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54화 (54/202)

# 54

20. 구렁덩덩 신선비(6)

“…….”

“…….”

조용했다.

미칠 듯한 어색함 속에서 눈치를 보다가 슬쩍 보호막을 풀었다. 이제 박서원과 손요운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이고, 그새 여기까지 갔어?”

그러나 그 기묘한 대치도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면서 끝났다.

내내 보호막 안에 있던 김진우와 김지상, 이세빈은 괜찮은 상태였다. 그러나 뱀의 몸통 위에서 바쁘게 오갔던 이다혜는 손요운에 비해서 조금 깔끔할 뿐이지 흙먼지와 긁힌 상처로 엉망이었다.

“뱀은? 잡았어?”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발치를 보았다.

깔끔하게 목이 잘린 뱀이 있었다.

“예쁘게도 잘렸다.”

김진우는 혀를 내두르며 가방에서 자루를 꺼냈다.

“음……. 이거 손으로 좀 잡기 그런데, 넣어 주겠나.”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우가 자루 입구를 벌리자 뱀의 사체는 둥실 떠서 자루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인간으로 둔갑했던 뱀은…….

내 앞가림도 힘들다. 잊어버리자.

“실종자는 찾았나 모르겠군.”

김진우는 자루 입구를 꽉 묶었다. 김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하늘에 조명탄을 쏘았다. 잠깐 기다리자 위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명탄이 올라왔다. 실종자를 찾았다는 신호다.

“으, 가자! 빨리 끝내고 목욕이나 하고 싶네!”

이다혜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김진우는 끌끌 웃었다.

“등산했으니까 막걸리나 한잔하고 싶은데.”

“아니, 이걸 등산이라고 해요?”

“산 탔으니 등산이지. 아닐 게 뭐야?”

“것도 그러네…….”

이다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진우와 이다혜, 간간이 김지상이 끼어들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는 동안 손요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 세빈아, 너는?”

“저도 괜찮아요.”

손요운은 이세빈이 주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이세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요운 주위를 맴돌았다. 손요운의 분위기는 어두웠지만 이세빈은 그게 전투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주었다.

“이거라도 먹을래요?”

“아니…….”

손요운은 거절하려다 이세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세빈은 활짝 웃더니 작은 초콜릿 몇 개를 손요운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

그리고 반대편에 박서원이 있었다.

내가 원래 박서원과 아는 사이라고?

점점 더 이곳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보호막이 두 겹이 된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가 아팠다.

박서원도 10년 전에 여동생을 잃었다고 하니, 합동 장례식장에 있는 건 당연했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했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어쩌면 학교에서도 한 번쯤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한 학년 차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 새끼를 죽일 거야.’

‘나도 그 새끼를 죽여 버릴 거야.’

이건 아니다. 이건, 겨우 같은 학교를 다닐 뿐인 선후배 사이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그날 우리 사이에는 더 많은 말이 오갔다. 확신했다. 조금 더 집중하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원리인지 모르겠다. 혹시 이곳이 정말 현실일까?

이곳을 드라마라고 여기기로 했는데, 자꾸만 결심이 흔들린다.

……뭐, 지금은 생각에 잠겨 있기는 힘들다. 인기척이 들렸다.

“왔어요?”

신혜수는 반갑게 우릴 맞이했다.

“아유, 몰골 봐. 완전 엉망이네.”

“다친 데는 없고?”

이한석이 걱정스레 물었다.

“좀 굴러서 그렇지 다들 괜찮아. 실종자는?”

“정신을 잃었을 뿐이지 여기도 괜찮아요.”

“최규원이는?”

“손에 땀 찼다며 짜증 내고 있지, 뭐. 아주 투덜이라니까. 귀찮아 죽겠어.”

“아, 거 다 들려!”

구조팀의 핵심 멤버인 최규원이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형광색이 돋보이는 등산복을 입고 있지만 짧게 자른 머리는 군인처럼 보였다.

신체에 닿은 이들의 인기척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최규원의 능력은 이런 구출팀에 특화되어 있다. 보통은 정부 요인 경호에 힘쓴다고 했다. 머리도 그 탓이다.

