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22. 그림자 없는 탑(7)
아사달은 청룡과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걸로 비도 그치게 하고 땅도 원래대로 되돌렸다. 청룡이 없어도 잘만 말하면 되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산을 올라가는 게 제일 힘들 정도였다.
아사달은 인상이 다소 어두울 뿐 성격은 난폭하지 않다. 탑을 건들지 않았더라면 조용히 그림자를 돌려주고 다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들쑤신 놈이 있다.
“이 돌탑들을 무너뜨린 이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사달의 분노를 예상하고 출발했다. 비가 멈추고 땅이 말라도 이 가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들어도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이산래도 단숨에 대답했다. 천 년 된 신인지 귀신인지를 상대하는 데에도 전혀 떨림이 없었다. 특별수사과에서 팀장을 하려면 저 정도 담력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초능력자특별법에 의거하여 관련 사항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처벌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수명을 대가로 삼거나 불행을 일으키는 종류는 안 됩니다.”
그놈의 특별법이 만능의 단어로군.
도의적으로 문제는 되어도 법적인 판결까지 내려도 되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산신들이 독립군들을 도왔다고 하니 역사는 길다. 관련된 법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걱정 마시오. 그런 일은 아니니.”
아사달은 아직 청룡의 주위에서 넘실거리며 떠다니는 족자를 거두었다. 아사달은 부드러운 손길로 족자를 매만졌다.
“어느 승려가 써 준 글이오. 사당이 난리가 나 이 또한 없어진 줄 알았는데 무사하니 다행이군. 돌탑들을 무너뜨린 이를 시켜 이 글을 가장 큰 탑……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사달이 청룡을 향해 물었다.
“잠실 타워입니다.”
“먼저 잠실 타워에 이 글을 두도록 하시오.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길목이면 좋겠소. 따로 공간을 두지 않고 벽에 걸어 두어도 괜찮소.”
이산래는 조심스럽게 아사달이 내미는 족자를 받았다. 덕분에 아사달이 여기까지 다가와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흠. 다리가 있네.
문득 이 이야기도 드라마에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박서원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청룡이 나오는 이벤트가 아주 관련이 없진 않을 것 같고.
그럼 이산래와 이소현도 드라마 등장인물이려나?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우리나라 배우 얼굴을 다 알고 지내는 것도 아니다. 아는 얼굴보단 모르는 얼굴이 훨씬 많을 테다. 그러니 어느 부분에서는 이야기를 보고 유추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아사달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자에게는 그 탑을 기도하며 돌라 전하시오.”
“그, 기도라 하시면?”
“불가에서 자주 하는 방법이 있지 않소.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라 하시오.”
수명이나 행운을 인질로 잡힌 방법은 아니군.
“최소 하루 한 번, 기한은 탑의 그림자가 돌아올 때, 까지오.”
오히려 하고 나면 건강해지겠는데.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사실 이건 벌은 아니오. 남을 벌하는 것은 내게 알맞지 않은 일이오.”
방금 전까지 살벌하게 용서할 수 없다 하신 분이 누구셨더라?
“무엇보다 나까지 벌을 내리기엔 그자의 운이 너무 꼬여 버렸소. 그러니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다른 벌을 내리진 않을 것이오.”
“네?”
“그자가 무너뜨린 이 탑 중에는 좋지 않은 기운을 붙잡아 둔 것들이 좀 있소.”
이산래는 끙, 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심지어 액운이 가득 담긴 동전마저 가져가 버렸지.”
“…….”
이산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천천히 안경을 벗어 품속에서 꺼낸 안경 닦이로 쓱쓱 닦았다. 가슴 속의 화를 열심히 눌러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자가 살 방법을 말해 줄 뿐이오.”
아사달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자의 심성으로 보건대 이를 벌이라 여기겠지만 말이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도록 하지요.”
이산래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래서 학교에서 물건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니까……. 산에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나?”
산속에 동전을 버리거나 돌탑을 만들어 재액을 버리는 일은 종종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멋모르고 산에서 동전을 주워 왔다가 화를 입었다는 이야기도 많다. 실제로 가까이서 고모가 산에서 동전을 주웠는데 그 뒤로 고모에게 크고 작은 사고가 잇달았다고 했다. 그 동전을 다시 산에 던져 놓고 오기 전까지 말이다.
