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22. 그림자 없는 탑(5)
산을 올라가는 길은 느렸다. 어둡기도 하고 보호막을 치고 있다고 해도 시야가 너무 안 좋았다.
그 와중에 이소현은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담력훈련 하는 기분이에요!”
이소현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으면 귀신이라 오해받는 건 저였을 것 같지만요.”
정해영도 그렇지만 저 나이 대의 여자애들은 끊임없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분명 저것도 초능력의 일종일 거다.
이소현은 나에게도 이것저것 물었다.
“와, 진짜요? 오빠 원래 새날 직원이었어요?”
“네. 왜요?”
“새날 직원이면 청룡님 인형 얻기 쉽댔는데!”
“……인형 모아요?”
“앗, 청룡님 계신데 어떻게 말해요!”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청룡님 인형 너무 귀엽지 않아요?”
“…….”
내 반응은 아무래도 좋았는지 이소현은 그저 좋다고 까르르 웃었다.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해영처럼 내 등을 때렸을 것 같다.
“일반 판매하는 것만 몇 개 샀어요. 기부도 하고 인형도 얻고. 좋잖아요?”
이소현이라도 없었으면 침묵의 산행길이 되었지 않았을까. 그 점에서는 다행이다. 능력도 본인은 자기 등급이 낮다며 별 볼 일 없다고 했지만 어마어마하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아, 맞아, 청룡님 죄송한데 뭐 좀 여쭤보아도 될까요?”
심지어 친화력이 좋은 건지 사교성이 좋은 건지, 요괴대책팀 팀장도 벌벌 떨던 청룡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옆집 할아버지한테도 저것보다는 어색하게 굴 것 같다.
“무엇이 궁금한고?”
“제가 자료조사를 날로 먹으려는 건 절대 아니구요, 과제하는 중에 궁금한 게 있어서요!”
요즘 여대생들의 친화력은 정말 모르겠다. 생긴 게 할아버지라 그냥 인간 같은가? 거의 인간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저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얼마든지 물어보려무나.”
이소현이 잔뜩 신난 게 느껴졌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위를 보았다. 제법 오른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가야할까.
올라가는 건 의외로 별문제 없지만 올라가서가 문제다. 아사달과 이야기하는 건 청룡이 한다지만, 아직도 그 되도 않는 장유유서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래 살면 다 머리가 돌아버리는 건가?
뭐…… 머리가 돌든 말든 사실 난 어떻게 여의주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대뜸 다른 세계에 대해서 물을 만큼 간이 크진 못했고, 일확천금의 꿈을 들먹이며 소원을 이루어 주는 여의주에 대한 발톱만 한 이야기라도 듣고 싶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박서원도 청룡한테 여의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것 같지만.
“청룡님 여의주는 어떻게 만드시는 건가요?”
순간 보호막을 풀 뻔했다.
이소현과 잡은 손에 땀이 차진 않았을지 걱정이다. 청룡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겠지? 자연스럽게 굴자.
“여의주 말인가?”
“한국 사람이면 다들 마음속에 여의주 하나는 품고 살잖아요. 경북지사 아빠랑 있던 일은 진짜예요? 애들은 당연히 가짜라고 하던데.”
“개천이 아비 말이냐? 사실이란다. 내 아들을 구해 주어 나도 보답을 했지.”
“와!”
이소현은 감탄했다. 속으로 열심히 이소현을 응원했다.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지 않나. 내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여기에 편승하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청룡님 아들도 있어요? 잘생겼어요?”
아니, 그거 말고.
아니지, 아들 여의주도 용의 여의주겠지? 천 년 묵은 용의 여의주보다는 어부의 그물에 걸릴 만큼 덜떨어진 새끼용의 여의주를 노리는 게 현실적일지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 보이는 법이지 않느냐. 내 눈에는 아주 어여쁜 아이란다.”
“우와……. 그럼 아드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요?”
“나이가 어려 나와 다른 곳에서 덕을 쌓고 있단다. 아직 제대로 된 용이 되지 못했거든.”
“대애바악…….”
“무슨 과길래 청룡님에 대한 과제가 있습니까?”
산을 오르는 초반에 잠깐 입을 연 것 말고는 내내 조용히 있던 이산래가 물었다.
“사학과요.”
“아……. 많이 묻고 가세요. 청룡님이 이렇게 내려와 계시는 일은 드무니까요.”
“이게 꿈이었으면 바로 일어나서 로또 살 텐데. 청룡님, 혹시 로또 번호는 점지 못 하세요?”
“가장 큰 탑을 돌며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지도 모르지.”
“그 삼보일배 말입니까?”
슬쩍 나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청룡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도 말씀하신 노력에 속하는 겁니까?”
“강한 염원은 어떤 방법으로든 대답을 들으니 말이다. 자네에게도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
……소원이라.
당연히.
“네.”
“꿈을 꾸는 이들은 많지. 하지만 모든 소원에는 대가가 있다. 해준 군도 그를 잘 기억해 두게나.”
“여의주도 그렇습니까?”
여의주. 용의 보주. 가장 진귀하고, 신비로운 힘을 가져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이지.”
“경북지사는…….”
“그 아버지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지 않나? 그 은혜에 걸맞은 요구였고, 그렇기에 나는 들어주었지. 분에 넘치는 요구였으면 거절했을 것이네. 혹은 천벌이 내려졌겠지.”
쿠르릉.
천둥과 번개가 쳤다. 하늘이 경고하는 것 같았다.
“부나방처럼 밝은 불에 홀려 달려드는 이들도 있지만, 조심하게나. 그들은 결국 불에 타 버리기 마련이니.”
