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22. 그림자 없는 탑(3)
날 알아보는 건가?
서천꽃밭이 피는 세계에서 청룡이 지나가던 인간을 기억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용은 저쪽에서도 상상 속의 동물이었고 잠실 타워를 감고 있을 뿐 이곳에서의 취급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늘 달린 쪽의 모습으론 인간이 개미만 해 보이겠지만 개미 마니아라면 각 개체를 구분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은 마음도 있지만 개미가 만든 탑에서 살고 있는데 자길 구경하러 온 개미 한 마리쯤은 알아볼 수 있겠지.
……헛소리도 이 정도면 병이다.
어쨌든 청룡이 날 기억한다고 해도 당황하지 말자.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잠실 타워를 찾아갔는지는 청룡도 모른다.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었다.
“하하, 서울 살면서 청룡님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잠실 타워는 청룡이 터를 잡기 전에도 유명했다. 이 부분이 그쪽과 같다면 공사 전부터 말이 많았던 곳이다. 청룡이 아니어도 관광지로 유명했으니까 내가 한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 많은 이들이 찾아왔고, 많은 이들을 보았지.”
“눈이 좋으신가 봅니다.”
“용은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보고, 이상으로 느낀다네.”
청룡은 어린아이를 어를 때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할아버지고, 실제로도 최소 천 살은 된 용이다. 어린아이가 뭐냐. 인간을 개미 취급 안 하는 것만으로 감사할 노릇이다.
인자한 얼굴로 허허 웃고 있는 걸 보니 처음 청룡을 봤을 때의 기분이 조금 잊혀졌다. 저 할아버지가 그, ‘자연재해’라는 걸 알아도 보이는 모습은 좀 건강할 뿐인 노인이니 방심하게 된다.
다시 천천히 청룡을 보았다. 머리에 쓴 갓을 제외하면 옷차림도 그럭저럭 개성 있는 할아버지라 할 수 있다. 키는 좀 작은가? 확실히 비늘 달리 모습보다는 이쪽이 훨씬 낫다. 사람 같고.
“무엇이 그리 궁금한고.”
“예? 아, 아니, 그게…….”
너무 오래 쳐다봤나 보다. 같은 인간이어도 이렇게 쳐다보면 실례다.
난 최대한 순박하게 보이길 바라며 말했다.
“청룡님뿐만이 아니라 둔갑하는 분들을 몇 분 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 잘 알지만 눈앞에서 인간으로 둔갑하는 걸 봐도 이해가 되진 않는다. 마법지팡이를 흔든다거나 유치한 뿅 소리와 함께 연기라도 났다면 심정적으로는 이해했을 것 같다. 어릴 때 봤던 만화영화 같은 데에서 항상 그렇게 변신했으니까.
그러나 곰인 혜사도 그렇고 호랑이 한진열도 아무런 전조 없이 변했다. 어디 여우에 홀리기라도 한 느낌이다.
“인간도 오랫동안 수련한다면 할 수 있네.”
“불법입니다.”
이산래가 끼어들었다. 청룡은 이산래의 말에 혀를 찼다.
“허, 이것도 불법인가?”
“가짜 돈을 만들거나 다른 사람, 동물의 모습을 변하는 건 불법입니다. 청룡님도 조심해 주세요.”
“이런 일이 아니면 내가 둔갑하는 일은 없으니 걱정 말게나. 하지만 그런 일까지 불법이라니, 거 참 재미없는 세상이 되었구나.”
“그리고 앞으로 인형도 만들지 말고요.”
이산래의 말에 청룡은 깜짝 놀랐다.
“그 인형 꽤 인기 있지 않더냐. 없애면 실망할 아이들이 많을 텐데.”
집안을 온통 청룡 굿즈로 채워 놨던 한평화가 생각났다. 저번에 이유나에게 받은 청룡 인형을 보내줬는데 딱히 답은 없었다. 인형으로 호감을 얻어 내려고 했는데 너무 속 보이는 방법이었나.
“그럼 적어도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하지요. 청룡님 공덕만 쌓이는 거면 모르겠는데, 빌딩이 탑이 될 정도면 그다지 좋지 못하니까요.”
