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50화 (50/202)

# 50

20. 구렁덩덩 신선비(2)

‘자세한 건 현장에서 박서원 씨가 말해 주실 겁니다.’

성아영은 고객센터 직원처럼 친절하게 말했다.

‘……이거 안 하면 불이익이 온다거나 그런 거 아닙니까.’

‘저희 단청은 후원하는 초능력자가 계약사항을 지키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계약 외의 사항에 관해서는 초능력자 본인의 판단에 맡기고 있습니다. 초능력자들 간의 다툼도 포함해서요.’

박서원이 날 죽이겠다는 말이냐.

실제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협박인 건 확실하다.

‘그럼 해준 씨가 이해하셨을 거라 생각하고,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지금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성아영은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말을 하더니 여전히 친절한 목소리로 마지막 멘트를 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 *

너울의 초능력자들은 넉살 좋게 날 맞이했다.

그중 젊은 사람은 한 명뿐이다.

“아, 보호 능력자? 삼촌이 젊었을 적 같이 일한 적이 있다고 맨날 자랑했는데. 이제 자랑 못 하게 생겼네.”

청재킷을 입은 더벅머리 청년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김지상입니다.”

“정해준이라 합니다.”

천막 아래에 모여 있는 너울의 초능력자는 다섯. 서울지원팀이 있다고는 해도 생각보다 적은 숫자다.

산불이 났을 때 모였던 초능력자만 해도 이것보다는 많았다.

“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이다혜가 의아했는지 물었다.

“이게 전부인가 해서요.”

“동생은 지원은 처음이지? 보호막 치던 타이밍이 워낙 좋아서 초보라는 생각이 잘 안 든다니까.”

“좋게 봐 줘서 고맙긴 한데요…….”

이다혜와 합을 맞춘 건 한 번뿐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한 사이가 된 건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신선비가 엄청 커다란 놈도 아니고, 괜히 사람 많이 불렀다가 동선 꼬이면 치명적이야. 여긴 산이잖아.”

이다혜를 뒤이어 너울 사람들도 한마디씩 던졌다.

“그리고 초능력끼리의 궁합도 생각해야지요. 불과 물을 같이 써 봤자 수증기만 피어오를 테니까.”

“이번에는 등산객이 실종되어서 구출팀도 짜야 하니 마지막에 급하게 명단이 바뀌기도 했지.”

“그럼 안 좋은 거 아닙니까?”

너울 사람들은 멀뚱히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너울의 초능력자, 이한석이 말했다.

“뱀이니까 박서원이가 오잖아. 솔직히 그 박서원만 있어도 알아서 잘 잡을 텐데.”

“공무원 아저씨는 박서원이 올지 안 올지 모른다고 했잖아요?”

김지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거야 공무원이 뱀이라서 박서원이 눈 돌아가서 달려올 겁니다, 라고 말하냐? 지상아, 너도 이렇게 불려 온 건 처음이지?”

“네.”

“뱀 잡을 때와 다른 거 잡을 때와 분위기가 180도 달라. 지금은 실종된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지 그게 아니었으면 인원도 절반은 줄었을 거다.”

“여기서 절반이 더 준다고요?”

김지상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울지원팀까지 합치면 몇 명이지? 열 명이던가?”

“사실 서울 말고는 초능력자 수가 적긴 하니까 박서원이 오는 쪽이 일하긴 편해요.”

“편하다니. 혜수 씨, 진심이야?”

너울 신혜수의 말에 몇몇 초능력자들이 기겁했다. 심지어 이다혜마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일은 금방 끝나잖아요. 사상자 나는 일도 손에 꼽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놈은 영 일하기 싫은 타입이란 말이지…….”

“허이고, 우리가 물불 가릴 때야? 고생 빠짝하고 치워 버리는 게 낫지.”

“에잉…….”

이한석이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해준 씨는 박서원이랑 같은 센터잖아. 자꾸 못 볼 꼴 보일 거야?”

