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25. 공공의 적(1)
햇볕이 따뜻하다. 그다지 덥지도 않은 날씨다. 이런 날은 낮잠이라도 자며 게으름을 피워야 한다.
“…….”
페트병을 자르고, 송곳으로 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집 근처 천원샵에서 산 흙을 채웠다. 한평화가 준 화분에서 꺼낸 손톱만 한 새싹을 옮겨 심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작고 푸른 잎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만나기 싫은데 받은 게 있으니 미룰 수 없다. 어차피 이미 한배를 탔으니 친해져 두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 ‘몸’과는 충분히 인연이 있어 보이니까.
여의주나 뱀, 앞으로의 계획……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너무 슬펐다.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입력했다.
[평화 씨가 전해 주라고 한 물건이 있는데, 어떻게 줄까요?]
* * *
“…….”
페트병으로 만든 화분을 들고 서울에서도 제일 집값 비싸다는 동네의, 그곳에서도 가장 비싸다는 아파트의 제일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여태 박서원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는 단청의 회장실을 이용했다. 이번에도 단청으로 찾아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파트 주소를 받을 줄은 몰랐다.
“왔어요?”
박서원은 태평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제일 위층, 그러니까 펜트하우스는 온갖 화려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한강뷰가 보이는 아파트보다 훨씬 사람 사는 흔적이 가득하다. 심지어 거실 테이블에는 과일과 다과까지 있지 않은가.
“꽥!”
……백조 두 마리와 함께. 소파에 앉아 부리로 과자를 콕콕 주워 먹는 백조라. 백조가 과자를 먹어도 되는 건가? 하긴, 원래는 인간이었지.
능숙하게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는 백조를 애써 무시하며 박서원에게 물었다.
“이사한 겁니까?”
분명 겨울만 해도 박서원은 한강 근처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사람 사는 흔적이 거의 없던 그 아파트와는 달리 여긴 생활 흔적이 가득하다.
“원래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바꿔 주고 있거든요.”
박서원은 백조를 발로 밀며 소파에 앉았다.
“여긴 구 회장님 집이에요. 잠깐 신세 지고 있죠.”
구 회장? 아, 구민석.
결국 이 멤버가 모이면 그 이름이 빠지질 않군.
그 말을 듣고 집을 둘러봤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가구들과 벽을 장식한 그림, 곳곳에 놓인 꽃까지.
납득했다.
“그래서 사람 사는 냄새가 좀 나는 거군요.”
“……욕먹은 기분이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니 넘어가죠.”
박서원은 내가 종이가방에 넣어 온 화분을 건네받았다.
“초등학교 방학 숙제같이 저렴한 맛이 있네요.”
푸른 잎이 삐죽 튀어나온 세 개의 서천꽃 새싹을 본 박서원은 코웃음을 쳤다.
“이거 엄청 귀한 거 알죠?”
그 귀한 꽃도 우리 집에서는 한평화가 준 플라스틱 화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굳이 옮길 필요가 있나? 안 그래도 잘 자란다는데.
“금으로 된 화분은 안 팔더라고요.”
“못 보던 사이에 입담이 늘었네요.”
백조 두 마리가 마치 낄낄거리며 웃는 것처럼 울었다. 지난번 떠올렸던 기억이 생각났다. 저쪽도 가족을 잃었다. 전부 엉망이네.
연이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나도 소파에 앉았다. 백조 두 마리와 박서원 옆에는 앉고 싶지 않아서 그 옆의 일인용에 앉았다.
“저 백조 두 분은 계속 박서원 씨가 돌보고 있는 겁니까?”
“하연이도 저 빌어먹을 놈들에게서 자유 시간을 얻어야 하지 않겠어요? 고3인데 언제까지 저놈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해요.”
그렇다. 고3. 대한민국에서 그 신분은 대체로 모든 양보를 받게 해 주었다. 그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연이는 초능력자도 아니니까 대학 좋은 데 가야죠. 공부도 잘하는 애인데.”
박서원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박서원에게도 여동생이 있었다. 아니, 이곳에 앉아 있는 두 인간과 두 백조에게는 모두 여동생이 있다. 백하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기 여동생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쐐기풀로 옷 만들다 보면 공부할 시간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놈들이 죽일 놈이죠.”
박서원은 백조의 발 아래에서 죽어 가고 있는 리모컨을 초능력으로 뺏어왔다. TV 속에서 요란하게 웃고 있던 연예인들이 암전되며 조용해졌다.
백조들은 억울한 듯 날개를 퍼덕였지만 박서원의 차가운 눈길에 얌전해졌다. 대신 작게 꽥꽥거리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만.
“…….”
“왜요?”
“아니…….”
속에 있는 질문들을 하나씩 추렸다. 정해영이 찬양했던 건 대부분 ‘내 새끼’에 대한 외모뿐이라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걔는 날 괴롭히려고 내 방에 와서 떠들어 댔고, 나는 그걸 방어하기 위해 헤드폰을 꼈다. 그래도 정해영은 잔뜩 떠들고 갔지만…… 진짜 미친년이라니까.
일단 같은 배를 탄 이상 대답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씩 확인하자.
“……부회장님은 어떻게 돕게 된 겁니까?”
집까지 내주며 박서원을 돕는 걸 보면 이쪽도 속셈은 따로 있다. 드라마 메인 스토리가 초능력자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니 대기업 총수라 할 수 있는 구민석은 적 포지션으로 잡기 딱 좋다.
우리 엄마와 정해영 취향은 정말 모르겠다니까. 좀 착하고 정의로운 애들만 좋아하면 덧나나? ……엄마는 손요운도 좋아했었긴 하지만.
