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65화 (65/202)

# 65

23. 보이지 않는 곳에서(1)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해준 : 오늘 씨, 복숭아 건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시간 되십니까?] 1

휴대폰 화면을 껐다.

일이 바쁜 건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건지 오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 빌어먹을 복숭아에 대해 물어보는 데 오늘만 한 인물은 없는데. 특별수사과에서 일하고, 가짜 복숭아 사건을 수사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등장인물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등장인물과 연결고리가 확실하면 편할 텐데.

……뭐, 그것도 다 연락이 될 때의 이야기지.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잠실에 달려가 청룡에게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복숭아가 무엇인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 거야 많지. 하지만 청룡이 허락한 건 딱 하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물어본다 하자. 청룡은 과정 없이 결론만 말해 준다고 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진 않을 것이다. 다른 질문도 마찬가지다. 청룡이 말하는 ‘결론’이 어디까지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허투루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으니까.

그러니 최대한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얻어야 한다. 청룡이 첫걸음은 제시해 줬다. 그 빌어먹을 복숭아…….

다시 휴대폰을 보았다.

[정해준 : 오늘 씨, 복숭아 건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시간 되십니까?] 1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복숭아에 대해 알려고 해도 연락이 되어야 말이지.

“후…….”

오랜만에 피는 담배는 금방 짧아졌다.

손안에서 휴대폰이 울려서 기대를 안고 봤지만 임상규다. 돌아가면 이 인간 노래는 못 듣게 생겼다.

“네, 여보세요.”

* * *

“여보세…….”

“시간 돼?”

경쾌한 목소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밤새 두꺼비 요괴의 독 깨기에 시달리고 온 터라 크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자 머리가 아팠다.

잠이 덜 깨서라고 해 두자. 절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려서 그런 건 아니고.

“……누구신데 전화로 그러십니까.”

그냥 끊어 버려야 했다.

“난데.”

보이스 피싱인가…….

“평원이네 할아버지. 호랑이 쪽.”

한평원의 호랑이 쪽 할아버지, 한진열은 잠긴 내 목소리에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래서 시간 돼?”

“무슨 일이십니까.”

“평화가 잠깐 볼일이 있어서 서울에 왔거든? 너 저번에 평화한테 인형 줬다며. 평화가 그거 답례로 줄 거 있다던데?”

이유나가 준 청룡 인형 하나를 강원도로 보냈던 게 이제야. 먹고 입 씻은 줄 알았다.

“아니, 뭐, 그냥 생겨서 보낸 건데…….”

한국인이면 한 번 튕겨야 한다.

“평화가 너한테 꼭 줘야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평원이한테 네 전화번호를 물었어. 괜찮지?”

“이미 전화하셨잖아요.”

“응, 괜찮지?”

“…….”

“시간 오래 안 뺏을게. 우리도 볼일 있고. 잠깐 나올 수 있어?”

독립운동가가 말해도 거절하지 못하고, 호랑이가 말해도 거절하지 못한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호랑이가 말하는데 어떻게 시간이 없다고 하겠는가.

“어디로 가요?”

“음, 가백 호텔 알아?”

“알기야 알죠.”

“그럼 거기로 와. 혹시 멀어?”

“아뇨, 그건 아닌데…….”

“우린 거기에 있으니까 레스토랑에서 평화 이름 말하고 와.”

한진열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뭐 어쩌라는 거지? 호텔 레스토랑에는 왜 부르고?

침대에 누워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일어났다.

한진열과 한평화는 등장인물이 확실하다. 거기다 박서원과도 연결고리가 있고. 무슨 일로 서울까지 나왔는지 확인해야 했다. 청룡 인형 답례가 뭔지도 궁금했고.

이곳이 드라마인지 아니면 평행 세계 종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저쪽에서 정해영이 좋아해 죽는 드라마와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등장인물의 행동은 파악해 둬야 한다.

최소한 서울이 날아가기 전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서울이 날아가면서 등장인물도 다 죽는다. 그 등장인물 중에 청룡도 포함되어 있을까?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아는 게 더 요원해진다. 기한을 서울이 날아가기 전으로 잡고…….

그런데 박서원은 주인공이 아니잖아. 그놈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서 마지막에 안 죽을 줄 알았는데, 이러면 걔도 죽는다는 말 아냐?

……정해영은 진짜 도움 안 된다. 맨날 TV나 처 보고 앉아 가지고. 남자 취향도 더럽고. 주인공을 똑바로 말해야 할 거 아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호텔로 들어섰다. 화려한 내부.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했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한평화의 이름을 말하자 막힘이 없었다. 직원은 레스토랑 가장 안쪽으로 날 데려갔다. 식사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레스토랑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곳은 보통 식사 시간 아니면 영업 안 하지 않나? 사실 한씨 집안이 굉장한 재벌이라던가?

