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55화 (55/202)

# 55

21. 드라마적 모멘트(1)

담배.

담배 피우고 싶다.

“표정이 왜 그래?”

“개 싫어한다더니 잘 키우네요. 진로 바꿔 보는 게 어때요?”

“넌 안 그런 척 헛소리 잘하더라.”

백성찬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백성찬의 손에는 리드 줄이 잡혀 있다. 검은 털을 가진 삽사리가 헥헥 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한 달 사이에 불개는 몰라보게 바뀌었다. 털에 반질반질한 윤이 도는 건 물론이요, 날렵했던 몸에도 살이 붙어서 어쩐지 동글동글해졌다.

“왈!”

기분 탓인지 짖는 소리도 어쩐지 밝아졌다. 백성찬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강아지 간식을 꺼내 불개에게 주었다.

“알레르기 있다면서요.”

“그럼 굶겨?”

왜 이야기가 거기로 가는 걸까.

“사이 좋아 보이네요.”

“그래도 나름 영물이라 그런지 훈련시킬 필요도 없이 말을 잘 듣더라고.”

백성찬은 어쩐지 잔뜩 신이 나서 말했다.

“얘 이것도 한다?”

백성찬은 손가락으로 총 모양으로 만들어 불개를 향해 겨누었다.

“빵!”

“헥헥.”

불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바닥에 엎드렸다.

“진짜 똑똑하다니까?”

“아, 네…….”

나는 백성찬을 위해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다음 월식이나 일식 때 보내야 하는 건 알죠?”

“아, 알아. 우리 똘이 보내면 난 무슨 낙으로 사냐.”

“똘…… 뭐라고요?”

“우리 강아지 이름.”

발치에 엎드려 있는 삽사리를 보았다. 순한 생김새지만 이놈은 불여우를 한 손으로 굴리고 놀았던 사냥개다. 불과 얼음에 상처를 입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 불개의 이름이…….

“도랑이.”

“네?”

“도랑이라고 부르고 있어.”

“아깐 똘이라면서요.”

“그 이름은 내 안에 강아지 이름의 이데아 같은 거라서…….”

지난 겨울, 새날의 연수원에서 처음 보았던 백성찬은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 역시 너무 가까워도 좋지 않다.

“네……. 예쁘게 사세요…….”

알레르기가 있다니 뭐니 한 주제에 백성찬은 불개를 꽤 알뜰하게 보살피고 있었다. 가슴줄을 하고 있는 불개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다시 백성찬을 보았다. 주머니에서 자꾸 불개 간식이 나오고 있었다.

“얼마 전에 뱀 잡았다며?”

“네.”

“고생했겠네. 나는 지방 지원 간 적은 거의 없어서. 그런 이야기 들으면 신기하단 말이지.”

“지방 지원을 간 적이 없다고요?”

“불 능력자는 드문 편도 아니고, 보통 뱀 같은 게 있는 곳은 산이잖아. 산불 낼 일 있어?”

“그것도 그러네요.”

“그리고 요즘에는 나보다 또랑이가 더 인기 많다니까?”

이름은 도랑이라더니 정작 제대로 부르지도 않는다. 백성찬은 불개에게 간식 하나를 더 주었다.

“불은 안 만들어 줘요?”

백성찬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보았다.

“길거리에서 그러면 잡혀가.”

……의외로 관련 법령이 빡빡하단 말이지.

“와, 얘가 그 불개예요?”

교복을 입은 여자애 하나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불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불개 보는 거 처음이에요!”

최나라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백성찬이 깜짝 놀라 물었다.

“거기다가 평일 아냐?”

최나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끝났어요.”

“잘 봤고?”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에요.”

최나라는 까칠하게 대답했다. 고등학생에게 안부라고 물어볼 수 있는 말은 공부에 관한 얘기가 전부였지만 그 모습에 더 말을 붙이진 못했다.

최나라는 불만 어린 얼굴로 우릴 보다가 다시 불개에게 관심을 돌렸다.

“저 얘 만져 봐도 돼요?”

“어? 어…….”

“이름이 뭐예요? 설마 불개라고 부르는 거 아니죠?”

“도랑이…….”

“엑, 뭔 이름이 그래요?”

“그게 싫으면 똘이라고 불러.”

“으, 아저씨 냄새.”

“아저씨 아니거든.”

“나랑 열 살도 더 차이 나는데 아저씨죠, 뭐.”

