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73화 (73/202)

# 73

24. 목이 없는 말(6)

거짓말 안 하고, 진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이곳에서 나름대로 요괴 상대하면서 담력이 좀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똑.

“히익!”

오늘이 숨을 들이켰다.

똑. 똑.

누군가 문이 두드렸다.

누가 두드리는지는 사실 알고 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저 늙은 귀신이 문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으니까.

똑.

일정하게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불안한 눈으로 휴대폰을 보자 화면이 아예 꺼져 있었다.

[있느냐.]

“…….”

오늘이 옷을 꽉 잡았다. 나도 누굴 잡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거기 있느냐.]

오늘이 내 옷을 잡지 않은 손으로 이산래의 등을 쿡쿡 찌르는 게 보였다. 이산래는 그때마다 꿈틀거리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보통 영화 같은 데서는 저런 질문에 대답하면 빨리 죽는 지름길이었다.

“저거 대답해도 됩니까?”

오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워낙 가까운 거리라 이산래에게도 들렸는지 등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자, 장군님은, 시, 신으, 로, 모셔지, 는… 분, 이시니…… 저, 런, 걸로, 벌을, 주, 주시지는, 않을, 거, 예요…….”

그리고 굉장히 안심되는 말도 덧붙였다.

“대, 대, 대답한 건, 팀장, 님이시니, 까…… 뒤집어, 쓰는, 것도…….”

무슨 일이 있으면 이산래가 방패막이 된다는 소리다. 이산래는 눈을 꾹꾹 눌렀다. 오늘은 이산래의 등을 계속 찔렀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느냐.]

“무슨 일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중후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정확하게 귀에 꽂혔다.

복숭아에 대한 것만 해결되면 박물관은커녕 특별수사과와는 어울리지 않아야겠다. 도저히 내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다.

[너희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구나.]

* * *

[가만히 있는데 놀라게 하기 싫어서 여지껏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예, 감사합니다…….”

이산래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장군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만…….”

신라 시대 복식이야 내가 잘 알지 못하니 패스하고. 김유신 얼굴도 알 게 뭐냐. 저 체구 좋은 할아버지가 평범한 귀신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아사달은 조금 음침하다는 점을 빼면 살아 있는 사람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저 장군님은 눈에는 시퍼런 귀기가 서려 있었고, 둥둥 울리는 목소리부터가 평범하지가 않았다. 탕비실 안으로 들어오자 방 안 온도가 5도는 떨어졌다. 혈색은 좋았지만 미묘하게 푸른빛 도는 피부는 확실히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내 너희에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으마.]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많은 걸 바라는 거다.

물론 죽은 사람은 그걸 모르지.

[본래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거늘, 하늘의 연이 닿아 내 오랜 벗을 보게 되었느니라.]

“벗이라 하시면…….”

특별수사과에서 팀장 정도나 하려면 저 정도 담력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장군님이 입을 열 때마다 흠칫흠칫 떨고 있는데 이산래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여즉 옛 기억에 사로잡혀 지상을 떠도는 나의 벗 말이다.]

“……복도에 계시는 그, 말… 님, 말이시지요?”

[어린 날의 치기와 부끄러움으로 내 잘못을 그에게 뒤집어씌웠구나. 오랜 시간이 지나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데, 이제 편하게 해 주고 싶구나.]

“그, 외람되오나, 그간 한 번도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이 땅을 돌아다니며 많은 이들을 도왔다. 반면 저 아이는 내 오랜 갑옷에 매여 땅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지. 지상을 돌아다니는 시간은 아주 짧았고 찾아가면 이미 늦었더구나.]

장군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타까움이 뚝뚝 떨어지는 어조였지만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우리나라 제일가는 장군신이라고는 해도 결국 죽은 사람이라는 건가.

[지금도 무리하여 찾아온 것이라 내 벗에게 내 목소리를 전하기에는 힘이 부치는구나.]

이산래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서 꺼낸 안경닦이로 슥슥 닦으며 말했다.

“어떤 의미이신지는 아시지요?”

[물론이다.]

이산래는 한결 깨끗해진 안경을 썼다.

“그럼 어떻게 도와드리면 됩니까?”

장군님은 잠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라.]

보통 저렇게 말하면 어려운 일이다.

[어린 나의 그림자를 막으면 되는 일이니.]

결국 오늘의 생각이 맞았다.

계단에 있는 장군님과 목을 자르는 김유신은 따로 있다. 이 무슨 미친 일이란 말인가.

신라 시대 귀신에게 이 정도 일은 쉬운 일인가? 다른 시대 귀신은 좀 덜한가?

역시 특별수사과와는 상종하지 말자. 배우나 가수들이 눈앞에 알짱거리는 것보단 의심은 가도 드라마 등장인물인지 불확실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심적으로는 편하긴 한데…… 이런 일이 반복되다가는 심장과 사이가 나빠질 것 같다.

[걱정 말거라. 그리 위험한 일도 아니니.]

살아 있는 육신들 사이에 내려앉은 정적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장군님은 걱정 말라는 듯 덧붙였다.

장군님 대화 담당으로 낙점된 이산래는 오늘이 쿡쿡 찌르는 손가락을 피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검을 막으면 되느니라.]

“그건…….”

[너희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구나.]

너희라고 해 봤자 장군님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정부의 편리한 초능력자 노릇도 모자라 죽은 신라인의 편리한 심부름꾼 노릇도 해야 하나 보다.