아사달의 주위를 보았다. 못해도 스무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크고 작은 돌탑들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실제로 저주가 존재하는 곳이었고 부적이 일상용품으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걸 생각하면 돌탑을 무너뜨려 저주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
“어린 이무기여.”
아사달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아직 어리다 해 주는 이는 당신뿐입니다.”
청룡이 싱긋 웃었다.
“아, 그렇군요. 이제 이리 부르면 안 되는군요.”
아사달은 몸을 돌렸다. 멀쩡히 붙어 있는 두 다리로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걸어갔다. 둥둥 떠다니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벽화에서 튀어나온 옷차림만 아니면 산 사람과 별 차이가 없다.
“앞으로 이 도시에서 지낼 생각입니까?”
“내 아내를 찾으려면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이산래가 고개를 번쩍 들어 아사달을 보았다. 한 달 야근을 선고받은 직장인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다른 방법을 써야 하겠습니다.”
이산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지만 신라 시대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사람들이 괜히 호기심에 이처럼 탑을 무너뜨리는 것보단 낫겠지요. 이곳에는 아주 큰 탑이 있으니까요.”
나는 보았다. 청룡이 슬쩍 이산래의 눈치를 보는 것을.
“원래 불탑이 아니라 하셨습니까? 아무리 봐도 기운이 탑이었는데……. 어쨌든 사람이 많은 곳에 그리 큰 탑이 있으니 앞으로는 그 탑 하나만 그림자를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이산래가 이를 꽉 물며 청룡을 보았다. 잠실 타워가 탑이 된 건 청룡의 탓이었다.
“그 글을 걸어 놓으면 그림자만 사라질 뿐이니 걱정 마십시오. 보아하니 탑 근처에 큰 호수도 있더군요.”
“하하, 뭐, 그렇지요. 호수가 그림자가 차오르면 원래대로 돌아오니 말입니다.”
이산래는 산에 내려가자마자 청룡에게 잔소리를 퍼부을 기색이었다. 지금은 아사달이 있어 참고 있는 듯했다.
나 같으면 청룡에게도 못 할 것 같은데 진짜 담력도 좋지.
아사달은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탑을 무너뜨린 다른 자들이 액운을 뒤집어쓰면 안 될 터인데.”
지난 이틀 내내 아사달이 그림자를 없앤 탑을 건들지 말라고 그렇게 방송을 했었다. 하지만 인간 중에는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족속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사달은 그런 이들마저 걱정하고 있었다.
“혹여 액운을 뒤집어쓴 이가 또 나온다면 마찬가지로 가장 큰 탑을 돌라 하시오.”
잠실 타워를 떠올렸다. 그걸 삼보일배하면서 돌라고?
처음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했을 때도 생각보다 할 만한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나 딱 열 번 절하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고 열 번 더 절하고 나면 다리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어릴 적 엄마가 방학 때 절에서 하는 캠프에 날 보내 버려서 안다. 절 입구부터 대웅전까지 삼보일배로 간 다음 난 부처님과 절대 친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탑을 무너뜨린 인간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한동안 잠실 타워 근처에 볼거리가 가득하겠군.
“예, 예에…….”
“고생을 시켜 미안하오.”
“아,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그땐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아사달은 청룡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난 지금 그 커다란 탑 근처에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석공이여.”
청룡 또한 아사달에게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살랑 불더니 아사달이 사라졌다.
비가 온 게 거짓말인 것처럼 맑은 하늘, 바싹 마른 땅,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까지.
“청룡님.”
“흐음. 날씨가 좋구나.”
이산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려가서 이야기합시다.”
“허허허.”
슬쩍 청룡을 보았다. 청룡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 * *
“에에엑?”
젊은 남자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고 자시고요.”
이산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된다고요!”
“아, 엄주용 씨. 엄주용 씨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몇 번 넘어지셨죠?”
“네?”
“아홉 번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소현이 번쩍 외쳤다.
“네, 9번 넘어지셨고요.”
