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67화 (67/202)

# 67

23. 보이지 않는 곳에서(3)

대한민국의 초능력자 체계는 기형적이다.

외부에서는 알기 힘든 이야기다. 초능력자 중 8할을 차지하는 저등급의 초능력자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고, 비상근무를 뛰는 초능력자들은 쉬쉬하기 바쁘다.

하지만 찾고자 하는 정보를 알고 있다면 웹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은어와 줄임말이 암호처럼 쓰였지만 대체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포럼들은 이 기형적인 체계의 시작을 1975년으로 꼽았다.

1975년은 대한민국 최초의 초능력자인증기관 새날이 생긴 연도이며,

당시 대한민국은 독재정권 아래에 있었다.

* * *

한평화는 한이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손요운 그 새끼가 내 동생을 망쳐 놨어!”

한평화의 울분과는 별개로 나는 저쪽 세상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손요운은 냉장고 CF를 찍은 배우다. 드라마를 찍으면서 떠서 냉장고 CF를 찍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냉장고 CF를 찍을 만큼 유명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CF 찍은 시기가 중요한가. 어느 쪽이든 손요운은 유명한 배우라는 거다. 나이 대가 좀 있는 사람들에게도 먹혔고, 젊은 층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거기다가 캐릭터 설정부터 봐라. 소방관 출신? 이런 등장인물을 그냥 놀린다고? 그럼 서울을 날려 버릴 작가가 아니지.

“아이고, 내가 어떻게 기른 동생인데!”

“평원이랑 너랑 두 살 차이거든.”

한평원은 어떤가. 얘는 원래 드라마보다 영화에서 이름 날리던 애였다. 사이코패스 고등학생 역할로 이름 석 자 날리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뒤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영화는 최근에 외국에 소개되면서 소소하게 이름을 날렸다.

왜 케이블 드라마에 나오는지 이해 안 갈 사람들이 많다. 진짜 왜 나왔는지 모를 구민석이나 서다흰이 있고, 고깃집 주인 김재수가 있다. 그보다는 급이 조금 달리지만 한평원도 나름 인기 있고 한 번 쓰고 버릴 역으로 나오기에는 아까운 배우다.

……이제 와서는 진짜 드라마 작가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평행 세계 같은 거라면 드라마 작가는 무슨 계시라도 받은 걸까?

“평화야, 우리 밤에 손님 만나기로 했거든? 술은 그만 마시자, 응?”

끝내 한평화는 술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강원도에서부터 느꼈는데 이 집안사람들은 집안 얘기를 너무 거리낌 없이 한다. 내가 이 사람들과 오래 알던 사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지 않느냐. 염치를 아는 한국인으로서는 굉장히 뻘쭘한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다.

……솔직한 심정? 정보가 넝쿨째 굴러들어오고 있는데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있다. 숨소리가 한평화 말하시는 데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될 판이라고.

“내가 10년 동안 안전제일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10년은 무슨. 평원이 스무 살 되자마자 서울 가서 지냈는데.”

“할아버지는 누구 편이야?!”

“헉, 할아버지는 물론 우리 평화 편이지!”

할아버지라고 불러 줬다고 태세를 돌변하는 이를 볼 줄 누가 알았겠느냐.

“내가 걔 다칠까 봐 꽃도 잔뜩 쥐여 줬는데 그거 다 손요운 입에 들어갔겠지?”

“걔 신체 강화 능력 아니었어? 다치기 힘들 텐데…….”

“누구 편이라고?”

“할아버지는 우리 평화 편…….”

나는 드라마 보는 기분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한평화가 주문한 와인에 손을 뻗었다. 이게 얼마짜리라고 했더라? 물론 나도 이제 수십만 원짜리 와인을 사 먹을 돈은 있지만 내 돈으로 사 먹는 것과 남이 사 주는 건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맛있다.

“걘 평소 하는 일이 저수지에 물 채워 넣는 건데 왜 굳이! 정부한테 찍힐 만한 일을 하냐고!”

한평화는 잔을 가득 채운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것까지, 수십만 원짜리 와인으로 하는 일이라고 하기엔 좀 아까웠다. 치킨집에서 맥주 마시는 폼인데.

그래, 내 돈도 아닌데 편하게 생각하자.

“물론 나도 뒤엎고 싶지. 우리 아빠 내몬 놈들 죽여 버리고 싶은데……. 평원이는 그때 어려서 기억이 잘 안 나는 건가?”

“너네 두 살 차이라니까.”

다시 손요운 이야기를 해 볼까.

