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74화 (74/202)

# 74

24. 목이 없는 말(7)

말은 금방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빛이 금방 어둠에 묻혔다. 눈에 보여야 할 거리인데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말의 능력이거나, 이곳이 말의 기억 속의 길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 보이지 않고서야 물었다.

“저걸 막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잠깐 멈추기만 하면 되느니라. 본래라면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지금의 나는 온전치 못한 상태구나.]

“……힘들게 오셨나 봅니다, 장군님.”

[급한 일이 있었느니라.]

장군신이니 무슨 사정이 있었겠구나, 해서 더 묻지 않았다. 옆에 있으니 이가 덜덜 떨릴 정도라 묻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저, 정말, 괜, 찮… 아요?”

“네, 괜찮아요. 타이밍 맞추기가 좀 어렵지만…… 실패하면 또 시도하죠, 뭐.”

어차피 몇 시간 동안 저 말은 이곳을 왕복했다. 도중에 방해가 들어와도 목이 베인다면 청년을 태우고 다시 걸어갈 것이다. 목이 베이지 않는다면? 그땐 저 푸른 얼굴의 장군님이 나설 차례지.

특별수사과의 연구소 건물은 그리 큰 크기는 아니지만 끝이 꺾인 L자 모양이다. 주인이 깨지 않도록 속도를 늦출 만큼 영리한 말이 복도 끝을 찍고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괜히 입 안이 말랐다.

장군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야기를 나눌 간은 없었고, 나도 긴장 때문에 여유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능력을 꽤 써왔으니 한 번에 되지 않을까?

다만 걱정되는 건 내 생각과 보호막이 펼쳐지기까지의 오차의 시간이다. 아주 짧은 틈이지만 워낙 젊은 김유신이 검을 뽑는 속도가 빨라야지.

……몇 번 시도해 보면 감이 잡히겠지.

“옵니다.”

멀리서 발굽 소리가 들렸다. 다그닥다그닥. 앞으로 말 탈 일도 없을 거다. 복숭아는 안 먹고, 말도 안 타고. 박물관도 오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청년은 여전히 말 위에서 졸고 있었다. 슬쩍 장군을 보았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보는 데도 장군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장군이 딱히 타이밍을 지도해 주진 않으니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말이 내 눈앞을 지나갔다. 이제 곧이다.

말이 멈추자 꾸벅꾸벅 졸던 청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쪽에서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청년은 비틀거리며 말에서 내렸다. 이제 옆모습이 보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다. 푸른빛이 아니었다면 술과 분노에 취해 벌겋게 물들었을 것이다.

눈썹이 떨리고, 굳게 닫혀 있던 입내가 움직이는 순간.

보호막을 쳤다. 잠깐, 뭔가 느낌이 다른데? 왜 이렇게 보호막이 쉽게 쳐져?

쿠웅!

몇 시간 동안 질리도록 들었던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힘차게 검을 휘둘렀고…….

툭.

너무 마음을 가볍게 먹은 탓인지 실패했다. 보호막은 말 주위를 두르고 있었지만 이미 목이 떨어진 후다.

오늘이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청년은 말의 목이 잘리자 사라졌고, 나는 보호막을 풀었다.

……역시 느낌이 조금 다른데.

평소보다 능력을 펼치는 게 부드럽다. 힘이 솟는 느낌이다. 여태 두 겹의 보호막을 펼칠 때에는 차례로 하나씩 펼쳤는데 이젠 동시에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이게 장군님의 가호 덕분인가? 묵주? 이렇게 바로 티 나는 물건일 줄은 몰랐는데. 꽤 쓸 만하다.

“다시 옵니다.”

말은 정말 주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느리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등에 타고 있는 주인에게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옆에서 환하게 불빛이 쏟아져도, 자길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있어도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그 뒤로 두 번 더 실패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서 한 번, 보호막이 너무 약해서 한 번.

청년은 보호막을 거의 느끼지 못한 것처럼 검으로 말의 머리를 잘랐다.

“몸은 괜찮습니까?”

“네, 뭐, 괜찮습니다. 너무 약했네요. 이 정도면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확실히 감이 잡혔다.

“다음번엔 막을 수 있겠습니다.”

이산래와 오늘이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봤다. 그런데 진짜 괜찮다니까? 솔직히 좀 못 미더웠는데 성능이 꽤 좋은 모양이다. 이젠 묵주인지 장군님의 수호부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그닥다그닥.

다시 멀리서 말이 걸어왔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인을 태우고 걸어가는 말이다. 목이 없는 채로 난동부릴 때나 탕비실에서 덜덜 떨 때는 무섭기만 했는데 이렇게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아마 장군님도 양심이 있으니 이리 찾아온 것이겠지.

[준비하거라.]

장군님이 말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빨리 처리하고 가자. 할 수 있다.

말 등에서 졸던 청년은 말이 걸음을 멈추자 정신을 차렸다. 청년이 말에서 내리고 검을 뽑기까지는 금방이다. 타이밍을 잡는 것보다 사실 크기를 조절하는 게 더 힘들었다. 그래도 할 수 있다.

손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희미하게 빛나는 막이 생겼다.

“……!”

검을 뽑아 말의 머리를 치려던 청년은 자신의 앞에 생긴 보호막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청년의 검이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속이 뒤집어지는 충격과 함께 보호막이 깨졌지만 말의 머리는 무사했다. 청년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장군이 움직였다.

[그만하거라.]

중후한 목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뒤에 서 있던 오늘과 이산래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괘, 괜찮아, 요?”

“…생각보다 충격이 덜하네요.”

