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71화 (71/202)

# 71

24. 목이 없는 말(4)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오늘이 대신 대답했다.

“제, 제천, 대성이요…….”

“아, 제천대성.”

창밖은 여전히 새까맣고, 복도에서는 벼락같은 노성과 함께 말의 목이 굴러가고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작은 탕비실 구석에 앉아 원숭이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그나마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진 게 다행이다. 덥기라도 했으면 딱 죽고 싶은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제천대성이 정확히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복숭아를 가꾸는지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거든요. 복숭아 구매도 정부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도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영약이라고 했다. 그런 물건이라면 관리도 철저한 게 당연하다.

“그럼 구하기 되게 힘들겠는데요.”

“또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산래는 고개를 저었다.

“등급이 낮은 건 의외로 쉽게 구해요. 그건…… 파지죠. 불량품입니다. 그런 건 좀 느슨하거든요. 정부와 계약한 업체에서 파는데, 이번에 여기에서 가짜를 팔았던 겁니다.”

생각보다 복숭아에 얽힌 일이 복잡하다. 저 난리가 났을 때 난 뭐 하고 있었지? 제주도에 가 있을 때인가?

“그래서 중국 정부와 함께 수사했습니다. 그쪽도 뒤집어졌죠. 갑자기 가짜 복숭아가 나타난 거니……. 심지어 냄새와 모양도 감쪽같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래서 그 가짜 복숭아는 어떤 놈입니까?”

나한테 중요한 건 그 복숭아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지 복숭아 탄생 설화가 아니다.

그러나 이산래는 내 질문을 무시했다.

“가짜라도 진품과 외견상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겁니다. 당연히 중국 정부가 뒤집어질 만하지요?”

“…….”

그래. 이렇게 설명에 충실한 인간이 곁에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나하나 다 떠먹여 주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있나. 어차피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

잘린 말의 목이 또 탕비실 앞까지 굴러왔다. 이산래는 발굽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을 멈췄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저 말과 김유신이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집 앞마당에 괴물이 있어도 나만 살면 됐지, 뭐. 인간 마음이란 게 다 그렇다.

말이 지나가자 이산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가짜 복숭아를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진짜 쥐 잡을 듯 뒤졌습니다.”

이 뒷이야기는 짐작이 갔다.

“뒤졌더니 나온 사람이 복숭아 관리인인 제천대성이었고요?”

“네, 그렇죠.”

이산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중국 정부가 손을 뗐어요. 원래라면 사형시켰을 텐데 그러면 복숭아를 키울 사람이 없잖습니까? 쉬쉬하며 넘어갔죠. 우리는 그쯤에서 쫓겨나듯 수사를 그만둬야 했고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제 몸에 남은 복숭아 잔재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이제 나옵니다.”

생긴 건 차갑게 생겨 놓고서 의외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어쨌든 도움을 구하는 쪽은 나이기 때문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가짜 복숭아를 만드는 데 제천대성이 진짜 선도를 이용했습니다.”

“……택갈이라도 했습니까?”

“그것도 안 한 건 아니긴 한데요.”

택갈이도 하긴 했다는 거군.

하긴 제천대성, 손오공은 굉장한 사고뭉치 아니던가. 그 정도 스케일의 일을 저지른 이를 사고뭉치라 표현하는 건 너무 귀엽긴 한데……. 부처님이 보시기엔 전부 사고뭉치긴 하겠지.

서유기에서도 복숭아를 훔쳐 먹더니 여기서도 복숭아 가지고……. 불법 사업을 하려고 하다니.

“처음에는 진짜를 빼돌렸죠. 하지만 아무리 제천대성이라고 해도 일련번호를 계속 위조하는 건 힘들었나 보더라고요. 수지에도 안 맞고.”

“그래서…….”

“네. 그래서 가짜 복숭아를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저, 저희가, 끼어든, 게…… 이때, 쯤, 이고요…….”

