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20. 구렁덩덩 신선비(1)
‘좀 더 강한 걸 가져와 볼까요?’
‘허, 허락, 못, 받았, 는데…….’
‘지금 올라가서 여쭤볼까요? 부장님도 허락해 주실 것 같은데.’
‘제발 좀 쉬었다 합시다!’
‘거기 앉으시면 안 돼요!’
‘휴, 휴게실, 위에, 있으니까 거기, 가서…….’
박물관에 있는 특별수사연구소로 출근한 지 나흘 만에 알게 된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난 생각보다 호러 장르에 약했다.
둘째, 그리고 여기 수사관들은 공포 영화 잘 볼 거다. 확신한다.
* * *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단청 경영지원팀의 성아영 대리라고 합니다.”
“아, 무슨 일이시죠?”
여태 거의 방치하다시피 날 두고 있는 단청이다. 열심히 비상근무 뛰는 게 돈값 하는 거라는 얘길 들었지만, 날씨가 더워지면서 겨울에 맞췄던 슈트도 옷장 행이다. 처음 얘기 들었을 때처럼 단청을 광고하기에는 부족하다.
왜 슈트를 안 입냐고 비상근무 때 만난 초능력자한테 슬쩍 물어보니,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쪄 죽을 일 있어요?’
라고 기겁하던데, 맞는 말이라 수긍했다. 드라마적으로 생각하면 의류 업체에서 협찬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
“이번에 경상도에서 발견된 뱀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돈값 못하니까 계약 파기하자는 소리는 아니군.
돈은 중요하다. 이제 와서 회사에서 9시간 동안 앉아 있을 순 없으니 더 그렇다.
“정해준 씨도 뱀잡이 명단에 포함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전국 각지에서 요괴들로 인해 발생하는 사고는 정부에서 처리한다. 요괴대책팀이 그 역할을 한다.
간혹 개개인의 ‘의뢰’가 처리될 때도 있지만 이건 정부를 거치지 않고 단청처럼 초능력자 후원사를 통하는 게 대부분이다. 아니면 불법적인 일이거나.
그러니 보통 요괴대책 프로세스는 요괴 목격→신고→요괴대책팀→초능력자 순이다.
이 과정에서 개입되는 건 정부의 요괴대책팀이고, 가끔 센터가 포함된다. 단청 같은 사기업은 포함되지 않는다.
초능력자의 정보도 개인정보고, 요즘은 개인정보에 민감한 시대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네.”
어떻게 알기는, 단청은 대기업이다.
드라마 재벌들에게는 보통 숨겨진 수가 있다. 어쩌면 단청이 이 드라마의 흑막일 수도 있다. 드라마 재벌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으니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라의 소중한 보호 능력자니 참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여길 수도 있다. 보호 능력은 쓸모가 많다니까? 내 초능력이라 그리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긴 드라마. 드라마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드라마에서는 허투루 지나가는 장면이 없다.
“아직 뱀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뱀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성질이 고약한 놈이라 곧 소집이 떨어질 겁니다.”
“단청에서는 그것도 알 수 있습니까?”
“저희 쪽에서 정부와 협업하고 있으니 소식이 들려온답니다.”
성아영은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친절한 목소리지만 듣고 있으니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이거 역시 좀 뒤가 구리지 않냐…….
나야 등장인물이 아니니 그 법칙을 적용할 순 없지만 단청의 부회장 구민석과 박서원은 등장인물이지 않은가. 박서원이 이번 뱀잡이에 참여하고, 단청에서 연락이 왔으면 평범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여러모로 드라마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 참, 도대체 구민석은 왜 이런 드라마에 출연한 거야? 금수저의 일탈치곤 과하다. 회사 운영은 안 하고.
“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뱀잡이 때문에 연락하셨다고요?”
“네, 정해준 씨가 해 주셔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서요.”
수상하다.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다.
“불법적인 일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성아영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간단한 일이랍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말하는 아주 간단한 일이란, 들키면 좆되는 일이란 말과 동일하다.
기억해 둬라.
* * *
5월이 되었다.
그 말은 내가 이 빌어처먹을 드라마에 들어온 지도 5개월째라는 소리다. 싫어도 이곳에 대해 적응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내가 드라마에 대해 무얼 알게 되었나.
정해영이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공, ‘내 새끼’?
‘내 새끼’ 말고 등장인물이라 생각되는 인물은 많다.
분명 꽤 비중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한 구민석이나 한평원과 그 가족들. 자주는 아니어도 중간중간 까먹지 않을 정도로는 등장할 장규혁과 혜사, 임상규, 백성찬 등등.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등장인물인 건 확실한 백조 삼 남매라든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누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등장인물은 얼추 추려졌지 않았나 싶다.
자, 그럼 다음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당연하지 않나.
스토리다.
드르르륵.
진동으로 맞춰 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임상규다.
“여보세요?”
“해준 씨, 찾았습니다.”
임상규는 다급하게 말했다.
“뱀이요?”
“네. 새벽에 드디어 위치를 좁힐 수 있었습니다. 등산객 두 명이 실종됐거든요.”
단청의 성아영과 통화한 게 엊그제다. 말이 좀 안 맞는데……. 됐어. 드라마 재벌이 뒤 구린 점이 한두 개겠어. 기억만 해 두자.
“어떤 종류인지도 알아냈습니까?”