이산래의 눈이 잠실 타워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향했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타워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자격 없는 이들이 덕을 받을까 고민하는 게냐? 걱정 말거라. 내 이름으로 쌓였고, 나 때문에 인정받은 탑이니 내가 없으면 평범한 건물일 뿐이다.”
“건물 내에 상주하는 인원이 있잖습니까.”
“마음이 어질어 스스로 노력하는 이라면 그만큼 대가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라면 아무 소용없겠지.”
청룡은 이산래에서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혹시 아느냐? 그 주위를 걸으며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질지.”
“그런 소리 다른 이들에게는 함부로 하지 마시죠. 청룡님이 하시는 말씀이니 시끄러워질 거라고요.”
청룡은 다시 이산래를 보았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할 순 없지 않으냐. 어쨌든 불가의 탑이 된 것이다. 그러니 정통적인 방법대로, 삼보일배라도 하면 작은 것이라도 이루어질지 누가 알겠느냐.”
삼보일배라면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는 그거?
청룡의 설명을 듣고 질린 눈으로 잠실 타워를 보았다. 확실히 삼보일배로 잠실 타워를 돈다면 보통 정성이 아니다.
“어쨌든 이 탑은 세상에서 가장 큰 탑이니, 나름 신통력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청룡은 잠실 타워를 보았다. 맑은 눈이 잠실 타워를 가득 담았다. 청룡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탑으로도 아내를 찾는 데 실패했을 때 그 착한 석공이 얼마나 화를 내거나 슬퍼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청룡은 경주에 있던 사당의 물건들이 정리되면 돌아오겠다며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산래와 임상규는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고 경찰들을 시켜 잠실 타워 주위로 접근 금지 스티커를 빼곡하게 쳤다.
……이때만 해도 다들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려 청룡이 직접 나섰는데, 잘못되기도 쉽지 않다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 * *
“물 사야겠네.”
냉장고 안에 남은 물이 별로 없다. 숙였던 허리를 펴며 하품을 했다.
잠실 타워에서 청룡을 만난 지 이틀이 지났다. 금방이라도 아사달을 부를 것같이 굴더니 아직 소식이 없다.
창문으로 건너편 건물을 슬쩍 봤다. 평상 위에 있는 돌탑 옆에 물이 찰랑거리는 세숫대야가 있었다.
평상 위의 돌탑에는 아직 그림자가 없다. 크기가 작으니 오늘 밤쯤이면 그림자가 모두 채워질 것이다.
더운 날씨와 어울려 그림자 없는 돌탑의 모습은 공포 영화 도입부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좀비 영화 오프닝 같기도 했다. 보통 이럴 때는 뭔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는 법인데…….
콰르릉.
말하자마자 하늘에서 굉음이 울렸다.
“뭐야?”
깜짝 놀라 창문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콰르릉… 투둑.
다시 천둥이 울렸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뭐가 번쩍한다 싶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빗방울은 곧 폭우가 되었다.
이게 평범한 기상 현상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힘의 영향인지 생각해보았다. 갑작스런 비가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 서울에서는 평소에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직…….
하늘을 보던 시선을 살짝 내려 맞은편 건물의 옥상을 보았다. 그림자가 없는 작은 돌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림자는 없는데.
드르르륵.
방 안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떨었다.
역시.
다만 늘 전화하던 임상규가 아니라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해준 씨, 저 특별수사과의 이산래입니다. 지금 보내 드리는 주소로 바로 오실 수 있으십니까?”
“네, 출발하겠습니다. 지금 비가 아사달과 관련된 것 맞습니까?”
“네. 그게…….”
수화기 너머로 이산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누가 관악산 등산로에 있는 돌탑들을 모조리 무너뜨렸습니다. 난리도 아니에요.”
* * *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마냥 비가 쏟아졌다. 그나마 바람은 불지 않아 걸어 다닐 만은 했지만 우산이 소용없는 폭우였다.
덕분에 이산래가 말한 관악산 등산로 입구 근처의 공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홀딱 젖어 있었다.