“아니 그건 비 때문에 땅이 미끄러워서…….”
“혼자만 다른 세상에 계셨습니까? 서울 전체의 땅이 모두 말랐거든요?”
이산래는 흙이 잔뜩 묻은 엄주용의 등산복을 가리켰다.
“그리고 엄주용 씨, 몇 번 구르셨더라?”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다섯 번이요.”
“네, 다섯 번이요. 이걸로도 부족하신가요?”
엄주용은 산을 내려오다가 우리와 마주쳤다. 어차피 탑을 무너뜨린 인간을 찾아야 하는 거, 산에 있을 때 잡을 수 있는 편이 났다. 청룡의 도움도 살짝 있었다.
‘지금 안 잡으면 그 남자가 내일 해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청룡이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엄주용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우리와 만났을 때도 이미 반쯤 산을 구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결국 내가 보호막으로 몇 번 받쳐 주고, 이소현이 엄주용과 날아올랐다.
“오늘부터 바로 하시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고요!”
“강제하는 건 아니니까 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는데요.”
이산래는 엄주용의 억울한 목소리에도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말을 했다. 그야말로 사무적인 행동이었다.
“청룡님께서 엄주용 씨가 내일까지 살아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했거든요.”
와, 이렇게 들으니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들린다.
엄주용에게도 비슷하게 들렸는지 단번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역시 청룡의 이름발은 다르다.
“전 그냥, 인터넷에 올릴 컨텐츠가 필요했다고요!”
“올리세요. 엄주용 씨가 올리면 다들 이제 산에서 돌탑을 건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게 되겠죠.”
“아니, 그러니까 진짜 저는!”
“매일 삼보일배 하는 모습도 올리면 컨텐츠가 떨어질 일은 없겠네요.”
“저기요, 그러니까…….”
이산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표정은 건조하지만 어쩐지 즐거워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혹시 저걸로 스트레스 풀고 있는 건가.
슬쩍 옆을 보았다. 이소현은 휴대폰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모여 있던 경찰들도 대부분 해산하여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는 없었다.
반대쪽을 보았다. 청룡이 한쪽에서 이산래와 엄주용의 대화를 보고 있었다.
지금뿐이다.
“흠, 그래, 할 말이 있겠지.”
결심을 하자마자 청룡에게 들켰다.
“다른 때였으면 자네를 도와줬을지 모르겠지만…….”
청룡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계십니까?”
“모르네.”
“그럼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늙은 용의 변덕일세.”
“모르는 척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청룡은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확실하게 하지.”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자네를 도울 수 없네.”
“…….”
“여러 이유가 있지. 하지만 자네에게 말하진 않을 걸세. 그건 나의 이유니까.”
“그렇다면.”
“도와주진 못하지만…….”
주위의 시간이 잠깐 멈추었다. 아니, 반대다. 청룡과 나의 시간이 멈추었다. 이산래와 엄주용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네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지.”
회색빛으로 변한 세계에서 청룡만 온전한 모양새로 서 있었다.
“궁금한 걸 물어도 좋고, 다른 부탁을 해도 괜찮네.”
“그럼…….”
“단, 지금은 아니네.”
“……전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만.”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가 지금 그걸 묻는다면 필시 후회하게 될 걸세.”
“그럴 일은 없습니다.”
“자만하지 말게. 자네는 후회하게 될 거야.”
“…….”
“그리고 내가 답해 줄 수 있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론일 뿐이네. 그러니 무언가 묻고 싶다면 질문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걸세. 부탁도 마찬가지고.”
“저는,”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도 상관없다는 건가?‘
“······.”
청룡은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네.”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산래와 엄주용의 대화하는 소리, 그걸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 경찰관들과 이소현이 있었다.
이소현이 깔깔 웃다가 날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 오빠, 얼굴이 안 좋은데 오늘 능력 많이 썼어요?”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청룡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울렸다.
‘마음이 정해진다면 내가 있는 탑으로 찾아오게나.’
주먹을 꽉 쥐었다.
청룡의 말이 혼란을 더욱 가중했다. 청룡은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그러면 돌아가는 방법은? 왜 후회한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해진 부분이 있었으니까.
나는 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