“보아하니 깊숙한 사정까지도 아시던 모양인데.”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이 모임은 10년 전 강철이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만들지 않았던가. 구민석은 양친이 모두 살아 있다. 부친이 간암으로 병원에 있은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건 맞다. 모친도 건강하고, 애초에 형제는 없다. 다른 죽은 친척들도 없고.
“그쪽도 가족을 놈한테 잃었거든요.”
내가 모르는 재벌의 뒷이야기가 있는 걸까?
“알잖아요? 여긴 가족 없는 놈들만 모여 있는 거.”
“부회장님 가족은 살아 계시는 걸로 압니다만.”
“숨겨진 비밀 이야기가 있거든요. 정확히는 아내가 죽었어요.”
“결혼 안 했다고 뜨던데…….”
“정식으로 식을 올린 건 아니니까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말하는 거 좋아하는 양반이라 쓸데없이 자세히 알려 줄걸요.”
박서원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화분을 보았다. 화분이라 하기에는 심하게 조약하지만 화분은 화분이지.
“평화 씨와는 친한가 봅니다?”
박서원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거요. 남들 잘 안 준다던데.”
“아, 서천꽃요?”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뇌물이죠.”
“뇌물요?”
“아빠 복수 잘 좀 부탁한다는.”
역시 그랬군.
“걔도 좀 독한 면이 있어서 그래요. 한평원은 안 그런데 평화는 아주…….”
박서원은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할 말은 아니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
“…….”
“왜요? 더 물을 건 없어요?”
박서원은 썩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눈치가 빠르다. 내가 자길 모르는 척하는 것 같자 거기에 말을 맞춰 줄 만큼의 눈치는 있다.
뭔가 자세한 사실을 알아챘을 것 같진 않지만 내가 다른 속내를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수도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으니까.
“어지간한 건 다 대답해 줄게요. 어쨌든 한배 탔잖아요?”
그렇지.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거 아닌가. 답 없는 미래에 얼굴을 쓸었다.
저주를 풀 만한 걸 물어볼까? 아니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여의주를 달라고 할까? 박서원과 함께 장례식장에 앉아 있었던 건 내가 아니잖아.
“뱀, 잡으러 안 갑니까?”
서로 장난치고 있던 백조의 움직임이 멈췄다.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 뱀 잡고 싶었어요? 내가 그동안 많이 잡아서 수가 좀 줄긴 했는데, 걱정 마요. 이젠 알짜배기만 남았거든요.”
박서원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온 김에 말해 주려고 했거든요. 슬슬 단청 이름 내걸고 뭐라도 잡을 시기가 왔거든요.”
“잡을 시기요?”
“어쨌든 위험 등급 요괴 잡겠다는 명목으로 후원받는 거니까요.”
실적이 없으면 좀 그렇잖아요?
박서원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제발 등장인물만 아니어라. 아니지, 차라리 등장인물인 게 낫나?
“소개해 줄 사람이요?”
이제 와서 등장인물이고 자시고 큰 의미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인물의 중요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기준도 없다.
드라마의 메인 악역이 소개해 준다는 사람이 어중이떠중이 같지도 않고.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좀 늦네요.”
박서원은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멀뚱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톡, 톡,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박물관의 특별수사과 연구소에서 말에게 시달린 게 겨우 엊그제의 일이다. 뭔가 굴러가는 종류의 소리는 아니지만 무언가 부딪치는 종류의 소리도 싫다.
“마침 왔군요.”
박서원이 소개해 준다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소리가 들려온 쪽이 창가라서 불안했다.
어차피 다가올 미래라면 내 눈으로 확인하는 쪽이 낫다. 긴장한 티를 덜 내려고 과자 하나를 입에 넣은 다음 창가를 바라보았다.
톡. 톡.
팔뚝만 한 새가 난간에 앉아 부리로 창문을 톡톡 쪼고 있었다. 조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있는 저 새는 단번에 알아봤다.
“까치……?”
박서원은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까치는 문이 열리자 신이 났는지 날개를 파닥거리며 집 안을 마구 날아다녔다.
“까악!”
백조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던 까치는 한 번 크게 울고는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까치가 막 내려앉은 바닥에는 새 한 마리 대신 배씨댕기를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있다는 말 알죠?”
박서원은 창을 닫으며 말했다.
“거기서 말하는 까치예요.”
* * *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반년이 조금 못 되었다. 싫든 좋든 적응할 수밖에 없고, 어느 정도 이쪽 문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곰이 사람이 된다거나 산에는 산신령인 호랑이가 있었다거나. 봄 불은 여우불이라는 말이 단순한 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한 것임도 안다. 아사달과 김유신처럼 설화로 남아 있는 이야기들도 현실이 된 곳이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바리데기가 가꾸었다는 서천꽃이 있기도 하다.
그러니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있다’도 단순한 속담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 말이라 해도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게 아무리 사실을 설명한 말이라고 해도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제주도에서 자라던 어린 호랑이들 말고,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산주인은 강원도의 한진열뿐이다. 곰 혜사처럼 정부에 등록을 하고 인간과 어울려 사는 영물들도 있지만 그게 많은 수는 아니다. 오히려 잠실 타워의 청룡이나 광화문 광장의 해태가 더 유명하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비록 사실을 설명한 말이지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어서 일종의 관용구가 되어 버린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가 내 눈앞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건 다른 이야기라는 말이다.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영물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어마마, 정말 백 쌍둥이가 백조가 되어 버렸네!”
여자아이는 박수를 치며 까르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