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20. 구렁덩덩 신선비(3)
박서원이 걸어오는 모습이 실제 드라마에서 어떻게 연출되었을지, 너무나도 쉽게 연상되었다.
뭐, 그런 거지.
쨍한 햇빛 아래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을 둘러싼 양복 차림의 공무원들. 그리고 주인공이 이쪽을 보는 순간 화면이 멈추고 OST가 흘러나오는.
물론 실제로 시간이 멈추진 않았다.
“허, 지가 아주 주인공이지…….”
김진우가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박서원을 봤다. 그래, 주인공이긴 하다. 가벼운 옷차림에, 붉은 술이 흔들리는 검을 들고 있는 박서원은 꽤 아니꼬운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서원 씨.”
손요운은 박서원을 향해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박서원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과 손요운의 얼굴을 보더니 픽 웃었다. 손은 잡지 않은 채였다.
“오랜만입니다?”
오, 쟤는 도대체 뭐가 문제라서 저러냐. 역시 정해영이 좋아하는 남자는 다르다. 정해영의 인성만큼이나 파탄 나 있다.
박서원은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다 아는 얼굴인데, 아, 처음 보는 얼굴이 하나 있긴 하네.”
박서원은 김지상을 가리켰다.
“내 조카입니다.”
김진우가 대신 말했다.
“김진우 씨 조카요? 그럼 같은 능력?”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원은 감탄했다.
“그럼 옷 좀 더 껴입고 올 걸 그랬네요.”
박서원이 훨씬 어린데도 박서원이 등장하자 다들 긴장하기 시작했다.
박서원과 함께 요괴를 잡아 본 적은 없다. 제주도에서 겨울잠 자던 곰을 잡으러 간 것도 사실 장규혁이 얼굴로 다 해결했다.
그 뒤로는 가끔 뉴스에서 박서원이 어디의 괴물을 잡았다, 하는 걸 듣는 게 전부였고.
그 전을 생각하면 오두귀였나, 머리 다섯 개 달린 놈을 박서원이 잡긴 했다.
그나마 박서원은 초능력자 중에서 영상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제대로 보이는 건 몇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하나같이 혼자서 잡는 영상이라 왜 다른 사람들이 긴장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 그럼 김진우 씨와…….”
박서원의 눈이 김지상을 향했다. 김지상은 화들짝 놀라더니 자기소개를 하려고 입을 달싹였다.
“그 조카분은 뱀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만큼 기온 낮춰 주시고요.”
박서원의 눈은 좀 더 뒤를 향했다.
“이한석 씨는 주변 정리하고요. 많이 해 봤죠?”
이한석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원의 눈은 그도 지나쳤다.
“나머지 너울 분들은 구조팀이죠?”
“……네.”
김지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대답했다.
“손요운 씨나…… 이다혜 씨, 이세빈 씨도 나와 일 해 봤죠? 알아서 잘 피하세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좀…….”
이다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등급도 높은 사람들이 뭘 아쉬워해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내 말은, 같이 일하는 처지에 배려도 좀 하고 그러라는 소리라고.”
박서원은 이다혜의 말을 듣고 픽 웃었다.
“충분히 배려하고 있으니까 더 많은 걸 요구하지는 마요.”
박서원은 시계를 보고 말했다.
아니, 선언했다.
“15분 뒤에 출발합니다. 마지막으로 다 확인하세요.”
그리고 박서원은 날 보고 말했다.
“정해준 씨는 잠깐 나랑 얘기 좀 하고요.”
* * *
“이야기는 들었죠?”
선택지는 두 개다.
첫 번째, 신선비를 놓친다.
두 번째, 신선비를 잡는다.
내가 드라마를 빠져나가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 다 쓰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영문도 모르고 끌려다니고 싶진 않다.
신선비를 잡는 내용이 드라마 스토리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쪽이 내게 득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내가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박서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봤다.
“안 하면 안 하는 거죠.”
“……죽일 겁니까?”
“내가 왜 정해준 씨를 죽여요?”
박서원은 코웃음 쳤다.
“사람 모습 한 건 많이 죽여 봤지만 그래도 사람은 안 죽입니다.”
“…….”
“대신 사는 게 어디까지 고달파질 수 있는지 알게 될 거예요.”
“…….”
죽인다는 말보다 이게 더 무섭다.
“단청은 상관 안 한다던데요.”
“단청은 안 해요. 그런데 난 아는 사람이 많거든요. 단청이 아니어도 정해준 씨 인생 피곤하게 할 만큼은 돼요.”
박서원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는 건가? 여태 내가 대한민국 초능력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건 초능력자라는 건 준공무원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라에서 부르면 가고, 아니면 대기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제가 놓치면 뭘 어쩔 겁니까?”