“어, 왔냐?”

한진열이 턱을 괸 채로 손을 흔들었다.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강원도에서 만났던 여자가 포크를 쥐고 앉아 있었다.

강원도에서 괴상한 차림새를 하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평화는 180도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밀짚모자나 선글라스 없이 장식이 달린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안녕하세요!”

달라진 건 옷차림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한평화의 표정이 달라졌다. 얘가 이렇게 밝은 애였어?

“아, 네. 안녕하세요.”

“일단 앉고, 뭐 먹을래?”

“주문해도…… 되는 겁니까?”

“어, 시켜.”

한진열은 마치 자기가 호텔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한진열의 앞에도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식사류 아니어도 다 돼요.”

한평화도 거들었다.

한평화의 앞에는 디저트로 가득한 3단 트레이가 있었다. 한평화는 제일 위에 놓여 있는 마카롱을 한입에 쏙 먹었다.

“영업시간 아닌 것 같던데요.”

“응, 아닌데 우리를 초대한 사람이 돈이 좀 많거든.”

“꽤 많은?”

“엄청 많지.”

한진열과 한평화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한훈열이 왜 저 둘을 같이 두는 게 아니었다며 한탄했는지 알겠네. 의자를 빼서 앉으며 음료수나 한 잔 주문했다.

“초대받았다고요?”

“평화한테 부탁할 게 있다나 뭐라나. 대충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가서 모처럼 평화가 서울에 왔지.”

“그럼 강원도에는 누가……. 선생님 혼자 계십니까?”

“장규혁이와 곰 아줌마가 있잖아.”

험악한 인상의 농원 관리인과 웅녀를 떠올렸다.

“아직 강원도에 있습니까?”

“중간에 장규혁이는 제주도에 내려갔었는데, 내가 자리를 비워서 강원도로 불렀어. 훈열이 나이가 나이라서 나도 나오기 싫었는데 평화를 혼자 보낼 수가 있어야지.”

“투덜거릴 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니까?”

“어허, 할아버지가 같이 와 줬는데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할아버지는 개뿔.”

한평화는 코웃음 쳤다. 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구나. 겨우 한 달 사이에 사람이 바뀌진 않겠지.

“음료수 하나로 되겠어요? 돈은 제가 낼 테니까 드시고 싶은 거 다 시키세요, 오빠.”

“와, 너 대우가 너무 다른 거 아냐?”

“넌 할아버지잖아.”

“그럼 할아버지라고 제대로 대우하던지!”

한평화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어차피 니가 내는 돈도 아니잖아!”

“니가 내는 것도 아니잖아.”

한평원보다는 저 둘이 더 친남매 같은데.

“꼬우면 너도 우리 해준 오빠처럼 인형 구해 주던지.”

한진열이 입을 뻐끔거렸다. 한평화는 그런 한진열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세웠다가 나를 보고선 눈을 깜빡거리며 순진한 척했다.

잊지 말자. 얘도 정해영이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정해영 같은 게 좋아하면 말 다 했지.

“어쨌든 많이 시켜요, 오빠. 우리 돈도 아니니까 맘껏 먹어요.”

태도가 너무 돌변하는 바람에 오히려 무섭기까지 하다.

등쌀에 떠밀려 식사류를 주문하고 초콜릿을 집어 먹고 있는 한평화에게 물었다.

“누가 돈을 내는 겁니까?”

“유럽에서 온 사람들인데……. 야. 그 사람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너 지금 100살 먹은 호랑이한테 외국사람 이름을 물은 거야?”

“어휴, 저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살려나 몰라.”

“야!”

한진열이 빽 고함을 내질렀다. 강원도에서는 나름 호랑이다운 모습을 보였는데 한평화에게 걸리니 그런 모습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한평화는 귀를 털어 내는 흉내를 내더니 또 순진한 척 표정을 바꾸며 대답했다.

“이름은 어려워서 잘 기억 안 나는데, 인간은 아니고요.”

한평화는 차를 홀짝였다.

“음, 뱀파이어? 흡혈귀라고 하더라고요.”

……용과 호랑이, 곰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세상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괴물 중 하나가 거론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유럽에서 백조가 되어서 돌아온 인간도 있는데.

“흡혈귀가 왜 평화 씨를 찾습니까?”

“에이, 우리 사이에 그냥 편하게 불러요.”