아니, 한평원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누구 이야기든 상관없다. 아마 그 둘 중 하나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일 테니까.

“평화야, 해준이도 있는데 정신 차려야지. 이따 우리 그 흡혈귀들 봐야 한다니까?”

“킁.”

한평화는 코를 훌쩍이며 나를 봤다. 퀭한 눈동자가 좀 무서웠다.

“오빠.”

“네.”

잽싸게 대답했다. 귀기 어린 눈이었다.

“오빠도 조심해요. 우리 아빠처럼 되지 말고.”

한평화는 냅킨에 코를 킁 풀었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불처럼 타오르더니 이젠 식다 못해 재가 되었다. 한평화는 울진 않았지만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진열도 차마 한평화를 잡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한진열은 풀이 죽어 잠시 그러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어, 평화가 수현이, 걔 아빠 죽은 일로 좀 많이 상심해서 그래. 그 뒤로 감정기복이 좀 심하거든.”

보통 감정기복이 심한 게 아니다.

하지만.

“네, 뭐. 이해합니다.”

당장 내 머리에도 가족들이 죽은 기억이 있다. 이해는 차고 넘친다.

“오해하면 안 되는데, 정부에서 수현이를 죽였다, 그런 거 절대 아냐.”

한수현. 한평화와 한평원의 아버지. 나와 같은 보호 능력자였고, 10년 전 강철이 사태 때 죽은 초능력자.

“수현이는 애가 성격이 착해서, 남 돕는 걸 좋아했거든. 그런 면에서는 능력이랑 잘 맞았는데…….”

이 정도까지 떠먹여 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이야기는 뻔하다.

옛날 옛적 한 초능력자가 살았습니다. 보기 드문 보호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북부에 무서운 요괴가 나타났답니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가운데, 초능력자는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요괴한테 달려갔어요.

그리고 그 초능력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초능력자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지만 초능력자의 어린 딸과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희생을 기꺼이 이해하였을까요?

……못 했다. 적어도 딸은 못 했다.

“수현이가 일 때문에 같이 많이 못 있어 주니까 평화가 그렇잖아도 센터랑 정부를 싫어했거든. 그게 수현이가 그렇게 되고 난 뒤로 더 심해졌어.”

“거기다 평원 씨까지 초능력자가 됐고요?”

“그래.”

한진열은 손을 움찔거렸다. 눈이 데굴 굴러가는 게 보였다.

“담배 피우고 싶으십니까?”

“어, 좀……. 근데 여긴 흡연실이 너무 멀어서 귀찮아.”

“어쩔 수 없죠.”

그리고 나는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지금 초능력자들이 대우가 안 좋은 건 사실이잖아요? 다들 그냥 쉬쉬하고 있는 거지.”

살아있는 대한민국 역사가 눈앞에 있는데 굳이 웹을 뒤질 필요가 있나.

그리고 이 호랑이는 수다 떨기 좋아하고, 의외로 경계심 없이 잘 말해 준다. 아마 주위에 좋은 사람밖에 없었던 탓일 거다. 그 독립군 아버지라든지, 한훈열 선생 같은 사람들.

“초능력자 법안이 막 발안 됐을 때, 그거 훈열이가 막으려고 했는데 못 막았어. 시대가 좀 안 좋았거든. 그래서 강원도에 들어가서 칩거했지. 딸린 식구가 좀 많았으니까.”

“……하긴, 많이 안 좋았죠?”

1975년.

센터가 지어진 연도가 그때였으니 그 전부터 조짐이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전쟁도 있었고…. 초능력자들도 많이 죽었지. 그 가족들도 많이 죽었고.”

한진열은 쓰게 웃었다.

이건 이곳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의 배경. 이 세계의 역사.

“그래서 결국 독재 정권의 개에서, 군 장성들의 하인으로, 그다음은 정부의 쓰기 좋은 장기짝으로 바뀌었지.”

“그럼 초능력자들에게 있던 제약들도…….”

“그 잔재지, 뭐.”

초능력자의 수는 피라미드 형태로 높은 등급으로 갈수록 수가 적어진다. 그러니 그 제약을 받은 이들도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도시 한복판에서 총을 쏴 갈길 수는 없으니 출몰하는 요괴들을 처리할 초능력자들은 필요할 테고.