“아, 그랬었지……. 해준 씨, 미안합니다. 우리 하는 말, 그, 박서원이한테는 안 들리게. 응? 알지?”

“하하……. 네.”

국내 초능력자 사이에서 박서원의 평가가 바닥을 기는 건 잘 알겠다. 이런 주인공이어도 괜찮은 건가, 이 드라마.

보통 주인공 성격이 개차반으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끝에 가서 어떻게든 주인공이 성장을 하긴 한다. 내면적으로. 이 드라마도 그런 과에 속하려나. 그럼 적어도 지금이 후반부는 아니겠군.

성아영과의 전화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해준 씨는 그냥, 실수 한번 하면 끝나는 일입니다.’

솔직히 협박당해 움직이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수하라고 해 봤자 고의로 하는 게 어떻게 실수가 되겠는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야지.

하지만…….

이게 드라마 스토리라면 말이 좀 다르다.

원래 드라마에서는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드라마에서는 ‘나’라는 등장인물이 없었을 테니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협박이 갔을지도 모른다. 이다혜나…….

나는 이다혜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이세빈을 보았다.

미래를 보는 능력. 겨우 1초라고는 해도 이다혜처럼 궁합이 잘 맞는 초능력자와 함께 있으면 전투 결과는 놀라울 정도다.

성아영의 말을 조합하면, 단청이든 박서원이든 원하는 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다. 박서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신선비와 둘만 있고 싶어 한다. 내가 아니라면 이세빈을 구슬리면 그 시간을 벌 수 있을 확률이 높다. 신선비가 도망치는 타이밍을 잘못 알려주면 될 일이니까.

사람을 협박하는 놈의 말은 들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게 드라마 스토리라면 어떤 일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그러면 역시 뱀을 놓쳐야 하나? 아니면…….

“지원은 서울팀만 옵니까?”

“보통은 그렇지? 서울은 인구도 많고 하니 센터가 셋이나 있지만 다른 지방은 인구는 작은데 커버할 범위는 더 넓잖아. 어지간히 특별한 능력 아닌 이상 서울에서 인원 빼 오는 게 낫지.”

“그리고 뱀은, 뭐…… 담당하다시피 하는 놈이 따로 있고.”

“그럼 인원은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인가요?”

이다혜가 내 말에 대답했다.

“아니. 너울의 진우 아저씨와 우리 요운이가 작전 확인 때문에 잠깐 불려 갔어. 올 때가 됐는데.”

이다혜는 고개를 쭉 내밀어 두리번거렸다.

“마침 오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다혜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니 키가 큰 남자 둘이서 걸어오고 있었다. 한쪽은 낡은 추리닝을 입고 있는 중년인이었고 한쪽은 청바지에 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햇빛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디서 본 연출인데.

아직 이런 연출이 필요한 등장인물이 아직 남아있어? 씨발, 종잡을 수가 없네.

“추리닝이 진우 아저씨고, 옆에 애가 요운이. 요운이랑도 처음 봐?”

이다혜가 수다스러운 사람이라 좋다. 드라마적인 우연이어도 뭐, 이런 사람이 있어야 정보 얻기도 편하지.

“네, 뉴스에서는 몇 번 이야기를 듣긴 했었는데…….”

“요즘 요운이 뉴스에 많이 나와?”

이세빈은 이다혜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단기간에 등급이 엄청 올라서 많이 얘기가 나왔어요. 얼마 전에 여우도 하나 잡았잖아요.”

“그 꼬리 여섯 개 달린 놈 잡은 게 요운이었어? 흐, 내가 걔 크게 될 줄 알았다니까. 소방관 출신이라 그런지 초능력 받쳐 주니까 완전 날아다니더라고.”

이다혜는 자기 얘기도 아닌데 뿌듯하게 웃었다. 같은 센터 소속도 아닌데 친근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꽤 친한 사인가 보다. 이다혜 성격이면 반강제로 누나 동생 사이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 이쪽이 더 확률이 높다.

