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58화 (58/202)

# 58

22. 그림자 없는 탑(1)

사고가 빙글빙글 돈다.

주인공을 찾아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처음 계획은 이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주인공이라 믿었던 박서원은 사실 악당이었고, 어쩌면 서울이 멸망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만약 이곳이 드라마도, 현실이 아닌 제3의 세계라면 정해영이 보았던 드라마는 뭐였을까? 아니, 드라마 작가는 뭐였을까? 드라마 작가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서 드라마를 썼을까? 아니면 계시라도 받은 걸까?

알 수 없다.

적어도 여기서는 알 방법도 없다.

지금은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기회를 봐서…….

“…….”

싱크대에서 흐르는 물이 손을 적셨다. 먹고 살려면 설거지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며칠 귀찮다고 안 했더니 컵도 없고 라면 끓여 먹을 냄비도 없다.

한 번씩 이렇게 집안일을 하면서 머리를 비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찌 되었든 악당 패밀리가 된 기념으로 케이크에 초나 붙여야겠다. 정해영이었다면 ‘내 새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며 좋아할 텐데.

여기 와서 는 건 한숨이다. 내 인생에 도움 하나 안 되는 여동생 같으니라고.

대충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손을 털었다. 부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짜증 날 정도로 눈부셨다. 아직 5월인데 날씨만큼은 여름이다.

“……?”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뭔가 위화감이 있었다. 뭐지? 딱히 이상한 점은 안 보이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노려보았다.

이 부근은 예전에도 주택가였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10년 전이 아파트 단지였다면 지금은 빌라와 원룸촌이라는 점이 다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도 그렇고,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옆 건물도 마찬가지다. 옆 건물은 층이 낮아서 창문으로 바라보면 옆 건물의 옥상이 빤히 보였다. 옥탑방과 정체 모를 장독대 몇 개. 낡은 화분과 구석에 놓인 평상.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그런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있다.

뭐지?

남의 집 훔쳐보는 기분이 살짝 들긴 하지만 집 안을 보는 것도 아니고, 옥상 정도는 괜찮겠지.

다시 찬찬히 옥상 위를 훑었다.

옥탑방. 벽돌로 뚜껑이 눌린 장독대. 흙이 담겨 있는 낡은 화분과 키 작은 나무가 심겨진 화분. 구석에 있는 평상 위에는 작은 돌로 만든 탑이 두 개 세워져 있었다. 옥탑방에 사는 사람은 뭘 기원한 걸까.

“……어.”

뭘 바라고 만든 돌탑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 이상한지는 깨달았다.

“그림자가…….”

그림자가 없다.

오전 11시. 해가 높이 뜰 시간이라 그림자가 짧지만 보여야 하는 시간이다. 애초에 그림자가 안 보이는 시간은 해가 진 뒤밖에 없다.

다른 건 다 멀쩡하게 있다. 옥탑방의 처마 아래에도 그림자가 있고, 장독대나 화분, 평상도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가 없는 건…….

평상 위에 만들어진 두 개의 돌탑이었다.

삐-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평소에 진동으로 해 두는데 저렇게 사이렌 소리를 내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물기가 남은 손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은 후 휴대폰을 잡았다.

<[소방재난본부청] 오늘 11시 서울 전역에서 그림자가 없는 현상 발생. 외출 자제, 그림자 없는 탑 발견 시 신고 바랍니다.>

이 세상은 아직 너무 어렵다.

재난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전화다.

“임 팀장님?”

요괴대책팀의 임상규다.

“네, 저번에… 수사관님이 특별히 배려해 주셔서, 네, 가능했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공무원도 아닌데 이렇게 호출을 당하면 공무원이 된 기분이다.

나라에서 돈이라도 주면 몰라.

늦잠 자느라 아침도 못 먹고 점심도 못 먹은 상태지만 어쩌겠는가.

부르면 가야지.