최규원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빨리 끝났네.”

“음, 오랜만에 보호 능력자와 일하니까 괜찮더라고. 보조 인력들이 안전하니까, 공격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나도 능력 쓰기 편하더라고.”

김진우가 답하자 신혜수가 감탄했다.

“그래요? 나는 전투에 끼는 일은 없으니까 잘 모르는데 해준 씨 능력 정말 좋은가 보네.”

얼굴에 금칠해 주는데 뭐라 반응할 수가 없어 그저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이제 그냥 집으로 가서 쉬고 싶다. 드라마고 뭐고 간에, 침대에 누워 기억을 되새겨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 좀 알고 싶었다.

“실종자는 어디 있습니까?”

“아, 요운 씨 소방관이었지? 동굴 안에 있어. 입구 쪽으로 옮겨 놓기만 했거든. 그냥 정신을 잃은 것 같긴 하던데.”

“제가 좀 보겠습니다.”

냉장고 CF를 찍은 단정한 스타일의 남자배우. 캐릭터적으로 생각해 볼까. 오늘 처음 봤고, 대화는 몇 번 해 보지 않았다. 그래도 알 수 있는 사실은 몇 개 있다.

소방관 출신의 반듯한 모범생 같은 성격.

배우도 그렇고 드라마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실종자들은 괜찮아 보입니다.”

“그래? 그럼 슬슬 출발할까.”

전직 소방관께서는 실종자들의 상태가 기절이라 판단하셨다. 여기는 헬리콥터도 오기 힘들어서 아까 이한석이 나무를 밀어 버렸던 장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최규원과 손요운이 한 명씩 업었다.

“이 정도까지는 서비스해 줄게요.”

박서원은 능력을 사용했다. 이다혜는 여전히 싫어했다.

“이거 진짜 싫어!”

“능력이 가속인 사람이 그런 말 하는 거 웃기지 않아요?”

박서원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움직이다가 갑자기 발판이 없어지는 기분이라고. 난 그런 거 진짜 싫어.”

“어차피 전투 중도 아니잖아요. 뭘 까다롭게.”

“씨이발……. 너 진짜 성격 나쁜 거 알지?”

“나 정도면 양호한데요.”

“비교군은?”

“여우?”

“여우는 무슨.”

이다혜는 코웃음을 쳤다.

이다혜는 싫어하지만 신기한 경험이긴 했다. 김지상은 약해진 중력이 재밌었는지 발을 통통 굴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괜히 무중력 훈련을 박서원에게 도와 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먼저 민간인부터요!”

산을 내려가는 헬리콥터 안에서 두 등산객은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고, 흙투성이의 초능력자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은 나타난 요괴를 처리하기만 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피해자가 엮이는 일은 없었다.

감사 인사라.

가슴 안쪽이 따뜻해지는 만큼 목이 멨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저쪽 세상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곧바로 올라가실 겁니까?”

임상규가 반갑게 맞이했다.

“거, 서울팀장님. 이 사람들 밥은 좀 먹이고 가쇼. 급한 일 있습니까?”

“네? 아, 아뇨.”

“그럼 서울팀 우리랑 밥이나 한 끼 먹고 가지. 다들 고생했다고.”

이한석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 난리가 났는데 연 식당이 있겠어요?”

신혜수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말하자 이한석은 호언장담했다.

“아, 장사하는 사람들 얕보지 마.”

주차장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자 이한석의 말대로 연 식당이 있었다. 닭백숙 집이다.

“전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나도!”

손요운과 이다혜가 화장실로 사라졌다.

나는 흘끔 박서원을 보았다.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성격으로 보이는데 이한석의 권유를 거절하진 않았다. 박서원은 휴대폰을 톡톡 두드리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정해준 씨.”

“네?”

“나 보름 정도는 한국에 있을 거니까, 어떻게 할지 정했으면 연락해요.”

“……네.”

열아홉,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10년 만에 저렇게 되었다.

하긴 박서원의 10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보다는 ‘이곳’의 정해준의 10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가 더 중요하다.

머리가 아파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불길함은 아직 가시지 않는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 있다.