“어쩌긴요. 잡아야죠.”
“그럼 굳이 놓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잡으면 되잖아요.”
“하하, 뱀이잖아요.”
“그래서요?”
“정해준 씨는 뱀 본 적 없어요?”
“네?”
박서원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뱀 본 적 없냐고요.”
동물원에서 본 적은 있다. 하지만 박서원이 그걸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 뱀한테 볼일이 있어요.”
“……왜요?”
“별건 아니고, 좀 물어볼 게 있거든. 일부러 놓치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하면, 남들 눈만 피하면 돼요. 다른 사람이 없으면 신선비 그대로 잡고 있어요.”
“그게 더 수상한 거 압니까.”
“정해준 씨는 보고 있어도 된다니까요?”
“전형적인 공범 만드는 수법이잖아요.”
박서원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럼 그렇게 아시고, 시간 됐으니까 출발하죠.”
15분은 별 소득 없이 지났다.
“자, 출발합시다!”
초능력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도 산길을 타는 건 두 발로 직접 해야 했다.
“이쪽이요.”
앞장서서 초능력자들을 이끌고 있는 이는 너울팀 유일의 여성 초능력자, 신혜수.
“이쪽.”
신혜수의 손에는 실종된 등산객의 가족들이 건네준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이쪽으로요.”
신혜수는 자신의 능력을 개코라고 소개했다. 소지품을 이용해서 그 물건의 주인을 찾는 능력. 보통은 경찰과 협조해서 실종자와 수배자를 찾는 일을 주로 한다고 말했다.
“이제 숲으로 들어갑니다. 다들 발밑 조심하고.”
등산로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산세가 험해졌다. 다소 살집이 있는 김진우는 벌써부터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방향을 알기 어려운 숲 속에서도 신혜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들 말없이 걸어갔다.
중간중간 체력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쉬었다가, 다시 걷길 몇 차례. 신혜수가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가까워요.”
“얼마나?”
김진우가 헉헉거리며 물었다.
“위로 1km 정도.”
“아이고, 대다. 위로 1km면 아직 멀었구만.”
“내가 아는 건 뱀이 아니라 실종자니까 그렇지. 뱀이 어디 있을 줄 알고?”
김진우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신선비니까 어지간해선 납치한 사람들이랑 같이 있겠지. 엄마랑 딸이랬나?”
“왜 둘이나 데려갔는지 모르겠다. 보통은 한 명이잖아.”
“색시 맞이를 납치로 하는 뱀의 마음을 알아서 뭐 해.”
김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요운이 쓰게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여기서부터 신선비 영역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죠. 구출팀은 뒤로 가고요. 제가 먼저 움직일게요. 세빈아, 보기 시작해.”
“네, 오빠.”
손요운과 이다혜가 앞으로, 그 뒤에 박서원이 섰다. 나는 이세빈과 나란히 서서 보조를 맞추었다.
날씨가 더워져서인지 벌레가 날아다닌다. 기묘한 고요함이다.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국립공원 안쪽.
“……실종자들이 움직였어요. 왼쪽으로.”
하늘색 가디건을 손에 쥔 신혜수가 말했다. 경로를 조금씩 수정했다. 계속 능력을 쓰느라 피곤했는지 이세빈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렸다.
“아, 위!”
그 순간, 이세빈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 위로 보호막을 펼쳤다. 속이 뒤집어지는 충격과 함께, 노란 눈을 한 거대한 뱀이 입을 쩍 벌리며 보호막을 물었다.
* * *
구렁덩덩 신선비는 21세기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전래동화 중 하나였다.
구렁덩덩 신선비는 구렁이와 결혼한 여자의 이야기다. 첫날밤, 구렁이는 인간이 되었고 여자는 인간이 된 구렁이 남편과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구렁이 남편은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고, 여자의 언니들은 동생을 질투하며 남편이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던 허물을 몰래 태워 버린다. 허물이 태워졌음을 안 구렁이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고 여자는 남편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 전래동화의 결말은 시련을 극복하여 남편을 되찾은 여자가 다시 잘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현대인의 입장으로는 태클 걸고 싶은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애초에 왜 뱀과 결혼하느냔 말이다. 뱀이 뭐가 좋다고? 돈이라도 많았나?
전래동화에서 신선비는 딱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지만, ‘요괴’ 신선비는 조금 다르다.
신선비는 인간을 납치한다. 그것도 주로 여자를 납치한다. 이야기 때문인지 신선비에게 납치당한 여자를 색시라고 부르긴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까지 낭만적이지 않다. 신선비는 ‘요괴’이기 때문이다.