“네, 그럼 잠실에서 뵙겠습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어쩌면 청룡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겨울에 청룡을 보러 간 기억은 좋지 못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운이 좋으면 조언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호랑이 한진열이 복숭아를 두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건넨 것처럼.

* * *

잠실 타워 주위는 이미 통행이 제한되어 있었다. 금전적 손해니 뭐니 하면서 잠실 타워 주인이 절대 허락을 안 해 줄 것 같은데 용케 통행을 금지했다 싶었다.

초능력자 관련법이 은근 엄한 동네니 기업에서 뭐라 떠들어 대도 그냥 강행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만큼 지금 사태가 심각한 것일 수도 있고.

잠실 타워 가까이 도착하자 상황은 후자였음을 바로 깨달았다.

왜냐, 잠실 타워의 그림자가 없었으니까.

“임 팀장님.”

“해준 씨, 오셨습니까.”

임상규는 슬픈 눈으로 날 맞이했다.

한때 대한민국 가요계를 점령했던 가수도 이제는 이 시대의 슬픈 공무원이다.

“오면서 봤는데, 잠실 타워 그림자만 없더라고요. 다른 빌딩은 괜찮던데.”

인터넷으로 확인한 정보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본래 경주에서만 국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탑의 그림자만 사라지는 현상이다.

실제로 맞은편 건물 옥상의 돌탑 그림자가 사라진 걸 보았다. 하지만 그 외의 그림자는 모두 멀쩡하다. 건물도 마찬가지다.

잠실 타워의 그림자만 빼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아마 내 탓일걸세.”

임상규의 말을 가로지르며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갓을 쓴 할아버지 한 분이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머리는 새하얗고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뼈대가 옹골차 건장한 분위기의 할아버지였다. 갓을 쓰고 있지만 옷은 짙은 회색 빛깔의 양장을 입고. 어깨에는 남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다.

30도에 육박하는 5월 차림새치고는 보기만 해도 더웠지만 정작 할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어, 으, 아, 아뇨, 아닙, 아닙니다…….”

임상규는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봤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할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알겠다.

“설마하니 그게 공덕으로 인정되어 저 건물마저 탑으로 바꿔 버릴 줄이야.”

할아버지는 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묘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같이 느긋한 목소리였다.

“그 불쌍한 석공이 천 년도 넘는 시간 동안 그러고 있을 줄도 몰랐네.”

“그, 누구신지……?”

옷차림부터가 평범하지 않다. 이 더운 날에 양복에 두루마기, 갓까지 쓰고 있는 걸 보면 더위를 타지 않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좀 부럽다.

“헉, 해준 씨, 이분은…….”

임상규가 부들부들 떨었다.

뭐야. 당연히 알아봐야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인가? 대통령이라도 돼?

도서관 앞에서 만났던 의경과 한평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것보다 더한 놈이 나올까.

“처, 처, 청룡님, 이십니다.”

더한 놈이 나왔다.

“그… 네?”

물론 여기 오면서 청룡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남는 장사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 세상이 드라마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 두기로 했지만 이럴 때를 보면 역시 드라마라는 생각만 들었다. 개연성이 아주 미쳐 날뛴다.

물론 내가 등장인물이 아니니 개연성이니 뭐니 따지기도 힘들지만, 기분이란 게 있잖은가.

“동해의 용, 이목이라 하네.”

“어, 네, 어…….”

이 할아버지가 잠실 타워를 휘감고 있던 그 청룡이라고?

하긴 곰과 호랑이가 인간으로 둔갑하는 세상이다. 뱀도 둔갑했다. 용이라고 못 할 일은 없다. 그건 알지만 잠실 타워를 몇 바퀴나 감는 거대한 용이 인간이 된 모습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임상규가 내 옆구리를 쿡 찔러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계속 멍청하게 서 있었을 것이다.

“아! 정해준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청룡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멍한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청룡이란 말이지? 동대문에서 멋쟁이 할아버지로 외국 잡지에 실릴 것 같은 패션을 하고 있는 이 할아버지가?

