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57화 (57/202)

# 57

21. 드라마적 모멘트(3)

모든 이야기는 그 빌어먹을 장례식장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다 그 장소에서 있었던 일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이 드라마에서 ‘정해준’의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 * *

[정해준 : 어디로 가면 됩니까.]

[박서원 : 단청 본사로 오세요.]

“…….”

언제 봐도 단청 본사는 높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생김새다. 내가 신이었다면 재수 없다고 벼락을 내렸을 만한 디자인이다.

이곳에 오기 전 혹시나 해서 구민석에 대해서도 찾아봤다. 박서원에 백조 쌍둥이까지 데리고 특별팀을 만들었는데 구민석이라고 방심할 수 없다. 구민석도 10년 전에 가족을 잃었을 수도 있다.

초능력자들의 신변에 비해 구민석은 인터넷에 치자 정보가 잔뜩 나왔다. 출신 대학, 대학원, 가족……. 부친이 간암으로 투병 중이긴 하지만 양친 다 살아 계신다. 동생도 없는 외동이다. 최소한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 중 구민석이 10년 전과 관련 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럼 구민석은 정말 단순하게 박서원과 그 백조들을 후원할 뿐인가?

……그것도 뭐, 알게 되겠지.

“안녕하세요, 정해준 씨.”

회장실 앞에 있는 여비서가 작게 웃으며 인사했다.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정확히는 전화로 들어 본 적 있다. 나보고 신선비를 놓치라고 했던 그 목소리. 성아영.

“부회장님과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 답니다.”

고객센터 상담원 톤으로 살벌한 소리를 하던 여자는 그때 통화는 기억이 나지 않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결국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 여자가 처음 말했던 대로 일이 굴러가긴 했다.

“네?”

“아뇨.”

저 여자한테 화풀이해 봤자 정말 화풀이일 뿐이다. 어차피 돈 받고 사는 월급쟁이일 텐데 뭐 하러 내 기력만 소모하겠는가. 어차피 박서원이 시켰을 거고, 일차적으로 잘못한 건 이딴 드라마나 처 본 정해영이다.

“해준 씨, 왔나?”

푸드덕.

백조가 날갯짓하는 소리는 닭이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같다. 백조 두 마리와 인간 두 명. 날 맞이해 주는 인원이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었지?”

구민석은 커피를 홀짝이며 우아하게 말했다.

“하. 회장님은 별로 상관없잖아요?”

“회장님은 우리 아버지라니까.”

“그게 그거죠.”

“밖에서만 그 소리 하지 말게.”

구민석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박서원은 코웃음을 쳤다. 구민석보다 최소 열 살은 어려 보이는 박서원이 건방지게 굴어도 구민석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꽥!”

백조 두 마리 중 하나가 날개를 파닥파닥거렸다. 여동생이 열심히 관리해 줬는지 깃털이 보송보송했다.

박서원은 백조가 된 고등학교 동창을 복잡한 얼굴로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정해준 씨, 연락한 걸 보면 결정한 거죠?”

내가 이곳에 온 이유.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습니까.”

“정해준 씨가 너무 모른 척하잖아요.”

박서원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진짜 기억 안 났죠? 정해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좀……. 어디 부족하지 않아요?”

박서원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아주 이해를 못 할 일은 아니다. 10년 전 일이라고는 해도 그런 날 있었던 일을 기억 못 하다니. 그놈의 정치인 아들을 못 알아보거나 로열 독립운동가 가문을 못 알아본 것만큼이나 사람이 이상해 보인다.

“왜, 큰 충격을 받으면 사람이 좀 오락가락할 수도 있지.”

구민석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사람과는 안면이 없을 텐데 우리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런 정신 나간 드림팀을 만들지 않았겠지. 저 남자도 확실히 수상하다.

아니, 정정한다. 등장인물들 중에 수상하지 않은 이는 없다.

구민석은 친절하게 말했다. 이 회사는 말단 직원부터 회장까지 고객센터 톤을 가지고 있다.

“해준 씨, 혹시 상담은 받아 봤나? 요즘 세상에는 손가락질받을 일이 아냐. 우리 단청에서는 후원 초능력자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해 주고 있네. 필요하다면…….”

“회장님 안 바쁘세요? 가서 일이나 하지 그래요?”

