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22. 그림자 없는 탑(6)
사내는 비에 젖어 있지 않았지만 흠뻑 젖어 있었고, 입을 열지 않았지만 말하고 있었다.
사내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움직여 청룡을 보았다.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가 입을 다물고 나서야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그 대 는]
“오래전 그대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을 때 만났던 이무기요. 지금은 용이 된 지 오래지.”
죽은 사람은 다리가 없다고 했던가?
그런 속설을 떠올리며 사내를 보았다.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너진 돌탑에 가려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사달이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길 바란다.
[무 슨 일]
“그대가 내가 자리 잡은 곳의 그림자를 없애 버렸소.”
청룡은 차분히 말했다. 우울해 보이는 사내와 갓을 쓴 노인이라. 겉으로 보기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와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이 도시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살고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대에게 경고하려고 했소.”
[그 런 가]
“그렇소. 하지만 늦었지.”
후두둑.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졌다. 저 남자가 비를 내리고 있는 건 분명했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재차 확인당했다.
[가 여 운 소 원 들]
“그대만큼이나.”
[나 의 아 내]
“그 친절한 여인만큼이나.”
요란하게 울리던 천둥소리가 멎었다. 아사달의 시선이 청룡의 뒤에 서 있던 우리에게 잠깐 닿았다. 얼음장에 몸을 담근 것처럼 등골이 쭈뼛 섰다.
아사달의 시선이 다시 청룡을 향하고 나서야 온기가 돌아왔다.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소.”
[안 다 고]
“그렇소. 나 또한 소중한 이들을 수없이 잃었소.”
[안 다 고]
“그렇소. 다시 만날 기약 없이 헤어졌소.”
[안 다 고]
“그렇소. 그대가 그림자를 빼앗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소.”
[안 다 고]
“그렇소. 그들이 나와 내 아이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아사달은 물끄러미 청룡을 보았다.
아사달은 장신구가 없는 낡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눈에 익숙한 복식은 아니다. 교과서에 실린 벽화 사진에서 봤던 옷과 비슷하다. 신라 시대의 옷. 낡았지만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아내를 찾기 위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림자를 없앤 남자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이산래가 뭐라고 했더라.
‘개미도 천 년쯤 묵으면 보통 영물이 아닐 텐데 인간의 영혼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탑을 짓기 위해 귀하게 모셔 온 석공입니다. 귀신보다는 신에 가깝죠.’
아사달은 순식간에 무너진 돌탑들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울퉁불퉁한 돌로 삐뚤빼뚤 쌓아진 돌탑이다. 가장 위층에 새끼손톱만 한 돌멩이가 올라간 작은 탑도 있었고,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가 제일 위층에 올라간 탑도 있었다.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었고 다들 높이도 달랐다.
그러나 아사달은 그 보잘것없는 탑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왜]
“이 아이들은 비를 멈추기 위해 올라왔소.”
[그 자 를]
“그래. 그 괘씸한 자가 있지. 그러나 관계없는 이들도 많지 않소. 천 년을 기다렸잖은가. 그 시간을 포기할 생각이오?”
아사달의 눈이 시꺼멓게 변했다. 신성하게까지 느껴졌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다르다. 시꺼먼 눈, 일그러진 얼굴, 멋대로 솟구치는 머리카락. 짐승이 우는 것처럼 입매가 일그러졌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아사달은 ‘신(神)’과 ‘귀(鬼)’의 경계에 서 있다.
“가지 마시오.”
[나 는]
“알지 않소. 그대가 바뀌면 이곳이 어떻게 될지.”
[나 는]
“그대는 어쭙잖은 잡귀와 다르지 않소. 천 년은 용인 나에게도 긴 시간이오. 그 세월을 그저 기다림으로 보낸 자네가 어떻게 될지는.”
[그 저 석 공]
“……그랬지.”
아사달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연이 길에서 마주치면 다시 떠올리지 못할 평범한 얼굴, 우울한 인상, 축 처진 어깨.
[그저 아내와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인데]
맞지 않던 입 모양과 목소리가 천천히 합쳐졌다. 어느 쪽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나를 기다려 준 어여쁜 내 아내.]
“이곳을 떠났을 수도 있지 않소?”
[아니오. 저곳에서도 없고, 이곳에서도 없소.]
“윤회를 거쳤을 가능성은?”
“그랬다면 저도 알았을 겁니다, 어린 이무기여.”
아사달의 목소리가 머릿속이 아닌 귀로 분명하게 들렸다.
“허, 이젠 늙은 용이 되었습니다, 석공이여.”
“처음 만났을 때는 제 허리춤에도 오지 않았던 어린 이무기였지요.”
아사달은 희미하게 웃으며 청룡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울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위험한 느낌은 없었다.
이사달은 슬며시 나를 보며 말했다.
“힘을 거두어도 괜찮소. 괜한 고생을 시켜 미안하오.”
“……네?”
아사달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흘깃 바라보았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잠깐 망설이다가 보호막을 풀었다.
아사달은 맑게 갠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이번엔 이산래를 보았다.
“미끄러져 넘어진 이는 있지만 다친 이는 없소이다. 날이 개었으니 스스로 내려올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땅이…….”