청룡은 제일 앞에 서서 돌아보지 않았다. 내게는 청룡의 등만 보였지만 어쩐지 청룡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몸에 있는 털들이 삐쭉 섰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 청룡은 내게 경고하는 걸까? 아니면 조언? 속내를 들켰나? 어디서? 어떻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네.”
“…….”
“그리고 해준 군.”
“……네?”
“자네는 그 복숭아를 먹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걸세.”
영문 모를 말이었지만 듣자마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저 비늘 달린 자연재해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콜록!”
침묵은 이소현이 기침을 하면서 깨졌다.
“춥습…….”
“담력훈련 하는 기분이에요!”
이소현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으면 귀신이라 오해받는 건 저였을 것 같지만요.”
젠장.
세 걸음 앞선 곳에서 걷고 있는 청룡을 보았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지만 날 바라보던 시선이 가셨다.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라 윽박지르고 싶었다. 이곳이 내 세상이 아니라고 말해 달라 하고 싶었다.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알려 달라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청룡은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빗방울이 보호막을 치고,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이산래의 손전등이 조금 앞을 향했다.
무너진 돌탑 하나가 불빛 아래에 드러났다.
* * *
보통 등산로에 있는 돌탑은 크기가 크지 않다. 작은 돌을 쌓아 올려 사람만 하게 만든 것들도 있지만 경사가 심한 등산로 주위에 보이는 건 그렇게 크지 않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돌을 아래에 놓고, 그보다 조금 작은 돌을 그 위에 놓고, 다시 그보다 더 작은 돌을 위에 놓고…….
누군가 분명 염원하며 올렸을 돌이지만 탑이 무너지면 산속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건 돌탑이었다.
아니지, 돌탑의 흔적이었다.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지금 상황이 특수했기 때문이다.
“물그릇…….”
서울시 공무원들이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와서 만들어 놓은 물그릇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경이로웠다.
이소현이 바닥으로 내려와 손을 놓았다. 질척질척한 진흙이 발에 엉겨 붙었다.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다 챙겨 왔습니까?”
“초능력자 뒀다 뭐 합니까.”
“아…….”
“공무요청 하면 되니까요. 물건을 들 수 있는 비행 능력자 몇 명과 물 능력자만 있으면 됩니다.”
이산래는 손전등으로 돌무더기를 비춰보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여기가 시작인가 보군요.”
“도대체 왜 부쉈대요?”
“누군가 한 명은 청개구리 심보를 가지기 마련이지요.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일을 빨리 해결하려고 한 것인데…….”
다시 이소현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오래 갈 필요도 없었다. 커다란 바위 하나를 올라가자마자 등산로 옆의 완만한 경사로에 가득한 돌멩이와 깨진 물그릇들이 보였다.
콰르릉!
그리고 바로 머리 위에서 천둥이 쳤다.
“화가 많이 났습니까?”
이산래가 조심스럽게 청룡에게 물었다. 청룡은 하늘을 한 번 보고, 작은 돌탑들이 잔뜩 있었던 공터를 보더니 대답했다.
“슬퍼하고 있구나.”
의외의 말이었다.
“이 돌탑들은 불가의 뜻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염원이 담겨 있네. 그건 석공이 아내를 찾는 것과 통하는 부분이 있지.”
쿠르릉……
하늘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석공은 짓밟힌 소원들을 애도하고 있네.”
쾅!
지근거리에서 번개가 쳤다.
“분노는 그다음이지.”
“…….”
이산래는 물끄러미 산 너머를 바라봤다. 산속인 탓도 있지만 이제 주위는 거의 밤처럼 어두워졌다. 실제 시간은 아직 세 시도 안 된 훤한 낮인데도.
“해준 씨.”
“네.”
“보호막을 좀 더 크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요?”
“돌탑이 다 덮어질 정도면 좋겠는데……. 힘드시면 괜찮습니다.”
잠깐 넓이를 가늠해 보았다. 요괴 잡이면 몰라도 단순히 비를 막는 것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바로 넓힐까요?”
“네. 소현 씨는 뒤로 좀 물러나 있고요. 청룡님이 계시니 괜찮겠지만, 아사달 님께서 오시면 정중하게 행동해 주세요.”
근처에 아사달이 있나 보다. 이산래가 아사달에게 경칭을 사용하였다.
이소현은 발랄하게 굴던 건 정해영과 똑같지만 눈치는 정해영보다 좋은 모양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이산래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이산래는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긴 나무함을 꺼냈다. 옆에서 내가 물건을 꺼내는 걸 도왔다. 나무함을 묶고 있는 끈을 풀자 돌돌 말린 낡은 족자가 하나 나왔다.
“이리 주게나.”
청룡이 족자를 끝을 잡고 허공에 펄럭였다. 족자 안쪽에는 한문이 잔뜩 쓰여 있었다. 청룡이 족자를 놓았지만 족자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떠올랐다.
“이보시게. 그대가 슬피 울어 오랜 인연을 더듬어 내가 찾아왔소. 나를 기억하시오? 그땐 어린 이무기였는데.”
툭. 투툭. 툭.
보호막을 두들기는 빗방울이 요상하게 변했다.
비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내리는 것처럼, 빗줄기가 약해졌다가 세지길 반복했다.
투두둑. 툭. 툭.
“몹쓸 짓을 저지른 인간을 대신하여 다른 이들이 찾아왔소. 오랫동안 그대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였던 이의 물건을 들고 말이오.”
허공에 둥실 떠 있던 족자가 물결쳤다. 보호막 안에서 바람이 휙 불었다.
“잠깐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이산래의 손전등이 갑작스럽게 꺼졌다. 이소현이 크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큰 소리를 내진 않았다. 손전등은 금방 다시 켜졌다.
“오랜만이오.”
청룡은 인사를 건넸다.
무너진 돌탑 너머로 우울한 눈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