고등학생이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최나라는 가뿐하게 백성찬의 입을 다물게 하고서 불개를 마구 쓰다듬었다. 불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나라의 냄새를 킁킁 맞더니 꼬리를 좀 더 열심히 흔들기 시작했다.

“허, 요놈 봐라. 너 불 능력자라고 알아보나 보다.”

백성찬이 기가 막힌 얼굴로 말했다.

“이름부터가 불개잖아요.”

“그렇긴 하지. 우리 여기 있는 줄 알고 온 거야?”

“음, 볼일 있어서 나오긴 했는데, 여기 있는 줄 알긴 했어요.”

“응?”

최나라는 고개를 까닥이며 휴대폰으로 불개를 찍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휴대폰 좀 보고 살고 그래요.”

“나 참…….”

“친구랑 놀러 나온 김에 근처에 있다길래 와 봤죠.”

“고3이 그래도 돼?”

“시험도 끝났는데 안 될 게 뭐 있어요?”

최나라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초능력자로 한평생 살아야 하는데 취직 걱정은 없잖아요. 수능도 경험 삼아 쳐 보려고요.”

“하……. 나도 고등학교 때 각성했어야 했는데.”

“지금 취직까지 했는데 초능력자 된 해준 오빠는 안 보여요?”

“음…….”

백성찬은 시선을 피했다. 백성찬은 할 말이 없었는지 불개에게 간식을 하나 더 던져 줬다. 불개가 왜 살이 쪘는지 알 만했다.

“근데 친구는? 놀러 왔다며?”

“살 거 있다고 잠깐 동물병원 좀 갔어요. 아, 저기 오네요.”

최나라가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는 무리를 헤치며 다가오는 여고생을 가리켰다. 최나라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아이였다.

현실에서나 드라마에서나 고등학생과는 인연이 없다. 그나마 드라마에 들어와서 알게 된 아이라고 해 봤자 최나라 정도.

그렇지만 최나라 말고도, 이 드라마에서 마주치자마자 기억해 둬야 한다고 생각한 고등학생은 한 명 더 있다.

이 얘길 왜 하냐면, 그 고등학생이 지금 걸어오고 있거든.

“얘는 백하연이고, 지금 말은 하면 안 되니까 말 시키지 마요.”

드라마 등장인물들은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 * *

신선비를 잡고 쉬는 동안 기억하고 있는 드라마 설정을 정리하면서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건 역시 박서원이란 존재다.

그 녀석이 정말 주인공일까?

요즘 같은 세상에 악당 주인공은 드문 게 아니다. 오히려 흔하다. 마냥 착해빠진 주인공보다는 적당히 약은 면이 있는 주인공이 인기가 좋다.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를 보면 그렇다. 조폭 주인공, 킬러 주인공……. 외국 영화도 그런 건 많다. 아예 대놓고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도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다. 그것도 한국 드라마. 케이블 드라마니까 공중파보다는 제약이 덜하다고는 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틀을 아주 벗어나진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정서에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걸 죽이는 주인공이 괜찮은 걸까?

정해영의 ‘내 새끼’가 박서원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정해영이 박서원을 ‘주인공’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가?

……내가 그걸 기억할 리가 없잖아. 정해영이 한 말을 다 기억하면 애초에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진작 드라마가 어떻게 굴러갈지 알고 탈출하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내 기억력은 그렇게 좋지 못하고, 박서원이 주인공인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면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다. 단순히 정해영의 말을 기억해 내고, 등장인물들을 끼워 맞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박서원의 정체가 뭐든 걔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한국 드라마에는 주인공 말고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만약 내가 드라마 작가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하연 학생.”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백하연에게 인사를 했다. 단청 회장실에서 백조 두 마리를 해탈한 얼굴로 바라보던 고등학생은 친구와 있으니 좀 더 생기 있어 보였다.

백하연은 나를 알아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든 채 입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최나라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뭐야. 하연아, 너 저 오빠랑 만난 적 있어?”

백하연이 휴대폰을 톡톡 치더니 최나라에게 내밀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손으로 쓰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방법이다.

“아, 그때? 맞아, 해준 오빠 후원사가 단청이었으니까…….”

그리고 백성찬은 내 옆구리를 찔렀다.

“뭐냐? 아는 사이?”

“저번에 단청 갔을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단청? 넌 그렇다 치고, 저 학생은 왜? 초능력자야?”