박서원이 끼어들었다. 날 선 말에도 구민석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단청에서 후원하는 초능력자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의논하는데, 내가 모른 척할 수 있겠나?”

“그럼 방해나 하지 말고요.”

박서원은 구민석을 못마땅한 얼굴로 잠깐 노려보고는 설명했다.

“처음 했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고요. 위험등급 요괴도 잡긴 합니다.”

“꽥!”

“이제 서원 씨도 외국 활동을 좀 줄이고 국내에 있을 예정이거든.”

“꽥꽥!”

“…….”

중간중간 백조가 추임새를 넣었다.

박서원은 백조의 목을 분지르고 싶어 하는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목표는 뱀잡이에요. 뱀을 잡다 보면 산함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는 놈이 하나쯤 나오겠죠.”

“산암 아닙니까?”

“원래 이름은 산함박이에요. 이름을 부르며 인간들이 두려워하면 업을 쌓아 더 힘을 얻게 되거든요. 그래서 본명을 숨겼죠.”

“그럼 최종 목적은 산암, 그러니까 그…… 산함박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그렇죠.”

박서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

“하나 더 있어요.”

조금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말해 주는데. 연락하기 전 괜히 긴장했다. 한배를 탄 동지랍시고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건가.

아니면 아직 기억해 내지 못한 다른 기억이 있는 걸까?

“……절 그만큼 믿습니까?”

그래. 어차피 한 배를 탔다. 미심쩍은 부분은 처음부터 묻는 게 났다. 애초에 박서원도 내가 모른 척한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말을 맞춰 줬지 않은가. 생각보다 배려해 주고 있다. 같은 뱀한테 가족을 잃은 동지라고 생각해서였을지는 몰라도.

“흠?”

“뱀잡이는 몰라도 다른 부분까지 제가 협조할지는 모르잖습니까.”

“아, 뭐……. 그렇긴 한데.”

박서원은 씩 웃었다.

“아직 그 말 유효한데.”

“네?”

“정해준 씨 인생 얼마나 피곤해질지 알고 싶으면 떠들고 다녀 봐요.”

이런 씨발.

박서원은 느긋하게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리를 꼬는 꼴이 눈꼴시다.

“산함박을 죽이고.”

이번에는 백조들이 조용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묘하게 소름 끼치는 눈이었다.

“그놈의 여의주를 손에 넣는 것까지가 최종 목표에요.”

“음.”

여기 오기 전의 불길함이 마침내 구체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해서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표정이 썩어 가는 걸 아주 막지는 못했다.

정해영, 이 웬수 같은 년.

“표정이 왜 그래요?”

“제 여동생 취향이 참 뭐 같아서요.”

박서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흐음. 정해준 씨.”

“네?”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없을 테니까 상담 한번 받아 보는 게 어때요?”

“필요 없습니다.”

정해영의 ‘내 새끼’, 이 드라마의 주인공…… 이라 착각했었던, 이 드라마의 악당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제대로 할 일만 하세요. 그럼 정해준 씨가 뭐라고 생각하던지 상관 안 할 테니까요.”

* * *

정해영의 묘사와 박서원의 상황이 맞지 않을 때 이미 예상했다.

정해영은 이런 상황이 되어서까지 엿을 먹인다고.

박서원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무슨 역할일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래서 박서원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먼저 가정해봤다.

정해영은 드라마 방영일마다 ‘내 새끼’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 댔으니까 등장이 적은 것도 아니다.

일단 여기서 첫 번째.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비중이 높은 건 누구일까?

박서원의 성격이 썩 좋지 못하다거나, 인외의 것을 죽이는 데에 망설이지 않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다소 보기 드문 타입이어도 케이블이니까 아슬아슬하게 오케이다.

하지만 두 번째. 박서원의 주변에는 누가 있는가?

박서원과 연결된 등장인물은 많다. 같은 센터의 초능력자나, 과거에 분명 인연이 있는 한평원네 가족들. 그러나 박서원은 여태 혼자서 해외를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현재 시점에 연결된 등장인물은 없다.

아무리 혼자서 다 해 먹는 주인공이라고 해도 주변에 조연 하나 없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건 무리다.

그리고 세 번째. 이건 코스트 문제다.