“자, 식사들 합시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백숙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먹고 생각하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잘 먹겠습니다.”

신선비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 * *

경북에서 돌아오고 침대에 누워 숨만 쉰 지 이틀.

임상규가 배려를 해 준 건지, 아니면 정말 일이 없던 건지 비상근무로 불려가는 일은 없었다. 숨쉬기 좋은 날이 이어졌다.

장례식장의 기억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여태 이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던 상황을 보면 계기가 필요했다. 혼자 이렇게 방구석에 박혀 있어 봤자 계기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딱히 나가고 싶진 않고.’

다시 숨을 쉬었다.

휴대폰을 들어서 지난 이틀 동안 정리한 문서를 보았다. 문서라고 해도 별건 없고, 그동안 알아낸 점과 정해영이 드라마에 대해 지껄였던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정리를 하니 효과는 있었다. 의아한 점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자, 정해영은 주로 ‘내 새끼’에 대해 떠들었다. 할 일이 없어 가끔 심심할 때는 정해영이 ‘내 새끼’에 발광하는 걸 구경하며 추임새를 넣어 주곤 했다. 이런 기억까지 선명한데 ‘현실’이 거짓일 리가 없다.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 드라마는 네 새끼가 짱 먹는 내용이냐?’

‘내 새끼는 이미 최고거든!’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니까 이건 맞는 말이다.

‘내 새끼는 완벽해!’

‘네 새끼가 완벽하면 드라마가 무슨 재미야? 적당히 시련도 있고 그래야 재밌지.’

‘내 새끼의 존재 자체가 시련이니까 괜찮아. 모든 등장인물이 내 새끼 볼 때마다 숨넘어간다고.’

‘그 드라마 사실 장르가 코미디였냐?’

여기서부터 좀 이상해진다.

정해영과 드라마에 나오는 소원을 들어주는 여의주 이야기를 할 때 줄거리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있다.

‘원래 주인공은 그렇게 강하진 않았는데, 이런저런 시련을 거쳐서 강해졌어. 그리고 영웅이 되는 거지.’

‘어디서 들어 본 이야긴데.’

‘아, 요즘 나오는 영화 중에 아닌 걸 말해 봐! 어쨌든 나름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여기서 딱! 하고 악당이 나타나는 거지.’

‘어디서 들어 봤다니까.’

‘아닌 이야기 찾아오라고! 악당이랑 대립하다가 주인공은 걔네 목표 중 하나가 여의주라는 걸 알게 되거든. 그래서 걔네보다 더 빨리 여의주를 손에 넣으려고…….’

‘진짜 어디서 들어 본 이야기다.’

‘시끄러워! 여하튼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싸우다가…….’

좀 더 잘 들어 둘걸.

어쨌든 이상했다.

물론 박서원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최강의 초능력자인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박서원은 꽤 이른 시기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건 인터넷 기사로 남아 있으니까 확실하다.

그럼 정해영의 말과 묘하게 틀어진다. ‘내 새끼’를 물고 빠는 정해영이라면 박서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과장해서 떠들어댔을 거다. 드라마에서 박서원이 별 볼 일 없던 초능력자 시기가 나왔다면 분명,

‘아, 내 새끼는 어떻게 약해도 귀엽지? 역시 내가 먹여 살려야겠다!’

라고 지랄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해영의 말 속에서 ‘내 새끼’는 항상 완벽했다.

‘잘생기고, 강하고,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지?’

‘키는 작잖아.’

‘나보다 크니까 괜찮아!’

‘지랄한다, 진짜…….’

‘봐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포스가 달랐다니까? 캬, 다들 부상 각오하고 괴물한테 덤비려고 했는데 그때 내 새끼가 툭 나타나서는…….’

봐라. 이상하잖아.

첫 등장이 그렇다면 처음엔 약했지만 점차 강해지는 주인공의 서사는 어디 갔냐는 말이다.

신선비 사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느껴지는 불길함에 대해 떠올렸다.

정해영의 말을 정리하고 나니 그 불길함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즉,

‘박서원이 정말 주인공일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에 대해 고찰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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