없는 건 아니지만 각오했던 것보단 약하다.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확실히 다르다. 힘을 끌어 올리는 것도 그렇지만 깨졌을 때의 충격도 덜하다. 장군님의 힘이 생각보다 도움이 더 되는데.

[네가 허구한 날 그렇게 다니니 이 아이가 기억한 것 아니더냐.]

장군은 과거의 자신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건 잘하였다. 하지만 네 잘못은 이 불쌍한 아이에게 미루면 안 될 말이로다. 이것은 네 허물이요, 네 과오이다. 너는 이 아이에게 사과하여야 하느니라.]

그래 봤자 본인한테 하는 소리지만.

청년은 눈을 끔뻑이다가 사라졌다. 푸른 빛무리가 장군에게 스며들었다. 푸른빛이 스며들었는데도 오히려 장군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장군은 말을 돌아보았다.

[미안하구나. 네가 이토록 오래 괴로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설사 알았더라도 너를 그리 대하면 안 되었는데.]

장군의 손이 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은 기분이 좋은지 작게 콧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자, 이제 벗어나거라. 내 잘못은 거두어들였다. 너는 나를 원망할 자격이 있으니, 나는 네 원망을 받아들이마.]

머리가 푸른 말은 푸르릉거리며 장군의 주위를 맴돌았다.

[어허, 가래도.]

장군이 말을 떠밀어도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장군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제 등에 올라타기 쉽도록.

장군은 짧게 웃었다.

[허 참, 그래도 나를 태우고 싶더냐?]

장군은 천천히 말의 등에 올랐다. 낮에 머리 없이 발버둥 치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장군은 말의 턱을 긁어 주며 우리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 아이는 배회하지 않을 것이니라.]

양심이 있으면 그래야지요.

[너는 그 팔찌를 요긴하게 쓰도록 하여라.]

팔찌가 아니라 묵주지만 장군의 시대에는 이 땅에 천주교가 없었을 테니 이해하자.

[인연이 닿는다면 또 보겠지.]

말이 걷기 시작했다.

느긋한 걸음은 금세 빨라졌고, 곧이어 달음박질이 되었다.

[히히잉!]

머리가 푸른 말은 힘차게 울었다.

* * *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창문 밖으로 보이던 검은 안개가 걷히고, 계단을 통해 수사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보자 온갖 부적과 굿을 위해 상을 차린 흔적이 보였다.

“좀 피곤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해준 씨. 갑작스럽게 일에 휘말려서…….”

이산래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뇨, 뭐… 모른 척할 수는 없잖습니까.”

“감사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해준 씨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복숭아 건이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오늘은 피곤할 테니 들어가서 푹 쉬시고요. 이게 좀 정리가 되면……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산래는 안경을 벗고 눈가를 꾹꾹 눌렀다. 보고서가 어쩌고저쩌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그새 날짜가 바뀌었으니 저 사람은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이다. 아니, 여기 있는 수사관들이 전부 철야 근무하고 있는 거소가 다름없다.

“네,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시지요. 저야 비상근무 없으면 노는 몸이니까요.”

내 말에 이산래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해준 씨.”

“네?”

“그 묵주요, 빼고 다니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무슨…….”

이산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다. 이산래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는데, 그 전에 날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 해, 해준, 씨.”

오늘이 조그맣게 내 이름을 불렀다.

“해준, 씨.”

잠깐 갈등하다가 오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쪽도 고생이 많다. 하필 오늘 날 불러 이 소동에 휘말린 주범 격이지만……. 이걸로 오늘을 의심하는 건 너무 나간 일이고,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이산래도 날 도와주기로 했지 않은가. 이산래가 의미 모를 말을 해서 찝찝해졌지만 장군님의 수호부도 있고. 나쁘지는 않다.

“이, 이거요…….”

오늘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얼결에 받고 보니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들이었다.

“아, 아까, 안색이, 너, 너무… 안, 좋아서, 그, 그으…….”

오늘은 우물쭈물 이야기했다.

“힘, 힘내시라고, 그…….”

“……이거 먹고 힘내라고요?”

“그, 네, 네에…….”

오늘은 고개를 푹 숙였다.

“괘, 괜한 일에, 마, 말려들, 게 해서… 죄, 죄송, 해요…….”

“그건 오늘 씨 잘못이 아닌걸요. 오히려 제가 없었으면 낮에 큰일이 났지 않을까요?”

“그으…….”

오늘이 울상을 지었다. 괜한 말을 한 모양이다.

“그, 그으, 어, 어쨌든…….”

오늘은 허둥거리며 주머니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뒤질 때마다 나온 초콜릿이나 사탕 따위를 이미 초콜릿이 가득한 내 손 위에 하나씩 더했다.

“마, 많이, 드, 드, 드세요…….”

도대체 이 많은 걸 저 주머니에 어떻게 넣었는지.

나는 피식 웃으며 오늘에게 말했다.

“오늘 씨도 손 좀 줘 보세요.”

“네, 네?”

얼떨결에 내민 손 위에 받은 초콜릿과 사탕을 나누어 올려놓았다.

“이만큼은 오늘 씨가 먹고요, 나머지는 내가 먹을게요. 오늘 씨도 먹고 힘내세요.”

“아, 으, 가, 감사합, 니다…….”

“오늘 씨가 준 건데요, 뭘.”

오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다음에 봬요.”

“네, 네, 조, 조심히, 들어, 가세요…….”

손에 쥐고 있는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하나만 포장을 까서 입에 넣었다.

체온에 조금 녹은 초콜릿은 지독할 정도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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