……애초에 내가 하려던 짓과 비슷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나서서 하는 것과 남이 시켜서 하는 건 기분이 다르다.

당연히 후자 쪽은 좀 더 기분이 나쁘다.

“위, 위험, 해요.”

그리고 나 대신 가만히 있던 오늘이 나섰다.

“너, 너, 너무, 위, 험, 해요…….”

요괴대책팀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인간적인 감동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 운명을 안다. 결국 하게 되겠지.

[이해하느니라.]

장군님은 오늘의 말에 긍정했다.

[스스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으니.]

그 의미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슬쩍 돌아보니 오늘의 얼굴도 살짝 이상해졌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장군님은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염원이 가득한 물건을 이미 가지고 있구나. 이 정도면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니라.]

갑자기 손목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워졌다.

“윽…….”

“해, 해준, 씨?!”

오늘이 당황하며 장군님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역시 특별수사관들의 담력은 남다르다.

손목이 뜨거워진 건 금방 가셨다. 소매를 걷어 보니 오늘이 주었던 묵주가 보였다. 묵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었다.

[너에겐 그것이 좋을 것이니라.]

천오백 년 전에 죽은 귀신과 묵주라니. 기괴한 조합이다. B급 호러 영화에서도 안 나올 조합이다.

불행한 점은 내가 그 B급 호러 영화의 등장인물이라는 거고.

“무슨…… 뭘 하신 겁니까?”

솔직히 죽은 사람한테 말 걸고 싶진 않지만 이건 물어봐야 한다. 복숭아가 그 모양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가지고 다닐 순 없다.

[네게 필요할 것이니라.]

장군님은 단언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제발 묻는 말에 대답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청룡도 결과만 말해 줄 수 있다더니 다들 이 모양이잖아. 나는 과정도 필요하다.

[네 힘에 도움이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러니까 무슨 작용을……. 됐다. 용이든 죽은 사람이든 천 년 정도 묵으면 지 할 말만 하고 마는 습성이 생기나 보지.

[의심이 많은 아이로구나. 내 힘을 조금 넣었느니라.]

아사달과 비슷한 연배의 귀신이고, 장군신이니 그런 게 가능하대도 이상하지 않다. 그 어두침침한 석공은 흠뻑 젖은 서울은 뽀송하게 말리기까지 했다.

장군신의 가호니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성능이 좋았으면 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치기 어린 시절의 내가 불려 나와 그 밤의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한 번, 딱 한 번 그걸 막으면 되느니라.]

“장군님 검을 막으라고요?”

차갑게 식은 묵주를 매만졌다. 어쨌든 이 깜깜한 연구소 건물을 벗어나려면 말을 처리해야 했고, 장군님까지 나서서 등을 떠밀고 있다.

대가도…… 나름 받았으니까. 여차하면 장군님이 나서 주지 않을까 싶고.

“저, 저, 해준, 씨…….”

“네?”

오늘이 울상인 얼굴로 날 불렀다.

“위, 위험, 한, 데…….”

“위험하기야 하지만, 원래 저도 제 보호막 믿고 복도에 가자고 했었잖습니까.”

“그래, 도…….”

“여차하면 장군님께서 지켜 주시겠죠.”

슬쩍 말을 흘렸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 맞다. 예전이면 그냥 속으로 삼켰을 텐데 이젠 어떻게든 되라는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만약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졌다. 그냥 이대로 죽는 걸까? 아니면?

“그, 그럼, 저도, 같, 이, 갈… 게요.”

“오늘 씨가 더 위험하겠습니다. 여기 계세요.”

“아무리 그래도 정식으로 공무를 요청한 것도 아닌데 해준 씨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이산래마저도 못마땅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시간이 좀 걸려도 더 안전한 방법을 찾겠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말이 나타나도 며칠 안 돼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정 안 되면 버티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정수기와 커피, 과자가 담겨 있는 바구니. 원형 테이블 하나, 의자 몇 개.

“여기서 버틴다고요?”

“……그 전에 방법을 찾는다니까요.”

“여기 화장실도 없잖습니까.”

“…….”

이산래가 말문이 막혔는지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낮에 말도 막았으니까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안 되면 장군님 등 뒤로 숨을게요. 그 정도는 장군님도 봐주실 겁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잊고 계신 모양인데, 저 낮에 보호막 한 겹만 썼습니다?”

* * *

말이 천천히 걸어온다. 빛과는 상관없었는지 활짝 열린 탕비실 문에도 불구하고 말은 그대로 지나쳤다. 검은 갈기가 말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 목이 제대로 붙어 있었다. 거기다 말 등 위에 곱상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말의 머리와 젊은 청년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장군님도 푸른빛을 띠고 있지만 저쪽은 야광 별 스티커처럼 빛났다.

[한번 보거라.]

장군님이 말했다.

말은 뚜벅뚜벅 걸어 계단 앞에 섰다. 복도의 끝이다. 푸르게 빛나는 머리가 투레질을 하자 졸고 있던 청년이 일어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청년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쿠웅!

탕비실에서 내내 들었던 큰 소리가 청년에게서 났다. 청년은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말의 머리를 쳤다. 툭 떨어진 푸른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탕비실까지 왔다.

그리고 푸른빛이 되어 사라졌다. 노기 어린 눈으로 말을 노려보던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정적은 잠시, 쓰러졌던 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말은 방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흔들었다.

다그닥다그닥.

말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푸른 말 머리와 청년이 아까처럼 자리를 잡았다. 말은 느긋하게 뚜벅, 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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