것 같아서 손을 뻗었다.
백조를 말리거나 간단하게 보호막을 쳐 줄까, 생각했는데…….
“그만하라니까, 새대가리들아!”
작매가 조막만 한 손으로 백조의 목을 휘어잡았다.
……까치는 성격이 더럽다. 잊지 말자.
“어머머머.”
백조의 목을 쥐고 흔들던 작매는 어정쩡하게 뻗은 내 손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나 지금 도와주려고 하셨던 거예요? 와아, 나 여기서 이런 대접 받는 거 처음이야…….”
작매는 백조의 목을 놓고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백조는 휘청거리며 작매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해준 님, 점 봐 드릴까요? 나 점 잘 보는데.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복채만 짭짤하게 주신다면…….”
“여기서 장사하지 말고, 작매 씨.”
“칫.”
작매는 혀를 차며 다시 사과를 손에 쥐었다. 아삭아삭 사과를 베어 먹는 소리가 들렸다.
사과를 꼴깍 삼킨 작매는 낯빛을 바꾸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농담 아니구, 산함박, 그놈 말야, 진짜 안 보여. 여태 나 혼자 했었지만 지금은 사돈의 팔촌까지 다 뛰어들었다고? 그런데도 안 보이는 건 문제가 있어.”
뒤에서 구시렁거리던 백조들도 작매의 말에 조용해졌다. 박서원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쳤다.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 게 6년 정도 되었는데…… 한반도가 그리 넓은 땅도 아니고 본 사람이 없다는 건 너무 이상한데.”
“지금 이 땅에는 비어 있는 산이 너무 많은 탓도 있어.”
“여우 쪽도 발견되는 건 없다고 하고…….”
생각보다 지원해 주는 이들이 많다. 단청에서 후원하고 박서원과 백조 쌍둥이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까치에 여우까지.
그러고 보니 신선비를 잡을 때도 박서원이 여우를 들먹이긴 했다. 뱀과 사이 나쁜 여우. 여우에게 넘긴다고 하자 신선비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다.
……그때 보았던 걸 떠올리자 속이 좀 안 좋아졌다. 본 모습이야 어쨌든 신선비가 마지막에 하고 있었던 얼굴은 평범한 등산객이었으니까.
“바다…… 로 갔을 리는 없고.”
박서원이 작게 중얼거렸다.
10년 전 서울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강철이는 그 이후로 모습이 발견되지 않았다.
박서원이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작매도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흥, 옛날처럼 산신들이 멀쩡했으면 좀 더 나았을 텐데.”
“하다못해 토끼들이 꼈으면 좀 더 이야기가 쉬웠을지도요.”
작매는 기겁하며 박서원을 보았다.
“내가 이러니까 네놈이 안 된다고 하는 거다! 아무리 영물이라 해도 기본 바탕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토끼들을 다 죽이려고?”
“…….”
박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복수에 눈이 먼 놈 같으니라고! 내가 어쩌다 이런 놈이랑 엮여서는…….”
박서원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복수 때문에 발 걸친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끄으응…….”
역시 이쪽 까치도 사연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우 쪽도 똑같겠지. 그쪽은 좀 더 살벌한 분위기인 것 같지만.
곰에 호랑이, 이제 까치까지 나왔다. 여태 패턴을 보건대 여우라면 그 여우겠지. 이런 이야기에 빠지면 아쉬운, 꼬리가 여러 개인 그거.
“그때 여우 놈 말 듣는 게 아니었는데.”
작매는 잔뜩 투덜거리더니 전투적으로 사과와 테이블 위에 있는 쿠키를 먹었다. 먹다가 목이 막혔는지 냉장고로 쪼르르 가서 음료수도 마셨다. 한두 번 집을 털어 본 솜씨가 아니다.
“함께하는 사람이 꽤 많네요.”
“네?”
“몇 명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복닥복닥 하다고요.”
내 말에 박서원은 픽 웃었다.
“말했잖아요. 난 지난 10년 동안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래. 이것도 노력이라면 박서원은 충분히 노력파라고 할 수 있다.
그 노력이 삐끗해서 서울을 날려 버릴 가능성이 높아서 그렇지.
“작매 씨는 남동생이 그렇게 됐어요.”
“네?”