이산래는 땅이 젖어 있다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방금까지 비에 흠뻑 젖어 반쯤 늪이 되어있던 바닥이 바싹 말랐다. 비가 온 흔적도 없고, 싱그러운 풀냄새와 흙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순식간에 평화로운 산으로 되돌아갔다.
“이 모습으로 맑은 하늘 아래 나타난 건 오랜만이오. 본디 이렇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는데.”
아사달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룡이 답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석공이여. 다친 이는 없으니 말입니다.”
“……미안한 일입니다.”
아사달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최소한 표정은 그랬다.
아무런 특징 없는 평범한 얼굴을 한 채 아사달은 어지러운 주변을 정리했다. 비를 그치게 하고, 땅을 마르게 하고, 탑을 바로 세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물그릇들을 정리했다.
“이 물을 가져다주어 고맙소이다. 고생한 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 줄 수 있겠소?”
“어, 네, 물론입니다…….”
이산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럼 물그릇들은.”
“음? 아, 이것들은 괜찮소.”
무언가 전조라도 있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아사달은 눈 한 번 깜빡이는 걸로 물그릇들도 정리해 버렸다. 흙이 묻거나 깨진 채 바닥을 뒹굴던 그릇들이 단숨에 정리되었다.
정리되기만 했을까, 맑은 물이 가득 담긴 채 돌탑 아래에 놓여 있었다. 여태 폭우 때문에 어두워서 몰랐지만 날이 밝아지자 그림자가 없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청룡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인간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림자는 안 돌려줄 것 같죠?’
‘미안하다면 그만해야 하는 거 아녜요?’
‘천 년 된 불가의 귀신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청룡과 아사달은 그리운 추억 공유 시간을 가지는 모양이지만 인간들은 좀 더 현실적인 일을 생각해야 했다. 특히 특별수사과의 이산래는 슬쩍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와 이소현이야 해산하면 그대로 잊어버리면 되지만 저 사람은 뒤처리까지 신경 써야 한다. 그림자가 없어지는 현상도 그대로라면 일은 더 많아지겠지.
야근에 치여 살던 불쌍한 공무원 사촌 형이 생각났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
산을 오르며 청룡이 내게 장난질했던 게 떠올랐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으로 손색이 없었다. 나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청룡이 내게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뭐지? 조언? 놀림? 경고?
‘자네는 그 복숭아를 먹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걸세.’
내가 이곳에서 먹은 복숭아는 하나뿐이다. 새날 소속 초능력자가 아니라 직원이었을 때 받았던 선도 복숭아.
한진열도 그랬었지.
‘혹시 복숭아랑 사이 나빠?’
다시 생각해도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지만 청룡도 복숭아를 언급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어떤 의미든 내게 던져진 키워드다. 지금 일이 해결되면 그때 그 복숭아에 대해서 알아보자. 시간이 꽤 지난 일이라 찾을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의 손으로 그리 큰 탑을 만들 수 있을지는 살아 있을 적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허허, 그렇지요. 지금도 서라벌에는 그런 큰 건물은 없으니.”
아사달의 말에 청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인간의 발전이란, 정말이지.”
청룡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천 년은 그리 긴 시간인데, 인간들에겐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아사달은 청룡의 말에 긍정했다.
“그러니 석공이여, 그대가 그림자를 가져간 그 커다란 건물은 사실 탑이 아닙니다. 내가 자주 머무는 곳이라 혼동이 생긴 모양입니다.”
간신히 사고가 원래 이곳에 올라온 이유로 돌아갔다.
인간의 잘못을 책임지기 위해 인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청룡 또한 마찬가지다. 잠실 타워가 탑이 된 것이 청룡의 실수였기에 그는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두 발로 산을 올랐다.
“그곳에 삶의 터전을 둔 이들이 있지요. 석공이여, 그대가 그림자를 돌려주지 않으면 힘들어지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
“왕과 귀족들이 아닙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지요. 그런 이들을 외면하려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닙니다.”
맑은 하늘 아래에 서 있는 아사달은 겉보기에는 적어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두 다리도 멀쩡히 붙어 있다. 그러나 청룡처럼 미묘한 이질감은 있었다. 차라리 혜사나 한진열 같은 영물 쪽이 좀 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내 아내가 찾아오기에 좋은 지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사달은 한숨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한 내 아내, 그 탑은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지 않는데.”
아사달이 만들었다는 탑은 무영탑. 즉, 석가탑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불국사에 복원되지 않았지만 옛날에는 그 주위에 물이 있었다고 한다.
아니지, 이곳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아사달이 간간이 탑 그림자를 없앴으니 그 부분까지 복원되었을지도 모른다. 탑의 그림자가 비치도록.
“그대의 부인은 다른 이들의 삶까지 강탈하고픈 마음은 없을 터입니다.”
“그렇겠지요…….”
아사달이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금방 수긍했다.
“그림자는 돌려주지 않을 겁니다. 일어난 일을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곳이 삶의 터전이라니 그 부분까지는 허용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 가던 아사달이면 몰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아사달은 확실히 점잖았다. 특별수사과 연구소 지하에서 보았던 소리를 지르고 깨물기 위해 달려들던 저주 인형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은원이 확실하다는 점은 또 비슷한 것 같지만.
“하지만.”
“네?”
아사달은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청룡이 아닌 이산래를 보았다.
“이 돌탑들을 무너뜨린 이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