박서원의 능력은 중력과 염력. 신선비 때 박서원이 싸우는 걸 봤다. 주인공이라면 전투신이 많을 테고, CG는 전부 돈이다.

내가 드라마 제작진이라면 주인공의 능력으로 절대 그딴 걸 설정하지 않을 거다. 돈이 너무 많이 들잖아. 제작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상기의 이유로, 박서원은 주인공이라기에는 조건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비중이 높으면서도, 주인공이 아닌 역할이 하나 있다.

주인공이 있다면 그 반대되는 역할도 있는 법.

그래.

박서원을 악역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악당이랑 대립하다가 주인공은 걔네 목표 중 하나가 여의주라는 걸 알게 되거든. 그래서 걔네보다 더 빨리 여의주를 손에 넣으려고…….’

정해영이 그랬잖아. 악당의 목표 중 하나가 여의주라고.

빌어먹을 정해영. 그래도 박서원을 좋아한 이유가 얼굴뿐은 아니라고 믿었는데 그것보다 더하다.

나쁜 남자 유행은 지난 거 아닌가? 돌아가면 그 새끼 등짝을 걷어차고 남자 보는 눈이 없다고 욕이나 퍼부어야지.

“여의주를 얻어서 뭐 하려고요?”

애초에 내 목표도 여의주다. 산함박은 이무기라고 하긴 좀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용은 아니니 그 여러 개 모아야 하는 여의주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만화에서처럼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좀 더 직접적으로 빌 만한 소원도 있다.

구민석은 모르겠지만 박서원과 저 백조 쌍둥이는 가족을 잃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 만화에서는 가족을 잃은 악당들이 움직이는 동기가 있다.

‘죽은 가족을 되살릴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뻔할까. 드라마 작가라면 좀 더 창의성을 발휘해야지.

“글쎄요.”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얘네들이랑 얘기를 해 봤는데, 일단 이무기 여의주가 어디까지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르겠고요.”

고려는 해 봤다는 소리로 들린다.

“시간을 돌리는 건 안 돼요. 정해준 씨가 그러고 싶어도 그건 참아 줘요.”

“왜요?”

“그놈이 날뛸 때 난 각성을 하기 전이거든요. 그래서 되돌아가도 그놈 못 잡아요.”

“…….”

“그래서 여동생을 되살리는 건 어떤가도 생각해 봤거든요?”

드라마 작가, 제발.

아니지, 차라리 예상이 가는 쪽이 좋다.

“그런데 죽은 건 내 여동생뿐이 아니라, 이 녀석들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정해준 씨 가족도 죽었죠. 평화 아버지도 돌아가셨고요.”

사망자가 세 자릿수. 죽은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래서 못 정했어요.”

“…….”

“하지만 여의주를 모으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나지 않을까요?”

“혹시, 이미 모은 여의주가…….”

“네, 있어요. 그동안 열심히 뱀을 잡은 이유가 뭔데요?”

씨발. 표정을 숨기는 데 실패했다.

“정해준 씨도 여의주 노리고 있었어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하하, 앞으로 열심히 해 보자고요. 여의주가 충분히 있다면 용의 여의주보다 더 큰 힘을 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박서원은 악당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막혀 있던 단서가 하나 보였다.

‘박서원이 모은 여의주와 소원 때문에 서울이 폭파한 거 아냐?’

보통 아니었으면 하는 일은 꼭 들어맞는 법이다.

악당과 한배에 탄 직후에 얻은 깨달음이 좋은 적은 없다.

“정해준 씨, 얼굴 좀 풀어요. 10년 만에 모인 사람들이잖아요? 나름 동문회인데.”

“네, 뭐. 그렇네요.”

그리고 서울 폭파와 집으로의 귀환을 두고 저울질을 한다면, 내 저울은 후자에 기운다.

박서원보고 악당이라고 뭐라 할 게 아니다.

……드라마에 들어왔으면, 좀 더 드라마적으로 생각하자. 서울의 존망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걸 막겠다고 발버둥 친다 하더라도, 결국 작가가 적어 둔 대로 흘러가지 않겠는가.

그걸 내가 막을 필요는 없다.

박서원이 여의주로 서울을 폭파시키는 범인이라면, 그 전에 여의주를 훔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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