“그리고 호랑이님이 해준 씨에게 복숭아 냄새가 남아 있다고 한 것도 이때 공정 방법상의 문제 때문일 겁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가짜 복숭아를 만든 겁니까?”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산래가 말을 멈추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한마디씩 내뱉던 오늘이 끼어들었다.

“지, 진짜를, 모, 아서, 가짜, 를, 만들, 었… 어요. 모, 모자이크, 처럼…….”

“오, 그래요. 오늘 씨 말대로 생각하면 쉽겠군요.”

오늘의 말에 이산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에서 조금씩 떼 온 겁니다. 티가 안 나게 냄새나 맛, 영력 같은 걸요. 그리고 그걸 뭉쳐서 가짜를 만들어 낸 거죠.”

이때 말이 다시 돌아왔다. 데굴데굴 구른 목이 탕비실 앞에서 멈췄다. 오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저 복도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을 떠올리면 소름 끼치기는 했다.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그래서 해준 씨가 받았던 가짜 복숭아가 진짜와 차이 나지 않을 만큼의 향을 가지고 있던 겁니다. 진짜 선도에서 가져온 거니 당연히 차이가 나지 않겠죠.”

말이 멀어지자 이산래는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럼 복숭아가 터진 것도?”

“억지로 붙여 놓은 거니 조금이라도 헐거워지면 따로 떨어지려고 했던 거죠.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는 종류의 주술이라.”

조금씩 윤곽이 뚜렷해진다.

청룡은 내게 먹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 했다.

그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게 된 이유가 복숭아라고 해도 너무 충격받지 않기로 다짐했다.

“제천대성이 가짜 복숭아를 만드는 데 썼던 핵심 주술은 두 가지입니다.”

이산래는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꼽았다.

“먼저 진짜 선도의 향을 모으는 주술입니다. 제천대성의 과수원에 널린 게 진짜 선도니 재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겠죠. 거기서 조금씩 훔쳐 온 겁니다.”

두 번째 손가락이 접혔다.

“그렇게 모은 향으로 형태를 유지시킨 게 두 번째입니다. 보통 한 달 정도 형태를 유지하고 해준 씨와 오늘 씨가 당했던 것처럼 터져 버리더군요. 수사하다가 저도 당해 봤습니다.”

“……그럼 저한테 남아 있는 건 뭡니까?”

“가짜 복숭아가 터진 걸 뒤집어쓰면서 거기 걸려 있던 주술이 해준 씨에게 옮겨간 것 같습니다. 오늘 씨나 저도 뒤집어쓰고 난 뒤에 며칠 동안은 복숭아 향이 계속 났거든요.”

설 연휴가 있을 무렵에 있었던 일이니 지금까지 삼 개월이다.

처음에는 내 몸에서도 복숭아 향이 났다. 그건 나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껏 남아 있는 건 인간은 맡을 수 없다. 그러나 호랑이 영물이 맡았다. 그건 내게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는 소리다.

“……며칠이라고요?”

“네, 그러니까 이상한 거죠. 삼 개월 정도 지나지 않았습니까? 원래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종류의 주술이 아닙니다. 선도의 향을 훔쳐 오는 원리라서 제천대성이 주술에 저주를 섞긴 했지만 그 강도도 약해요. 그래서 사실 저주라고 하기도 애매한 느낌이거든요.”

“…….”

보통 여기서 한 번 막혀야 한다. 게임이든 드라마든 흐름상 그렇지.

하지만 내게는 청룡이 해준 말이 있다.

‘자네는 그 복숭아를 먹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걸세.’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이후에 말입니다.”

“네?”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오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보았다.

“보, 복숭아, 요?”

“네. 가짜 말고요. 이번엔 진짜로.”

“……여름에 나는 그 복숭아 말하는 건 아니겠죠?”

“네, 선도요.”

이산래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럼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이산래는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에게 걸려 있던 주술이 해준 씨에게 옮겨 갔는데, 그게 선도 영향으로 증폭되었을 수는 있죠.”

“증폭…… 그러면 어떤 영향이 있습니까?”