“아뇨, 아마 아닐걸요.”

“그럼?”

“내가 얘기하긴 좀 그렇고요.”

비록 듣기만 해도 가슴 아픈 사연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가족 문제 아닌가? 오빠 두 명이 백조로 변했고, 고3 여동생이 공부는커녕 쐐기풀로 옷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도 가족 이야기를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 말할 만큼 뻔뻔하진 못했다.

……여기가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좀 더 막나가도 될 것 같지만, 막상 이렇게 보고 있다 보면 그러기도 쉽지 않다. 현실에서는 어쨌든 쟤넨 교복 입고 다니는 학생이기도 하고.

“아, 얘기해도 돼?”

최나라는 백하연 옆에 찰싹 붙어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더니 친구를 대신 해 입을 열었다.

“오빠, 그 사람들 알죠?”

“누구?”

“북천의 쌍둥이요.”

“아, 그 사람들? 알지. 이름이……. 혹시 여동생?”

“네. 그 사람들이 하연이 오빠인데요, 겨울에 유럽 갔다가 저주에 걸려서 돌아왔거든요.”

“그래서 잘 안 보였구나. 지금은 괜찮고?”

“그게, 그, 저주거든요.”

백하연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고 최나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백조로 바뀌는 그거요.”

“…….”

백성찬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요즘에도 그 저주에 걸리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요.”

“말을 못 한다는 게, 혹시 그것 때문에?”

“네, 하연이가 옷 만들어야 하거든요.”

백성찬은 안쓰러운 얼굴로 백하연을 보았다. 잔뜩 지쳐 보이는 얼굴이 단순히 고3이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시험 끝났다고 했지? 밥은 먹었어? 밥 사 줄까?”

“앗, 비싼 거 불러도 돼요?”

“뭐……. 그래. 근데 이 녀석 때문에 식당에 들어가긴 힘들 것 같은데.”

백성찬이 발치에 엎드려있는 불개를 가리켰다. 최나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백성찬을 보았다.

“비싼 거 못 부르게 하려고…….”

“이 오빠를 그렇게 못 믿니? 허, 안 되겠네.”

백성찬은 혀를 끌끌 차며 일어났다. 불개도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고기 좋아하냐? 고기 먹으러 갈래?”

“네.”

“야, 넌 돈도 많은 애가 나한테 얻어먹어야겠어?”

“사 준다는데 거절하면 바보죠.”

“아이고, 그러셔요.”

백성찬은 고개를 저었다. 최나라와 백하연은 휴대폰 하나를 나눠 보며 사이좋게 걸어갔다.

드라마 작가의 시각으로 생각해 보자.

박서원이 만에 하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꽤 비중이 큰 인물인 건 분명하다.

박서원은 백조로 변한 쌍둥이 초능력자와 친구라고 했고, 그 쌍둥이 초능력자들이 소속된 센터는 북천이다. 그리고 북천에는 마찬가지로 주요 등장인물이라 추정되는 한평원이 있다. 그리고 한평원 네 가족은 박서원과 꽤 얽혀 있다.

분명 북천에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손요운도 북천이지 않은가? 냉장고 CF까지 찍은 배우를 일회용으로 쓰진 않았을 테니 손요운도 뭔가 엮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 골목 안쪽에 내가 자주 가는 고깃집이 있거든.”

“맛있어요?”

“사장이 취미로 하는 집이라서 맛있어.”

……일단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먼저 파헤쳐 보자. 앞날이 보이지 않으면 우회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뭐라도 나오긴 하겠지.

“어머, 나라와 하연이 아니니? 성찬 씨도 오랜만이네요.”

“다흰 씨 아니에요?”

봐라. 등장인물끼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백성찬은 골목 안쪽에 있는 마당이 딸린 고깃집에 우릴 데려갔다. 낡은 녹색 철문이 달린 고깃집이다. 얼핏 보면 일반 가정집 같은 느낌이다. 대문에 비스듬하게 걸린 영업 중 표지판이 아니었다면 가정집이라 여겼을 것이다.

“해준아, 여긴 북천 소속인 서다흰 씨.”

어지간한 등장인물은 이제 다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등장인물이 또 나왔다. 그것도 한때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고, 청순한 이미지로 유명한 배우의 얼굴을 하고.

“안녕하세요, 서다흰이라고 해요.”

“……정해준입니다.”

이 여자는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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