계속 보고 있다가는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임상규를 보았다. 이쪽도 비현실적인 얼굴이긴 하지만 그동안 비상근무를 하면서 하도 보다 보니 적응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사달이 서울에 올라왔다고 하더군요.”

“아사… 달이요?”

임상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영탑 이야기 있잖습니까. 경주에서만 일어나던 일이었는데, 서울까지 어떻게, 왜 올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무영탑. 불국사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다.

이에 대한 전설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고, 소설로도 있었다.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에 관한 이야기다.

“과정은 모르겠지만.”

청룡은 천천히 말했다.

“왜 이곳에 올라왔는지는 알 것 같네만.”

“네?”

청룡은 늘 그가 휘감고 있던 마천루를 보았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지금은 그림자가 없어 그 부분만 이상하게 도려 놓은 느낌이었다. 평상 위의 작은 돌탑에서도 위화감을 느꼈는데, 거대한 빌딩이라면 어떨까. 그림자 없는 건물은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가엾은 석공은 아내를 위해 서라벌에 있는 탑 그림자를 없애곤 했지. 딱히 해가 있는 일은 아니어서 나도 내버려 두었네. 죽어서라도 아내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데, 그걸 어찌 막겠나?”

전설에 따르면 아사달이 탑을 만드는 동안 절에 여자가 드나드는 걸 금하여 아내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를 안타깝게 여긴 한 스님이 탑이 완공되거든 연못에 탑 그림자가 비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라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탑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고, 아사녀는 결국 연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으레 있는 슬픈 전설이다.

“하지만 서라벌을 나온 걸 보면 그곳에 아내가 없는 걸 깨달은 모양이군. 천 년이나 걸렸어.”

“천 년이요…….”

실감이 가지 않는 숫자다. 청룡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천 년 전에도 살아 있었을 수도 있다.

“지금의 서라벌은, 경주였지. 과거의 영광이 많이 지워졌으니. 정해준 군, 만약 자네가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봐 주는 사람이 얼마 없다면 어떻게 하겠나?”

청룡은 나를 지목했다. 주름진 얼굴에 있는 눈동자는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혜사나 한진열, 신선비 등을 만났을 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기운이다. 나를 속속들이 훑어보는 눈이다.

“……그.”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고양이 앞에 쥐가 된 기분이다.

청룡은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있는 도시에 가서 물어보지 않겠나?”

스케일이 너무 크다.

나는 다시 잠실 타워를 보았다. 한 번도 저 타워를 보면서 새하얗다는 감상을 느껴 본 적 없는데 그림자가 없으니 어쩐지 그렇게 보였다.

그때 요괴대책팀의 다른 팀원 하나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다가왔다.

“알아냈어?”

“네, 네, 팀장님.”

몸은 임상규를 향해 있지만 눈은 청룡을 향해 있다. 임상규나 저 팀원의 반응을 보건대 청룡이 이렇게 인간으로 둔갑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 일인 게 분명하다.

“경주에, 아사달을 기리는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몇 년 전 지진 때 무너졌다고 합니다.”

“무너졌다고? 복구는?”

“그게 관리하던 분이 지진 때 다치기도 했고, 나이도 많아서 가족들이 데리고 갔답니다. 급하게 확인했는데 사당은 그때 무너진 그대로랍니다.”

“그 사당 하나로 서라벌에 얌전히 있었다니, 과연 불가의 탑을 지은 이로다.”

청룡이 감탄했다. 솔직히 감탄하는 포인트를 잘 모르겠지만 인간이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아무도 달래 주는 이 없고, 아내는 나타나지 않으니 이 나라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도시로 올라온 것이 게로구나. 여느 때라면 석공을 도왔겠지만…….”

청룡은 지팡이를 짚지 않은 손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그림자 없는 잠실 타워를,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탑을 만들어 낸 잘못으로, 너희를 도와주도록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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