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23. 보이지 않는 곳에서(2)
“나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요.”
디저트로 나온 과일까지 깔끔하게 먹은 한평화는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데려다줘?”
내가 온 뒤로 두 번째 스테이크를 주문해서 먹고 있던 한진열이 물었다. 한평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앤 줄 알아? 야, 입 좀 닦으면서 먹어.”
증손녀의 날 선 반응에도 한진열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평화는 입술을 비죽이다가 돌아서 나갔다. 한평화가 나가자 한진열은 냅킨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
“아직도 묻었어?”
“네, 왼쪽에도.”
한평화가 자리를 비워서 잠깐 대화가 끊긴 김에 여기 오기로 이유 중 하나를 이뤄도 될 것 같다. 한진열은 냅킨으로 마저 얼굴을 닦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날 보았다.
“왜? 덜 닦였어?”
“아뇨, 다 닦였어요.”
“근데 왜? 엄청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음…….”
물을 조금 마셨다. 목이 탔다.
“그, 복숭아 말입니다.”
“복숭아?”
“네, 그때 말씀하셨잖습니까.”
한진열은 코를 킁킁거렸다. 곧 기억이 났는지 아는 척했다.
“아, 그거? 잘 해결했어?”
“아뇨, 그거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니? 복숭아? 맛있는 과일이다?”
“복숭아가 무슨 과일인지는 저도 압니다만.”
“그럼?”
“저보고 복숭아와 사이가 나쁘냐고 하셨잖아요.”
한진열은 코를 다시 킁킁거렸다. 스테이크와 디저트, 차와 커피 향이 버무려져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한진열은 그 냄새들을 용케 구분했다.
“아직도 사이가 안 좋아?”
“그러니까 그 사이가 안 좋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요.”
한진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가 나쁜 게 나쁜 거지, 무슨 뜻이 더 있어?”
한평화가 왜 한진열을 할아버지 취급 안 하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물을 조금 더 마셨다. 흥분하지 말고 물어보자. 이래 뵈어도 100살도 넘게 먹은 호랑이다. 산신령이다.
“보통 복숭아한테는 사이가 나쁘다는 말을 안 쓰잖아요.”
“흠…….”
한진열은 마지막 남은 스테이크 조각을 꿀떡 삼키고 입을 열었다.
“너한테서 아직도 복숭아 냄새가 나거든?”
“네.”
“당연히 보통 인간한테서는 그런 냄새가 안 나.”
“그거야 그렇겠죠.”
한진열은 포크를 휘적거렸다. 한진열의 포크는 한평화의 트레이에 남아 있던 과일을 콕 찍었다.
“그리고 보통 복숭아도 인간에게 냄새를 남기진 않지.”
“그렇겠죠.”
“그러니까 그렇게 냄새가 진한 복숭아가 평범한 과일이지는 않을 거잖아?”
한진열은 하나하나 설명했다. 생긴 것만 보면 이런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역시 증손주까지 본 호랑이다.
“네.”
“그리고 보통 흔적을 진하게 남기는 종류는 저주 쪽이거든.”
물잔을 잡은 손이 움찔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저주라고.
“저주, 라고요.”
“복숭아가 너한테 앙심을 품고 혼자서 저주를 내리진 않을 테니까 복숭아와 관련된 사람이 너한테 저주를 걸었겠지.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이곳에 와서 먹은 복숭아는 하나뿐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뒤집어쓴 복숭아도 있다.
청룡이 말한 건 내가 먹은 복숭아일 것이다. 하지만 수상하기로는 뒤집어쓴 쪽이 더 수상하다. 어느 쪽이든 알아봐야 한다.
후자의 뒤집어쓴 복숭아는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설 선물 삼아 준 것이었다. 대대적으로 조사가 나왔을 때 가짜로 판명 난 건 내 것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걸 뒤집어쓴 건 나뿐이었지만.
아니, 정확히는 나와 수사관들뿐이다. 나와 오늘과 김도훈.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니까 가벼운 종류일 테고…… 가위 같은 것도 안 눌리지? 그럼 그냥 스쳐 지나갈 텐데 아직도 나다니 신기하네.”
“혹시 어떤 저주인지도 알 수 있습니까?”
한진열은 고개를 저었다.
“문제의 복숭아가 있다면 모를까 냄새만으로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역시 그렇습니까.”
