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22. 그림자 없는 탑(4)
“그러니까…….”
저 표정이 연기든 진심이든, 적어도 겉으로는 미안해하는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이산래는 덧붙였다.
“그리고 저 돌탑들을 무너뜨린 인간도 위에 있답니다.”
이산래는 입 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특별법을 적용해서 바로 체포할 겁니다. 신고한 분이 동영상도 찍어 주셨거든요.”
“그건 잘된 일이긴 합니다만…….”
차라리 한 번 해 본 불 속이라면 모를까 빗속 산행은 망설여졌다.
위험했던 건 산불 속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거긴 그래도 안전장치가 좀 있었다. 한평원이 따라가기도 했고 머리 위에는 물 능력자가 타고 있는 헬기가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빗속 등산은 다르다. 땅은 질퍽질퍽하고 잘못해서 미끄러지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최악의 상황은 내 보호막이 막아 주겠지만 딱 봐도 엄청난 고행길이 될 게 분명하다.
사람을 돕는 일이나 범죄자를 잡는 게 싫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내 몸 안전이 중요하지 않은가?
“역시 아무래도…….”
힘들다고 말하려는데, 이산래가 툭 내뱉었다.
“물론 해준 씨 혼자 가는 건 아니고요, 다른 초능력자도 같이 갑니다.”
“다른 초능력자요?”
“청룡님도 함께 가실 거고요.”
그럼 말이 좀 다르지.
“그림자 없는 현상은 둘째 쳐도 비라도 더 내리기 전에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요?”
“비가 그치면 어떻게든 되겠죠. 그럼 헬기를 띄워도 되니까요. 해준 씨는 중간에 돌탑이 있는 장소까지만 가면 됩니다. 비를 멈추려면 아사달과 해결을 봐야지요. 청룡님도 그것 때문에 가는 겁니다.”
거기까지 듣다 보니 생각났는데, 원래 청룡은 기상 현상을 다룰 수 있지 않던가? 그럼 굳이 올라가고 할 필요 없이 청룡이 폭우를 멈춰도 될 일이다.
그 점을 이산래에게 말했더니 이산래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 갔다. 그다지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저런 표정만큼은 잘 짓는다.
“청룡님이 아사달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며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 없다 하셨습니다.”
왜 이산래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겠다.
“죽은 사람에게도 그게……?”
“청룡님이 그렇다 하시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
“장유유서를 들먹이며 거절하셨으니 여차할 땐 나서 주시겠지요.”
그 말까지 듣고 나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산래의 말대로 여차할 때 청룡이라는 보험이 있으니 안전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청룡과 함께 가는 거라면, 어쩌면 여의주에 대해서도 슬쩍 물어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여의주가 아니더라도, 이무기나, 그래. 강철이에 대해서 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인간 모습은 잘 안 한다고 들었으니 이런 기회가 드물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원래 이렇게 비가 많이 옵니까?”
“아뇨, 경주에서는 그냥 비가 좀 오네,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보통 경주에서는 일주일도 안 돼서 돌아오거든요. 아마 이번엔 사당도 없는 데다가 탑도 크고, 잔뜩 무너진 돌탑 영향이 컸을 겁니다.”
이산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오래전부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반복되어 온 일이라 경주에서는 대책도 잘 되어 있어서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는 일은 없었다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서울 인구수가 너무 많아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원래 병신은 인구수에 비례하는 법이니까.
팟.
그때 도서관 불이 꺼졌다.
“결국 정전 되었네요…….”
도서관 안에 있던 경찰들과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다가 계속 전등이 깜빡거렸으니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날씨 때문에 평소라면 환한 시간이지만 밤처럼 어두웠다.
“언제 갈 것인가?”
“……!”
깜짝 놀랐네.
번개가 치는 사이로 갓을 쓴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계속 청룡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안 놀랐지, 아니었으면 저승사자인 줄 알고 기겁할 뻔했다.
……저승사자라고 하니 하는 말인데, 설마 이 세계관에 저승사자까지 나오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슬펐다.
“날씨를 보아하니 되도록 빨리 출발하는 것이 나을 텐데.”
“해준 씨?”
“네, 가겠습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청룡님도요. 다른 초능력자 하나가 따라갈 겁니다.”
청룡과 둘이서 가는 게 아니라 좀 아쉽지만 공무니까 어쩔 수 없다.
“무슨 초능력자입니까?”
그동안 만났던 초능력자들을 떠올렸다. 물이나 불, 신체 강화…… 하나같이 신기하고 대단한 능력이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동행시키는 걸 보면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일 텐데.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이산래가 말했다.
“비행 능력자입니다.”
과연.
납득했다.
* * *
“이소현입니다!”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여자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 인사했다. 인사가 향하는 곳은 갓을 쓴 할아버지, 청룡이다.
“우, 와아, 지, 진짜 청룡님이세요?”
“만나서 반갑네.”
이소현은 정해영과 비슷한 나이 대로 보였다. 그러니까 이쪽 말고 저쪽 정해영. 대학생쯤 되어 보였다.
“대박…. 처, 청룡님, 괘, 괜찮으시다면, 사진 찍어도 될까요?”
“물론이네.”
“헐, 저랑 찍어 주실 수도 있으세여?”
“자네가 원한다면.”
“헐, 헐, 대박, 혹시 셀카도 가능하신지……?”
나이만 비슷할 뿐만 아니라 말투나 행동도 비슷하다. 저 나이 여자애들은 다 저런가……? 나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가능하지만,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저 아이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군.”
“네? 아, 네! 죄송함다!”
청룡이 가리키는 방향을 봤다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는 이산래와 눈이 마주친 이소현은 깜짝 놀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산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나쁜 사람이 되잖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이가 보기 좋다고 했네.”