“별 영향은 없습니다.”

이산래는 조금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끌어모으고 고정시키는 주술인데, 이게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별 영향을 못 주거든요. 영혼 같은 거면 또 모르지만.”

조금 불안해졌다.

“……영혼이면 어떻게 됩니까?”

“지박령 되기 딱 좋은 조건이죠.”

끌어모은 다음, 고정시킨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신경 쓰고 있었다. 기억이 바뀌어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만 있었는데…….

애초에 나는 어떤 형태로 이곳에 있는지부터 고민했어야 하는 모양이다.

몸채로 넘어온 것인지, 정신만 넘어온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이쪽’의 정해준과 뒤바뀐 것인지.

“해준 씨에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여기선 안 됩니다. 도구 같은 것도 전부 밖에 있으니까…….”

이산래가 말을 멈췄다.

다그닥다그닥.

말이 다시 걸어왔다.

“……저 말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말이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곳’의 정해준이라니.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았던 문제다. 이 몸 안에 있는 건가? 아니면 저쪽으로 넘어가 있는 건가?

내가 복숭아를 먹어서 이 세계에 고정된 것이라면, 만약 먹지 않았다면 그대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가정은 무의미하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튀려는 생각을 다시 잡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다.

무너지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 * *

다그닥다그닥.

슬슬 발굽 소리에 노이로제 걸릴 때가 온 것 같다. 상념을 떨쳐 내기 위해 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저 말이요.”

“네?”

“복도 끝에서 목이 베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럼 지금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 방면의 전문가는 이산래와 오늘이니 뭐라도 더 아는 게 있겠지.

“지금 말에는 김유신이 타고 있을까요?”

“…….”

이산래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군요. 일화에서는 술 취한 김유신을 기생집으로 데려갔다가 목이 베인 거니……. 저 김유신이 복도 끝에 계속 있는 게 아니라…….”

“말을 타고 계속 오가고 있지 않을까요?”

쿠웅!!

몇 번이고 질리도록 들었던 벼락같은 노성이 복도 끝에서 들렸다. 데굴데굴 굴러오는 소리도 처음처럼 소름 끼치진 않았다.

다만.

“……!!!”

옆에서 오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이산래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을 틀어막고 오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했으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

다그닥다그닥.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오늘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팔을 마구 휘저었다.

이산래는 오늘을 붙잡아 다시 앉히며 물었다.

“비명 지를 뻔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이거, 연락, 됐, 어요!”

오늘이 계속 잡고 있던 휴대폰을 슥 내밀었다. 메시지 창 화면이 액정에 떠 있었다.

[김도훈 : 아 및ㄴ]

[김도훈 : 선배보고 하는 말은 아니고요]

[김도훈 : 3층 계단에 머 있는데]

[김도훈 : 선배]

[김도훈 : 선배ㅠ]

[김도훈 : 전화도 안 되고ㅠ]

[김도훈 : 팀장님이랑 해준 씨도 같이 있는 거 맞죠?]

[김도훈 : 다른 분들도 데려왔거든요. 작업 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좀만 기다리세요ㅠ]

그 밑에, 오늘의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오늘 : 확인]

[오늘 : 확인해]

[오늘 : 계단에 뭐가 있어?]

가장 아래에는 김도훈의 답장이 있었다.

[김도훈 : 헉 이제 연락 되네요ㅠㅠㅠ]

“……아니, 저랑 해준 씨 폰으로도 했는데 다 안 됐잖아요. 오늘 씨, 어떻게 한 겁니까?”

오늘은 뿌듯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와, 와이, 파이요.”

“…….”

생각지도 못한 해답에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다행히 김도훈이 메시지를 보냈다.

세 쌍의 눈이 휴대폰 액정으로 향했다.

[김도훈 : 거기 괜찮아요?]

[김도훈 : 다른 선배들이 그러는데]

[김도훈 : 지금 그쪽에]

[김도훈 : 엄청 센 장군님이 계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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