복수 때문에 끼어들었다고 했으니 가족 중 누군가는 죽었을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걸 이렇게 말해 줘도 되는 건가? 까치가 이 자리에 없는 것도 아니고, 집이 워낙 넓어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충분히 시야 안에 서 있는데.
괜찮아? 개인사 아냐? 속사정을 알려 주는 건 좋은데 그것도 장소가 있잖아? 아직 그 정도는 지켜야 하는 선이라 생각하는데?
“10년 전은 아니고, 그보다 좀 더 된 일이에요. 작매 씨한테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를 데리고 봄나들이를 나갔다가 그만…….”
“무슨 헛소리야, 이게 진짜!”
작매는 멀리서 손에 쥐고 있던 음료수 병을 던졌다. 거리가 멀고 어린아이의 손으로 던졌는데도 병은 험악한 기세로 날아왔다.
박서원은 손을 휘저었다. 힘차게 날아오던 음료수 병이 박서원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빙글빙글 천천히 돌던 음료수는 박서원의 손안에서 멈췄다. 박서원은 즐거운 얼굴로 뚜껑을 따서 음료수를 마셨다.
“큭, 저 개 같은 능력…… 진짜 얄미워!”
작매는 발을 쾅쾅 굴리며 걸어왔다. 그래 봤자 어린아이의 걸음걸이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어서 사뿐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 앵도가 죽은 것 같잖아!”
작매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놈한테 잡혀서 날개를 다치긴 했지만 죽진 않았어!”
“나도 죽었다고는 안 했는데요.”
“죽은 것처럼 얘기하잖아!”
작매는 박서원의 종아리를 걷어찼지만 별로 타격은 주지 못했다. 작매는 속만 타는지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내 치사하고 더러워서라도 너와의 인연을 빨리 끊고 만다! 분명 어떻게 나이를 먹을수록 속이 더 꼬이냐!”
“인간은 다 그런 존재라니까요. 새삼스레.”
“옛날 이 땅에 살던 인간은 안 그랬다고! 다 순박허니 좋은 이들이었는데.”
작매는 혀를 쯧쯧 찼다.
“네 조모와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천벌 내렸을 거다.”
“거기서 우리 할머니는 왜 나와?”
박서원은 얼굴에 맴돌던 웃음기를 싹 지웠다.
“작매 씨, 우린 복수 때문에 모인 거예요. 거기에 다른 건 넣지 말자고.”
작매는 코웃음 쳤다.
“나도 내 남동생을 잡아먹으려던 그놈을 죽이고 싶어서 온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네게 천벌을 내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둘 다 사납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괜히 내게 불똥이 튈까 봐 슬쩍 뒤로 물러났다. 백조 두 마리도 나와 비슷하게 움직였다.
“그 뱀 놈을 잡을 때까지만 놔두겠다.”
“작매 씨는 참 포부가 커요. 뒷감당할 수 있어요?”
“네 몸에서 썩은 내가 폴폴 나는 건 알고 있지? 그렇게 죽이고 다녔으니 업보가 산더미같이 쌓였지. 그걸 아주 살짝만 건들면 네 남은 팔자는 존재하지도 않게 될 거다. 지금도 한 곳에 못 머무르잖아?”
작매는 제법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박서원은 평소처럼 입꼬리를 비식 말아 올리며 말했다.
“내 팔자는 10년 전부터 꼬였거든요. 작매 씨, 그러니까 난 빨리 그놈을 잡아야 해. 알겠어요?”
산뜻한 목소리지만 이쪽도 무섭게 들렸다. 백조 두 마리가 꽥꽥거리며 박서원 근처에서 폴짝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의미 전달은 되지 않았다.
작매는 지긋이 박서원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쩌다가 이렇게 엮여서는……. 후, 됐다, 됐어. 요 쌍둥이가 백조가 됐다길래 구경 좀 할랬더니.”
작매는 입술을 쭉 내밀고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다가 창가로 향했다.
“해준 씨, 그럼 다음에 봐요. 여기 있는 인간 중에선 해준 씨가 젤 괜찮은 것 같네.”
베란다 문을 열고 난간 위로 위태롭게 올라간 작매는 눈 깜짝할 사이에 까치로 변해 날아갔다.
등장만큼이나 순식간에 일어난 퇴장이다.
박서원은 작매가 날아간 창문을 보다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는데 왜 혼자 집에 가는 거야?”
어이없을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