“그거 보기 좋다로 끝날 게 아니라 떠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올해도 휴가 쓰긴 글렀는데…….”
이산래는 청룡과 이소현, 나를 번갈아 보다가 끙, 신음하며 직원에게 건네받은 가방을 멨다.
“뭡니까?”
“경주 사당에 있던 물건입니다.”
“그걸 왜 팀장님이……?”
“그거야 저도 가니까요.”
이산래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팀장님은 왜?”
“담당자인 저도 가야죠. 그럼 세 분만 달랑 보낼 것 같습니까?”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딱히 준비라고 할 건 없었지만 이산래는 꼼꼼히 둘러보더니 우비를 챙겨 입었다. 나와 이소현도 주섬주섬 우비를 입었다. 청룡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걱정스런 얼굴의 직원 몇 명이 배웅하는 가운데, 우리는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비를 입고 있어도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홀딱 젖을 게 분명해서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나는 보호막부터 쳤다. 불도 아니니까 충격 때문에 보호막이 풀릴 일은 없으니 부담감은 적었다.
“우와, 완전 신기해. 이게 보호막이에요?”
“네, 뭐…….”
“이게 그렇게 드문 능력이라면서요? 제 능력은 아무래도 흔하니까, 이렇게 불려 다니는 일도 별로 없고, 다른 능력자 보는 일도 거의 없거든요. 완전 신기해. 사진 찍어도 돼요?”
여태 봤던 초능력자 중 가장 텐션이 높다. 여고생인 최나라도 발랄하긴 했지만 은근 시니컬한 면이 있었고, 이다혜도 활발하지만 약간 방향성이 다르다.
“일단 이 일부터 끝나고요.”
“앗, 네! 저 열심히 할게요!”
도서관을 나와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잘 관리된 공원이다. 사람은 없었다. 홀딱 젖은 경찰관 몇 명이 등산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기를 빌어 주자.
초입은 경사로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비 때문에 시야가 가리는 게 제일 큰일이었다. 보호막 덕분에 젖는 건 덜하지만 눅눅한 공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듯 청룡은 얄미울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비를 멈추는 건 청룡이 괴상한 이유를 들긴 했지만 그렇다 치자. 용과 귀신의 세계에서도 나이는 중요한 모양이니. 그래도 조금쯤은 예의상 도와줄 수 있지 않은가? 불쌍한 개미가 능력을 쓰며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는 걸 가엽게 여긴다면.
“이건 인간의 일이지 않은가.”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청룡이 조용히 얘기했다.
“네?”
“왜 도와주지 않냐, 억울해하는 것 같기에 말하는 거네.”
“아, 아뇨, 그게…….”
“자네들은 잘못이 없으니 억울해해도 괜찮아. 나도 이해하네. 다른 일이었으면 나도 도와주었을 테니.”
청룡은 잠깐 발을 멈추었다. 질척질척한 진흙과, 물이 쏟아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본격적으로 산이 시작되는 곳이다.
“손! 손 주세요!”
이소현이 크게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내 앞에 내밀어진 고운 손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소현이 한 번 더 재촉하고 나서야 손을 잡았다. 반대쪽 손은 이산래가 잡고 있었다.
“근데 보호막 움직일 수 있어요? 공중에도 떠요?”
“이제 와서 그 걱정을 하기엔 좀 늦은 것 같은데…….”
이산래가 중얼거렸다. 이미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보호막을 쳐 놨으니 말이다.
이산래의 중얼거림은 이소현에게도 분명 들릴 만한 크기였는데 이소현은 이산래의 말을 무시한 채 손을 흔들었다. 바람이 불 리 없는데, 산들바람이 쓱 불더니 발이 덜렁 들렸다.
이소현은 헤, 웃었다.
“저 등급은 별로 안 높은데, 접촉한 사람이랑은 같이 날 수 있거든요. 높게는 안 되지만.”
“뭔가 물속을 걷는 기분이네요.”
“그쵸? 걷기 싫을 때 둥둥 떠다니면 완전 편해요!”
이소현이 잔뜩 신나서 말했다. 이소현이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어 보호막을 움직였다. 사실 보호막을 움직이는 것보단 커다란 보호막을 연속으로 펼칠 뿐이었다. 요괴가 공격하는 게 아니니 크게 힘들진 않았다.
이소현이 날아가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고 청룡도 앞에서 느릿하게 걸었다.
“누군가는 인간의 시대라고 말하지. 맞는 말이야.”
비행에 한눈을 파느라 청룡이 방금 전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중인 걸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느릿한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또렷하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옛날처럼 무작정 인간을 돕지 않기로 했네. 특히 인간의 일일 경우에는.”
청룡은 갓을 매만지며 말했다.
“나는 이 땅의 인간을 지키기로 약속했네. 하지만 어린아이는 혼자 걷기 마련이지. 잠실의 건물을 탑으로 만든 건 내 잘못이니 도와주지만 이 비는 인간들의 잘못이네. 그러니 인간도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청룡은 빙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빗속과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청룡의 검은 두 눈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밝게 빛났다.
“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할 때가 분명히 올 걸세.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청룡은 거기까지 말하고 껄껄 웃었다.
그때,
팟.
청룡의 얼굴에 불빛이 비쳐졌다.
“되도 않는 철학은 그만 말하시고 갑시다.”
이산래는 이소현의 손을 잡지 않은 쪽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버튼을 눌러 청룡을 비췄다. 밝은 불빛이 어른거리는 데도 청룡은 눈부신 기색이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 은근히 인간이 아닌 게 티가 난다.
이산래는 손전등을 깜빡거리며 청룡의 말에 코웃음 쳤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홀로 걸었습니다. 보다 많은 걸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 삶을 농락당했어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