비상근무는 법으로 제정되어 있지만 초능력자는 공무원이 아니다. 센터 소속이니 돈은 센터에서 준다. 세금 감면이니 뭐니 하면서 이것저것 혜택은 주지만 큰돈이 주어지는 혜택은 아니다.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초능력자들을 법의 틈새를 파고든 기업들이 후원하기 시작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단청에서야 내게 원하는 일이 있었으니 터치를 안 했지만 보통은 후원사에서 부를 때마다 공사장 터를 닦든 빌딩 유리창을 닦든 값어치를 해야 하겠지. 나라에서도 자기 돈 안 쓰고 초능력자를 쓸 수 있으니 눈 감아 주는 거고.

“평원 씨는 그런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하신다고요?”

“그렇다고 들었어. 너도 관심 있어? 혹시…… 평원이 신고하려고?”

그걸 이제 걱정하면 어쩌냐, 이 호랑이야.

“저도 초능력자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그저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혁명이겠지만 드라마에서는 이게 메인 스토리일 것이다.

드라마의 정의로운 주인공이 초능력자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이야기. 겸사겸사 요괴도 잡고, 사람도 돕고. 더불어 악당이 여의주를 가지고 일 벌이는 걸 잡기도 하면서.

박서원이 주인공이었다면 이 드라마는 복수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서원은 이미 여의주를 모으고 있지 않았던가? 복수를 꿈꾸는 악당이 존재하는 이상 주인공은 정의를 좇아야 한다.

* * *

“평화 씨 이건 고맙습니다. 쓸 일이 없었으면 하지만요.”

올 때는 가볍게, 갈 때는 무겁게.

나는 화분 세 개가 든 종이가방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청룡 인형이 생기면 보내 드릴게요.”

한평화는 새치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씩 웃었다.

“오늘 너무 못 볼 꼴 보여 드려서 미안해요, 오빠. 내가 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좋은 거 줬으니까 그걸로 퉁 쳐요. 오케?”

한평화는 주먹을 내밀었다.

애초에 정해영이 좋아하는 등장인물인 걸 알았을 때부터 각오했다. 정해영이 좋아하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다.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집안 가정사를 너무 깊이 알게 된 것 같아 복잡한 기분이기는 했다. 그래도 정보를 얻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나도 주먹을 들어 쿵 하고 부딪쳤다.

“별로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혹시 나 필요하면 불러요.”

“음, 청룡님 새 인형 시리즈 나올 때?”

“말 안 해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해 놓을게요.”

한평화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가 볼게요. 이제 해도 져서 흡혈귀가 오겠네요.”

레스토랑도 이제 정상적으로 영업하는 시간이 되었는지 하나둘 손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흡혈귀도 참 고생이라니까요.”

다 먹은 접시와 술잔으로 가득했던 테이블도 깨끗하게 치워졌다. 누가 보면 이제 막 레스토랑에 들어온 사람들 같았다.

나는 피식 웃고 종이가방을 챙겨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창백한 안색에 거의 은발로 보일 정도로 옅은 금발의 백인 남자를 보았다. 흡혈귀일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주머니에 넣어 놨던 휴대폰이 울렸다.

[오늘 : 죄송해요 바빠서 휴대폰을 못 봤어요.]

[오늘 : 복숭아요? 뭐가 궁금하세요?]

이제 복숭아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다.

호텔 로비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가백 호텔은 내 세계에서도 유명한 호텔이다. 반짝이는 불로 가득한 호텔 건물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푹 가라앉았다.

[정해준 : 아는 분이 저한테 복숭아 냄새가 계속 난다고 한번 알아보라고 하셔서요.]

[오늘 : 복숭아 냄새요?]

[오늘 : 아직도요?]

[오늘 : 누가 그랬어요?]

[정해준 : 아는 호랑이가요.]

[오늘 : 호랑이?]

[오늘 : 독립군 호랑이요???]

오늘은 잠깐 시간이 걸린 다음 대답했다.

[오늘 : 거기 걸려있는 건 별거 아니었는데.]

[오늘 : 한번 확인해 드릴게요.]

내 세계와 드라마와 이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이 세계는 내 세계의 연예인들이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이야기는 움직인다. 주인공이 누구든 이미 드라마 메인 스토리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박서원과 엮여 있다.

신선비 잡을 때 느꼈던 불길함이 이거네. 그날 난 주인공과 악당 중 선택했던 거다.

이제 와서 초능력자 권리 같은 건 모르겠다. 한평원이나 손요운한테 가서 친한 척하기에도 늦었다.

[오늘 : 이번 주에 언제 시간 되세요?]

그러니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보자.

[정해준 : 비상근무 불려 가지 않으면 다 괜찮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