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21. 드라마적 모멘트(2)
“다흰 언니도 고기 먹으러 왔어요?”
“응?”
“여기 고깃집이라고 했는데.”
“아, 나라는 고기 먹으러 왔니?”
“시험 끝나서 몸보신하러 왔죠.”
도대체 이 드라마의 정체는 뭘까.
공중파라고 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을 판에 이건 케이블 드라마다.
아이돌이 잔뜩 나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 배우로 몸값 비싼 배우를 쓰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단순 카메오 출연이라면 구민석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해범위 안이다.
임상규는 연기로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한평화는 이미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한평원 또한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린 지 오래다. 그런 애가 뭐가 아쉬워서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을 해?
“여기 주인분이 우리 아버지 친구분이시거든. 언니는 잠깐 심부름 왔어.”
서다흰도 아역 배우 출신으로 왕성하게 활발한 여배우다. 성인이 되고 난 뒤부터는 국내 활동보다는 해외 활동을 중심적으로 했고, 출연한 영화가 외국 영화제에서 상을 탄 이후로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그런 대단한 배우가 겨우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했다니, 말이 안 된다.
아니면 이 드라마 작가나, PD가 엄청난 인맥왕이거나.
“아저씨, 손님이 왔는데 왜 나오지도 않아요.”
“니가 손님이냐?”
백성찬은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사람을 찾았다. 걸걸한 목소리가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누가 나와도 놀라지 말자. 이 드라마는 애초에 존재부터가 잘못됐으니까.
“얼씨구, 개도 데려오고. 여기 음식점이다, 얌마.”
“손님도 없잖아요.”
“있거든?”
덩치가 큰 중년인이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 나왔다. 목소리가 들렸을 때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서다흰은 국내에서도 유명하지만 저쪽은 해외에서 더 유명한 배우다. 미국 드라마에 출연한 걸 계기로 동양인 액션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그러니까 왜 이딴 드라마에 다 출연하냐고.
“손님은 저를 말하는 거고요.”
“개소리할 거면 꺼져라.”
“애들 고기 먹이려고 왔으니까 고기 좀 주세요.”
“나한테 고기 맡겨 놨냐?”
백성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날 가리켰다.
“쟤 후원사가 단청이거든요. 돈 많아요. 비싼 고기 줘요.”
저 인간이 진짜.
“쟤가?”
남자는 묘한 눈으로 나를 봤다.
“어쨌든 애들 먹여야 하니까 밥이나 주세요.”
“허……. 그래, 네놈은 먹지 말고.”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고요, 아저씨.”
백성찬은 넉살 좋게 웃었다. 남자도 짜증을 내다 말고 픽 웃었다.
“다흰아, 너도 먹고 갈 거냐?”
최나라에게 붙잡혀 있던 서다흰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들어가 봐야 해요. 나라야, 하연아. 나중에 또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최나라는 크게 손을 흔들었고 백하연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도 눈이 마주쳐 어색하게 인사했다.
얼굴들이 아이돌이나 톱스타가 아니었다면 좀 더 마음 편하게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백성찬을 보았다.
“왜?”
“아뇨.”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걸 보면 백성찬도 등장인물이 확실하다. 등장인물이 확실한 이들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드라마 에피소드 10분 정도는 할당받았을 것 같은 불개가 있는데 아닐 리가.
“형, 저분은……?”
“재수 아저씨? 다쳐서 은퇴한 아저씨야. 돈은 모르겠고 고기는 맛있으니까 너도 자주 와라.”
“백성찬, 입 다물고 와서 음식이나 옮겨라.”
“아, 저 손님이라니까요?”
최나라와 백하연이 마당의 상 하나에 자리 잡았다. 한 명이 말을 못 해서 불편할 법도 한데 고등학생들은 휴대폰을 통한 의사소통에도 답답해하지 않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멀뚱히 서 있기도 민망해서 백성찬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지만 쫓겨나고 말았다.
“이름이 뭐? 정해준? 너 내가 손님을 부려먹을 정도로 몰상식한 놈으로 보이냐!”
“와, 난 손님 아니에요?”
“네 놈은 웬수고!”
김재수가 백성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백성찬은 얻어맞은 정강이를 들고 폴짝폴짝 뛰었다.
김재수는 나에게 다시 말했다.
“저기 가서 애들이랑 있어라.”
절뚝거리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저 다리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지 잠깐 생각했다. 김재수는 그게 도와줄 일거리를 찾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지 재차 으름장을 놓았다. 별수 있나. 주인이 왕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최나라와 백하연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갔다.
최나라가 깔깔 웃으며 무어라 맞장구치고 있었다.
“진짜? 영상까지 찍어서 줬다고?”
끄덕끄덕.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너무 웃기다. 어디까지 만들었는데?”
백하연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최나라는 휴대폰을 보더니 말했다.
“안 웃을게. 응? 보여 줘.”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 화면이 내게도 보였다.
‘너 웃으면 예인이에게 이를 거야.’
“날 그렇게 못 믿어?”
백하연은 물끄러미 최나라를 보았다. 그만하면 대답이 되었다.
“야! 진짜 너무하네! 친구를 뭐로 보고!”
결국 최나라의 생떼가 이겼다. 백하연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가방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건…….
“와…… 이게 어떻게 만들어지긴 하는구나.”
싱그러운 풀냄새가 퍼졌다. 보풀이 마구 일어나 있는 실뭉치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실뭉치는 아니었다. 아니, 실인가? 실이긴 한 건가?