“너네 사이가 무슨 사인데.”

“저런 멍청한 호랑이 말은 무시하고요.”

청룡 인형이 효과가 엄청 좋은데.

“음, 밥 먹고 주려고 했는데.”

한평화는 한진열에게 눈짓했다. 전투적으로 스테이크를 먹고 있던 한진열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뜨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진열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어허.”

“아이고, 손녀가 할아버지를 아주 부려먹네, 부려먹어.”

한진열은 구시렁거리면서도 한평화가 시키는 대로 종이봉투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화분 세 개였다. 한 뼘만 한 식물이 자라 있었다. 차례로 노란 꽃, 하얀 꽃, 빨간 꽃이 작게 펴 있었다.

빨간 꽃은 처음 보지만 노란 꽃과 하얀 꽃은 어디서 많이 봤는데.

“들고 가기 편하라고 작게 해 놨는데, 좀 더 큰 화분에 옮겨 주면 쑥쑥 자랄 거예요. 귀찮으면 이대로 둬도 되고요.”

한평화는 뿌듯한 얼굴로 설명했다.

“이거, 설마…….”

“네, 살살이꽃, 뼈살이꽃, 피살이꽃이예요.”

흡혈귀가 왜 한평화를 찾아왔는지 알겠다.

“흡혈귀들이 평화 씨를 찾아온 이유가…….”

“편하게 부르라니까요? 맞아요, 우리나라야 헌혈원에서 키우고 있지만 외국은 아니거든요.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피를 만들어 주는 꽃이 한국에 있다고.”

“건너건너 훈열이한테 연락이 오더라니까? 깜짝 놀랐어.”

이 세상 흡혈귀들이 어떻게 사는진 모르겠지만 사람 피를 먹는다는 건 인식이 안 좋을 만하다.

흡혈귀의 존재를 인정받은 건 근대 들어와서다. 수혈은행이 처음 설립된 것도 100년이 되지 않은 일이다. 수혈은행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흡혈귀들도 숨통이 좀 트였고, 수혈팩을 사는 걸로 식사를 대신했다.

“흡혈귀들도 사정이 꽤 절박한 모양이군요.”

잠깐, 나 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피가 항상 남아도는 것도 아니니까 말야. 아무래도 인간이 우선일 수밖에 없잖아?”

“그거야 그렇죠.”

“그래서 평화의 피살이꽃이 탐나나 보더라고. 혈혈원에 연락해도 피살이꽃은 평화 허락이 있어야 피니까 안달 날 만했겠지.”

나는 나란히 놓인 세 화분을 보았다. 제주도에서 봤던 살살이꽃은 키가 좀 작았지만 강원도의 뼈살이꽃은 키도 컸고 꽃송이도 컸다. 그런 꽃들이 이렇게 작은 화분 안에 들어있는 걸 보니 꽤 귀여웠다.

“살살이꽃이나 뼈살이꽃은 꽃을 통째로 떼어다가 환부에 문지르는 게 제일 효과가 좋거든요? 피살이꽃은 꽃잎을 한 장씩 떼서 먹으면 돼요. 살살이꽃이랑 뼈살이꽃도 먹어도 되긴 하는데 이건 꽃 채로 먹어야 해요.”

“네?”

“뿌리를 뽑아서 버리지 않는 이상 꽃은 계속 필 거니까 걱정 말고요. 살살이꽃에 물이 안 닿게 조심하고……. 물 뿌릴 때도 흙에만 줘야 해요.”

“저기…….”

“뼈살이꽃은 그냥 내버려 둬도 잘 자라니까 상관없고…… 피살이꽃은 물 많이 주면 안 돼요. 얜 좀 마른 땅에서 살아야 하니까 꽃 색이 검붉은 색이 되면 그때 한 번씩 주세요. 지금처럼 예쁜 선홍색이여야 해요.”

“네, 그런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시들면 나한테 연락하고요. 즉사 정도의 부상이 아니면 요것들로 다 해결되니까요.”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한평화를 보았다. 한평화는 뿌듯하게 웃었다.

“이거 우리 가족한테밖에 안 주는데, 오빠한테 특별히 주는 거예요. 나 그 인형 진짜 가지고 싶었거든요.”

“평화가 인형 사진 보고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잤거든. 못 구한 게 억울해서. 그런데 네가 그걸 딱 보냈잖아?”

한진열이 옆에서 부연설명을 했다.

나는 화분을 보았다. 노란 꽃, 하얀 꽃, 빨간 꽃.

……어쩌다 생각나서 보낸 인형이 사기템이었잖아? 효과가 너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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