“요운 오빠, 끝났어요?”

이세빈이 목소리를 높였다. 얌전해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 이유가 뭐겠는가. 딱 봐도 이세빈은 손요운을 좋아한다.

내 지레짐작일 수도 있지만, 뭐……. 틀리면 어떻고 맞으면 어떤가.

“설명은 다 들었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왜? 왜 이런 기분이 느껴지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은 쉽게 느끼기 힘들다. 그러나 생각 외로 인간의 감은 적중률이 높다.

단청 회장실에서 햇빛을 잔뜩 받고 있던 구민석을 떠올렸다. 주인공도 아닌데 그만한 연출을 받는 건 구민석이 구민석이기 때문이었을까.

하긴 단청에서 돈을 댔으니까 부회장인 구민석 등장 신에 그만한 연출을……. 아니,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이상하다. 구민석이 현실에서도 단청 부회장이었던가? 아닌데, 분명 현실에서 단청은…….

“요운아, 여기가 정해준.”

“아, 정해준 씨요? 그 보호 능력자분?”

천천히 등을 돌렸다.

키가 큰 남자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서 있다. 아, 또 이 빌어먹을 드라마 연출! 꺼져라, 좀!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면서 햇빛이 남자의 얼굴에서 빗겨 나갔다. 그림자가 지면서 남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딱 드는 생각이, 우리 엄마가 좋아하게 생겼다.

아니…… 진짜 우리 엄마가 좋아하던 애 아냐?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손요운입니다.”

손요운은 내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 * *

눈썰미는 나쁘진 않다. 관심이 아예 없는 분야라면 모를까, TV나 영화에서 봤던 연예인들을 아주 못 알아보진 않았다. 나는 관심이 없어도 가족들이 자주 본다면 어쩔 수 없이 눈에 익는 얼굴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평화나 구민석이 그런 얼굴이다. 구민석은 너무 유명해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긴 하지만.

그리고 손요운도 그런 얼굴 중 하나다.

저 얼굴을 아는 이유는 엄마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냉장고 CF를 찍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냉장고를 바꿀 때 ‘우리 새끼’ 냉장고를 팔아 줘야 한다며 손요운 냉장고를 샀다.

……나보고 우리 새끼라고 부른 적은 없으면서.

이런 걸 보면 정해영이 누굴 닮았는지는 확실하다.

엄마가 정해영과 같이 이 빌어먹을 드라마를 보는 건 구민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손요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문제는…… 손요운이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느냐다.

“에, 또, 주의사항을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서울팀 조장은 손요운이고, 너울팀 조장은 김진우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작전을 설명했다.

김진우는 천막 안에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여기에 사찰이 있으니까, 주의해 달라는 공무원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배가 툭 튀어나온 김진우는 이 시대의 평범한 중년인이었지만 얼굴은 조연 전문가 배우를 하고 있었다. 손요운도 그렇고, 성아영의 전화를 생각해 보면 역시 이건 드라마 스토리다.

“실종자 위치는 대충 여기쯤으로 파악되고, 공격조와 구출조로 나눕니다……. 여차할 경우에는 바뀔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두어 두시고.”

“서울조는 공격조로 들어가고요, 해준 씨는 신선비가 허물을 벗고 도망칠 때 차단막으로 잡아 주시면 됩니다. 크기가 평범한 뱀 크기로 줄어드니까 주의하시고요.”

“공격조에는 박서원이 포함되고…… 거,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알아서 다 피하도록 합니다. 알겠죠?”

김지상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근데 그 박서원은 언제 와요, 삼촌?”

“마, 일할 때는 삼촌이라 부르지 말랬지.”

“에이.”

“……박서원 금마는 금방 도착한다던데.”

그때, 주차장 쪽이 시끄러워졌다. 김진우는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후볐다.

“봐라.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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