백하연이 걱정한 것처럼 최나라는 그걸 보고 웃지 않았다. 나도 저게 뭔지 바로 알아차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 한 뼘 정도의 크기였지만 백하연의 뜨개질 솜씨는 별로였는지 그 몇 줄마저 삐뚤빼뚤 잘 맞지 않았다. 백하연은 얼굴을 붉혔지만 한숨만 계속 내쉴 뿐 숨기지 않았다.
“독일 사람들도 엄청 당황했을 거야. 이백 년 동안 백조 저주받은 사람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한국인 관광객이 두 명이나 저주받은 거잖아.”
그래. 백하연이 만들고 있는 건 쐐기풀 옷이었다.
백하연은 울분에 가득 찬 얼굴로 입을 움찔거렸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했다. 대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적어도 지금 백하연은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고등학생이었다.
“오빠들은 집에 있어요?”
‘?’
“그 상태면 불편할 텐데.”
백하연은 입을 열고 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시험 기간이라고 서원 오빠가 돌봐 준댔어요.’
서원 오빠? 박서원? 여기서 왜 나와?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보낸다던데.’
“그래서 오늘은 하연이도 자유라는 거죠! 밥 먹고 오락실 갈래?”
아니아니아니, 그 백조들과 박서원은 친구라고 했다. 아니, 기억을 되살려 보자. 심지어 그냥 친구도 아니었다. 그때 구민석이 뭐라고 했었지?
‘서원 씨 고등학교 동창이자 실력 있는 초능력자.’
그 백조들, 백주하와 백주연이 박서원의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던 십 년 전의 박서원을 생각했다. 그럼 나도 그 백조들과 같은 학교 출신이란 거 아냐.
……설마 그 백조 쌍둥이와도 만난 적이 있는 건 아니겠지?
* * *
백성찬과 결국 술까지 마신 다음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해가 저문 지도 오래다.
드라마 스토리에 앞서 등장인물에 대해서 먼저 파헤쳐 보기로 마음먹기야 했지만 그래도 낮처럼 예상치 못한 거물들이 툭툭 나오는 건 별로다. 최소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이제 어느 정도 주요 등장인물이 나왔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온다고 해도 그런…… 유명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에 ‘서다흰’을 검색해 보았다.
북천. 초능력자. 8급.
나오는 정보가 별로 없다.
하긴 한평원이 집안 특성상 정보가 많은 것뿐이지 보통은 사진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게 정상이다.
혹시나 싶어서 알고 있는 다른 이름들을 하나씩 검색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한 번 더 확인했다.
생각은 다시 박서원에게로 뻗어갔다. 박서원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주인공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제 와서 걔가 주인공이든 아니든 상관 없… 지는 않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사실은 내가 박서원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내 고민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긴 드라마다.
난 등장인물이 아니고.
하지만 이쯤 되면 이 명제에 대해서도 의심이 간다. 내가 정말 등장인물이 아닌가?
그도 아니라면 이곳은 ‘드라마’와 ‘현실’과는 관계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는 아닐까?
왜, 미국 만화를 보면 그런 설정이 있지 않은가. 멀티 유니버스. 즉 평행 세계 말이다.
드라마도 드라마대로 있고, 현실도 현실대로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여기는 드라마 설정이 섞인 세계일 수도 있다.’
드라마라고 해도 설명이 안 되고, 현실이라고 해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론을 생각해 볼 때지.
그리고 어느 쪽이든 서울 멸망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하고.
“뭐가 이리 복잡해.”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확 잘라 버려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면 좋을 텐데.
새로이 등장한 거물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뭣보다도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거예요? 충분하잖아요. 아니면 계속 모르는 척해 줘야 해?’
적어도 박서원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알아봤다는 소리다. 심지어 정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뭘 정하는지에 대해서는 뻔하지.
‘내가 그 새끼를 죽일 거야.’
이제 박서원과 만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배를 타야 한다. 지금까지는 좀 애매하게 굴긴 했지.
이 선택이 무얼 바꿀지는 지금 당장은 알 방법이 없다.
지금 내 속에서 들끓는 감정이 내 감정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도리가 없다.
‘내 힘이 부족하다면 악마를 불러내서라도 복수할 거야.’
기억이다.
‘서예를 눈앞에서 놓쳤어.’
이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내 감정적인 동요가 필요한 걸까. 아니면 결심? 어느 쪽이든 감정적으로 충격을 받았을 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 할머니 보내 드리는 날이었는데…….’
박서원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 손등으로 눈을 벅벅 닦더니 벌떡 일어났다.
‘야!’
그리고 누굴 불렀다.
‘하연이는?’
하연? 낮에 만났던 고등학생을 생각했다.
‘하연이, 하연이는 괜찮아. 주하가 재우고 있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제 우리만 남았, 남았어. 우리 하연이 어떡하지? 하연이 아직 한참 어린데,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잖아.’
젠장. 그래.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을 때 예상했어야 했는데.
눈을 깜빡이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방.
슬슬 박서원이 말했던 드림팀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겠다.
위험 등급 괴물을 잡는 초능력자 팀?
웃기지 마.
이거 그냥 10년 전 강철이에게 가족을 잃은 애들이 모여 있는 거잖아. 목적이야 뻔하지.
모든 것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박서원이 움직이는 동기만큼은 확실했다.
10년 전의 재앙, 강철이 산암을 죽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