“하긴 자기가 모르는 냄새가 난다고 하면 찝찝하지?”
“그렇죠, 뭐.”
정말 복숭아가 내가 이 세계에 있는 데에 무언가 영향을 준 것일까? 청룡이 콕 짚어 먹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시 오늘과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어제 보냈던 메시지 옆에서는 ‘1’이 사라지지 않는다.
“큰 도움은 못 줄 것 같은데, 정 힘들다 싶으면 말해.”
“저 사양 같은 거 안 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평화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너무 무리한 것만 아니면 해 줄 수 있어.”
청룡 인형 효과가 너무 좋다. 집에 아직 몇 개 더 남아 있는데 그것도 다 주고 싶어졌다. 어쨌든 선물 받은 거라 남 주기 뭐해서 가지고 있는 건데.
“……다음에 또 구하면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주면 진짜 고맙고. 평화가 수현이 죽은 이후로 많이 어두워졌거든. 그나마 인형 얘기할 때만 좀 괜찮아.”
한진열이 어두운 얼굴로 얘기했다. 할아버지에게 야, 야 하는 손녀라고 해도 한진열에게는 귀엽기만 한 모양이었다.
“평화 씨를 많이 아끼시나 봐요.”
“내가 걔 할아버지 태어날 때부터 봐 왔어. 그 조그만 녀석이 어떻게 안 예쁘겠어?”
생긴 건 동네 양아치 같지만 한진열은 독립군 출신의 호랑이다. 새삼 나이가 느껴졌다. 백 살이면 산신치고는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자꾸 내가 알 리가 없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이 세계에 적응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 빌어먹을 장례식 기억을 떠올렸을 때부터 마음먹은 대로 풀리는 게 없다. 애초에 여기로 온 뒤로 잘 풀린 일이 없다.
“뭐야.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그때 한평화가 돌아왔다.
한평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리에 앉았다.
“해준 오빠, 더 먹어요. 돈 내주는 사람 따로 있다니까요?”
“평화 씨가 먹어야죠. 그 흡혈귀들이 접대하는 건 평화 씨잖습니까.”
“난 많이 먹고 있어요. 원래 급한 사람이 돈 쓰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냥 평화라고 부르라니까요?”
정말 이렇게 먹어도 되는가 싶지만 흡혈귀와 볼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니다. 뭔가 말이라도 오고 갔겠지.
“그럼 나도 화장실에.”
음료수로 입가심을 하던 한진열이 한평화와 바톤 터치하듯 일어났다. 한평화는 한진열을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저런 걸 보면 또 호랑이의 어여쁜 증손녀라는 게 이해가 된다.
“…….”
“…….”
어색한데.
청룡 인형으로 호감도를 높였다고 해도 한평화와 나는 애초에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강원도에서도 내내 한평원과 얘기했었지 한평화와는……. 내가 한평화를 구경한 거에 가까웠다.
“저기, 오빠.”
“……네?”
“왜 그렇게 날 어려워해요?”
“아니, 뭐, 딱히…….”
한평화는 정해영이 좋아하던 ‘우리 언니’였다. 내 기억들이 사라지는 걸 처음 알게 된 계기가 한평화였다. 등장인물이 확실하니 인맥을 다져놓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거부감은 어쩔 수 없다.
“뭐, 상관없고요.”
“……?”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돌변했다. 이제 좀 강원도에서 봤던 한평화 같다.
“아까 그 화분 있잖아요.”
“다시 줘요?”
“에이, 나 줬다 뺏고 그러는 사람 아니거든요? 그거 셋 다 흙을 살짝 걷어 내면 조그만 새싹이 하나씩 있을 거예요.”
한평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 다음 재빠르게 말했다.
“그거 상처가 안 나게 조심해서 뽑은 다음에 박서원 그놈 좀 가져다줘요.”
“……네?”
“진짜 치사해서 원. 한진열이 왜 할아버지 놔두고 나 따라온 줄 알아요? 내가 애도 아닌데. 감시하러 온 거잖아요.”
잠깐 이야기를 못 따라갔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무슨 쌍팔년도 신파극도 아니고. 내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해?”
“…….”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그 쌍팔년도 신파극에 날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드라마의 악당과 등장인물이 분명한 한평화 사이의 일이지 않은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시큰둥한 한평화의 눈이 나한테 꽂혔다.