이미 경찰들이 나와 통행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폭우 속에 등산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신분증을 보여 주고 경찰을 통과했다. 비 때문에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 비는 급작스럽게 내렸다. 비가 오기 전만 해도 날씨는 좋았고, 더군다나 주말이다. 이미 산에 올라간 사람도 있을 텐데.
“해준 씨!”
우비를 쓴 이산래가 나를 알아보고 큰 소리로 불렀다.
우비를 쓴 보람도 없이 이산래 또한 흠뻑 젖어 있었다. 안경에 빗방울이 잔뜩 튄 게 안타까웠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산래는 도서관 건물로 들어갔다.
“급한 대로 양해를 구해 도서관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용객들은요?”
“경찰차 태워서 집에 보냈습니다.”
이산래는 직원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머리에 물기를 털었다. 나도 수건 한 장을 받아 대충 얼굴을 닦았다.
콰르르릉.
어찌 된 게 천둥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도서관 내의 전등이 깜빡거렸다. 번개라도 쳤는지 곧 정전이 될 것 같았다.
“아까부터 계속 이 모양입니다.”
“그럼 이게, 혹시……?”
“아사달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증거죠. 여기 도서관은 현장에서 가깝다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이렇습니다. 그래서 시민들도 별 불만 없이 돌아갔고요.”
“주말에도 고생입니다.”
“공무원이 다 그렇죠.”
하긴 내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고. 주말에도 불려 다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공무원이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놀랍게도 소속이 새날이라 기존 월급날이 되면 새날에서 꼬박꼬박 돈이 들어온다. 최저 임금에 딱 맞춘 금액이긴 한데, 단청에서 준 돈에 비하면 티가 안 나 알아차리는 게 좀 늦었다. 하긴 초능력자들은 겸업도 금지니까 이렇게 돈을 안 주면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비상근무 뛰는 초능력자들은 새날에 소속되어 있지만 일은 정부와 같이 하는 거다. 그런 만큼 정부에서 새날을 지원해주나? 일을 본격적으로 익히기도 전에 초능력을 각성해서 센터와 정부 사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등산객이 무너진 돌탑을 보고 신고를 했습니다. 왜, 등산로 주위에는 등산객들이 만들어 놓은 돌탑이 많지 않습니까? 그만큼 크기가 작으면 예외 시킬 법도 한데, 아사달은 놓치질 않거든요.”
“천 년 동안 하던 일인데 보통 집착이 아니겠죠.”
“그렇죠……. 거기도 접시든 대야든 물을 받아서 그림자가 비칠 수 있도록 해 놨는데, 누가 그걸 모조리 무너뜨린 겁니다.”
이산래는 회의실 칠판에 붙여 놓은 사진 두 장을 가리켰다.
한쪽은 수십 개의 돌탑과 그 아래에 놓인 물그릇을 찍은 사진이다. 아마 저 물그릇을 놓으러 올라간 공무원이 찍은 사진이겠지. 고생이다, 진짜.
다른 한쪽도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이다. 다만 오밀조밀 모여 있던 돌탑 대신 돌무더기가 있었고, 물그릇들도 모두 엎어져 있었다.
이산래는 욕을 하지 않기 위해 십 년 치 인내심을 끌어모은 얼굴로 말했다.
“겨우 이틀 차인데 이 모양입니다. 아사달이 비를 내릴 만도 하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고요.”
이산래는 피곤한지 안경을 벗고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어쨌든 청룡님도 곧 오실 테고, 그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주말인데 등산객들은요? 다 내려왔습니까?”
“아, 그렇잖아도 그 문제 말인데요.”
“……네?”
“날씨가 이래서 등산객들도 내려오지 못하고 있고, 헬기도 못 띄우고 있거든요. 그 전에 위치 파악부터가 안 되지만요.”
왠지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갔다. 산불 때처럼 나보고…….
“듣자 하니 해준 씨 능력은 불 속에서도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거봐라.
“그럼 이 빗속에서도 통하지 않겠습니까?”
“네?”
“아니, 꼭대기까지 올라가시라는 말은 아니고요, 그, 현장까지라도…….”
할 말이 많은데 일단 3초는 참았다. 이산래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