신선비는 납치한 여자를 바로 죽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살려 두는 것도 아니다. 인간 기준의 색시와 뱀 기준의 색시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으니까.
뱀이 무얼 원하든 결국 납치당한 이들은 죽는다. 뱀이 그들의 생기를 빨아먹기 전 구해 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색시를 훔쳐 가려는 인간들에게 신선비는 대단히 화를 냈다.
“잠깐만 버텨요!”
손요운은 다급하게 김진우와 김지상을 돌아봤다.
“시작해요!”
“안 그래도 시작했어!”
등 뒤에서부터 시린 바람이 불었다. 팔에 닭살이 돋았다.
나뭇잎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뱀을 굼뜨게 하기 위해 삼촌과 조카가 주변의 온도를 낮춘 것이다.
보호막에 부딪히는 뱀의 움직임을 체크하던 박서원이 크게 외쳤다.
“이제 풀어요!”
손요운이 뒤를 이어 고함쳤다.
“보호막 풀리자마자 구출팀은 바로 움직이세요!”
“정해준! 풀어!”
박서원의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와 함께 신선비가 다시 몸을 부딪쳐 왔다. 보호막을 풀지 않으려고 해도 그 충격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캬아아악!”
신선비가 괴상한 소리를 들며 달려들었다. 뒤에 서 있던 구출팀이 움직였고, 이세빈이 급하게 ‘꼬리!’라고 외쳤다.
이다혜는 김진우와 김지상을 덮치는 꼬리를 쳐 냈고, 그 여파가 나한테 몰아치자 손요운이 내 머리를 눌렸다.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 위를 검 하나가 스쳐 날아갔다.
“캬악!”
박서원의 검이 신선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 뒤로 몇 개의 검이 더 움직였다.
“젠장, 이래서 산속이 별로야.”
우거진 나무가 시야를 방해했다. 박서원은 신경질을 내며 앞으로 움직이며 손을 움직였다. 박서원의 발밑에 있는 돌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 씨발!”
좁은 공간에서 여러 명이 뒤엉켰다. 신선비는 머리만 해도 성인 두세 명을 합쳐 놓은 크기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다들 조심!”
그리고 그 난장판 속에 이한석이 움직였다.
출발하기 전 들었던 말이 퍼뜩 생각나 나는 근처에 있는 이세빈을 붙잡아 내 쪽으로 당겼다. 김진우와 김지상을 내 쪽으로 확 떠민 이다혜는 빠른 속도로 신선비의 꼬리 위로 뛰어올랐다. 구출팀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쾅!!!
“나도 빠집니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주변의 나무가 쓰러졌다. 이한석의 초능력을 제대로 맞았는지 쓰러진 나무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신선비가 사납게 울었다.
이한석의 능력으로 전방의 나무가 전부 쓰러지면서 신선비의 모습이 완벽하게 드러났다. 짙은 녹색을 띠는 비늘이 불길하게 번쩍거렸다.
신선비는 쉭쉭 거리며 꼬리를 내려쳤지만, 꼬리가 보호막에 닿기 전 손요운이 그 꼬리를 붙잡았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그 모습도 비현실적이었다. 손요운의 능력이 뭐였더라? 육체 강화?
“아, 씨발! 중력! 제발!”
“알아서 피하라니까?”
뱀의 몸통에 올라타고 있던 이다혜가 욕설을 내뱉었고, 박서원은 무시했다. 붉은 술이 달린 검이 뱀의 머리를 상대하고 있다.
“오빠, 왼쪽!”
보호막 안에서 이세빈이 손요운을 위해 미래를 보았다. 손요운이 충분히 막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보호막에 와 닿는 충격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차분히 신선비를 볼 수 있었다.
짙은 갈색이 섞인 어두운 녹색 비늘. 샛노란 눈. 도로를 기어가는 검은 뱀과는 닮은 구석도 없었지만 손이 덜덜 떨렸다.
뱀.
뱀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그때 내가 어디 있었더라? 학교 자습을 째고 PC방에 갔던가? 도서관에 갔던가?
도로를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생각난다.
‘강철이가 나타났대!’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을 때, 저 멀리 거대한 구렁이와 무너지는 건물을 보았다.
우리 집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 이 기억은.
“크윽!”
신선비의 꼬리를 붙잡은 채로 손요운이 보호막에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정신이 들었다. 머리 쪽의 전투가 격렬할수록 꼬리도 사납게 움직였다. 손요운이 꼬리를 맞고 땅에 처박혔다.
“해준 씨, 위! 위요! 위!”
이세빈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손을 쭉 뻗었다.
이미 펼쳐져 있는 보호막 안으로 한 겹의 막이 더 생겼다.
콰앙!!!
신선비의 꼬리가 보호막을 친 건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