“아, 인형 고맙긴 해요. 나 그거 진짜 가지고 싶었거든요. 박서원 그 새끼는 지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텐데 내 톡 다 씹고 끝까지 안 구해 주더라고요. 그러니까 오빠한테 주는 감사 마음도 진짜예요. 섭섭해하지 마세요? 그 꽃들 진짜 아무한테나 안 줘요.”
한평화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었다. 박서원과 묘하게 닮은 미소다.
“……네, 알겠습니다.”
박서원의 모임은 10년 전 강철이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평화 또한 그때 아버지를 잃었다. 박서원은 막 각성했을 당시 한훈열에게서 능력을 훈련받았다. 그 모임에 한평화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다면 혹시 한평원도 그 모임 인원일까.
“원래 이런 일에는 한평원 시켜먹었는데 걔가 요즘 바쁜 시즌이거든요. 그래서 오빠 핑계 좀 댔어요.”
“아, 네…….”
“걔도 초능력자 할 거면 새날로 갈 거지 왜 북천에 가서는 인형도 못 구하고.”
한평화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새날로 갔으면 어? 인형 나올 때마다 하나씩 어? 가져올 수도 있잖아요? 나오는 것마다 자선 행사 한정이 대부분이니 아주 미치겠다고요.”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한평화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혹시나 새날에 아는 사람 없는지 물어보려고 했더니 지 바쁘다고 전화도 안 받고.”
“평원 씨가, 음, 많이…… 바쁜가 봐요…….”
한평화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 아주 눈에서 불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봄이면 산불이니 뭐니 하면서 많이 불려 다니니까요. 거기다가 요즘 무슨 헛바람이 들어서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고 다니는 것 같은데…….”
“헛바람요?”
“초능력자 인권 향상이나 뭐라나. 그러게 초능력자 등록하지 마라니까.”
“평원이 얘기야?”
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한진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평원이 정도 능력이면 바로 들킨다니까? 걔 각성했으면 홍수 났어, 홍수.”
“할아버지도 있는데 대충 비비면 무마됐을 거잖아. 걔 좀 봐, 겨울만 좀 낫지 허구한 날 불려 다니잖아. 요 몇 년간은 겨울에도 가뭄이라서 바빴고.”
한평화는 짜증을 냈다.
“야, 미등록 초능력자라고 밝혀지면 아무리 훈열이라고 해도 끝난다니까? 그거 얼마나 빡빡한지 너도 잘 알잖아?”
“그럼 뭐 해? 결국 최저임금 받는 현대판 노예잖아!”
한진열이 슬쩍 내 얼굴을 보았다. 한평화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판 노예가 여기도 앉아 있다.
내 통장에 꽂힌 돈은 단청에서 준 거다. 덕분에 생활에 지장 없이 돈을 펑펑 쓰고 다니지 그 돈이 없었으면 최저임금에 허덕이며 살고 있었지 않을까.
초능력자는 공무원이 아니라 호봉 같은 것도 없고, 겸업도 금지다. 그런 주제에 요괴대책팀에서 연락 오면 꼬박꼬박 나가야 한다. 거주 지역을 벗어나는 것도 신고해야 했지?
한평화의 짜증에 한진열이 증손자를 대신해서 변명했다.
“그래서 요즘 평원이가 초능력자 인권 운동에 관심이 많다고 하잖아.”
“그러다가 정부한테 찍혀서 더 뺑이 치면 어떡해?”
“평원이가 어느 집안 애인데 그러겠어?”
한진열이 살살 달랬다.
“그리고 평원이 마저 잘못되면 훈열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너는?!”
“당연히 나도 가만히 안 있지…….”
나는 그 촌극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초능력자 등록까지는 그렇다 쳐! 그런데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잖아? 등급심사도 대충 봐서 실제보다 좀 낮게 측정되게 해도 되잖아. 요즘은 다들 그러는데.”
“평원이가 그런 부분에서는 고지식하잖아.”
“그건 알아! 그렇지만 초능력자 인권 운동에서 얘가 꼭 총대 멜 필요는 없잖아. 그게 나쁘단 건 아니지만 위험하잖아. 뭣보다도 안전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가르쳐 놨는데.”
한평화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손요운 그 새끼가 우리 애 망쳐 놨어!”
“…….”
아.
한평화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 이 드라마 내용이 대충 어떤 내용이었을지 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