“예상대로 신선비입니다. 신선비인 만큼 실종된 등산객이 당장 위험하진 않겠지만 오래 둬서 좋을 건 없습니다. 서울팀도 바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몇 명 간다고 했죠?”
“손요운 씨와 이다혜 씨, 이세빈 씨는 마침 비상근무 중이어서 바로 출발했습니다. 해준 씨는 저와 내려가시면 됩니다.”
“임 팀장님도 가세요?”
“서울지원팀장으로 갑니다. 지휘권은 없고요.”
임상규는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하나를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도록 하죠. 바로 나오세요.”
* * *
초능력자인증기관은 서울에 세 곳, 그 외의 지역에는 행정구역마다 하나씩 있다.
당연히 이번에 신선비가 발견되었다는 경상도에도 센터가 있다.
경상도에 있는 센터의 이름은 너울.
신선비가 발견된 장소가 경북이니만큼 너울의 초능력자들이 뱀잡이를 위해 차출된다.
그 외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초능력자들을 각 지역에서 데려온다. 보통 나 같은 특수능력자들이 대상이다.
“다혜 씨와 세빈 씨는 지난번에 만났을 테고, 손요운 씨와 합 맞추는 건 처음이시죠?”
“네, 뉴스에서 이름을 자주 보긴 했지만요.”
손요운은 꽤 유명인사다. 박서원까지는 아니어도 업계 사람이거나 요괴 관련 뉴스를 잘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아, 그 사람?’ 할 정도의 인지도는 있다.
물론 좋은 쪽으로 언급된다.
“이렇게 많은 초능력자들이 모이는 일도 처음입니다.”
“해준 씨, 지방 지원은 처음이었죠?”
“불 끄러 간 적은 있습니다.”
“아, 그 불개요? 그때 불여우도 잡았어야 했는데. 여우불이 크게 번지지 않는 불이래도 가끔 그렇게 말썽이 생겨요.”
임상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불여우 관련법이 몇 년째 난항을 겪고 있는데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좋은 쪽으로 정리되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임상규는 어깨를 으쓱였다. 피곤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다.
임상규는 설명을 이어 했다.
“보통 이런 지방 지원은 연에 두세 번 정도는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보호 능력이 워낙 희귀한 능력이라 사실 보호 능력 의존도가 높진 않거든요.”
경북으로 내려가는 헬리콥터 안에서 임상규는 내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날 자주 부려먹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편한 길 두고 돌아갈 만큼 멍청하지는 않으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해준 씨. 하하하.”
복부에서 올라오는 아주 깊은 웃음소리였다. 진심인 건 잘 알겠다.
헬리콥터 아래로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경찰들이 보였다. 비상근무를 하다 보면 자주 보는 풍경이다.
헬리콥터 속도가 느려지고 고도가 조금씩 낮아졌다.
도착이다.
헬리콥터에서 내리자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느껴졌다. 눈앞에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이 만들어 내는 절경이 있었지만 그걸 배경 삼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모처럼 미세먼지도 없는 새파란 하늘이었고, 봄바람과 어우러져 신선놀음하면 딱 좋을 풍경이긴 했다. 평소였다면 관광객으로 붐볐겠지만 산 입구는 경찰이 막고 있고, 자동차 대신 캐노피 천막으로 본부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이쪽은 요괴대책팀과 센터 사람들로 보이고…….
그 무리에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천막 아래에는 다소 헐렁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쪽이 초능력자들이다.
“어이!”
믹스커피를 탄 종이컵을 손에 쥐고 있던 여자가 이쪽을 발견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아는 얼굴이다.
“동생!”
이다혜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 모습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다.
“어, 임 팀장님이랑 같이 내려왔어? 팀장님, 해준이 제가 데려가도 되죠?”
“네,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다혜 씨.”
이다혜는 껄껄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어허,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왜 그래?”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그냥 누나라고 불러! 딱딱하게 무슨 다혜 씨야.”
이다혜는 나를 끌고 천막으로 향했다.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지금 내 상황을 생각했다.
“아, 예…….”
내가 드라마 스토리에 대해서 기억하는 건 별로 없다.
보통 정해영이 떠들 때 나는 헤드셋을 끼고 게임을 했고, 제대로 들어줬다 해도 정해영의 말 중 팔 할 이상은 ‘내 새끼’와 ‘우리 언니’에 관한 거였다.
덕분에 스토리에 관해서는 기억나는 게 몇 가지 없었다. 기껏해야 15화에 서울이 날아갔다 정도.
서울이 날아갔던 그 15화가 방영된 건 내가 이곳으로 오기 직전, 그러니까 12월이다.
드라마 속 배경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한겨울에 한여름을 배경으로 잡진 않았을 거다. 그럼 서울이 날아가는 걸 겨울이라 하면, 아마 올해 겨울이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해 보자. 그럼 남은 시간은 반년 남짓이다.
아직 스토리에 대해서는 감도 못 잡고 있다.
하지만 이번 신선비는 주인공 박서원이 참여한다.
무려 주인공이 참여하는 뱀잡이가 평범할 리가 없다. 단청에서도 따로 전화가 왔으니까.
……자, 여긴 드라마다.
그러니까 드라마적으로 생각해 보자.
‘신선비는 위험할 것 같으면 허물을 벗고 도망간답니다. 허물을 벗은 신선비는 일시적으로 일반 뱀이랑 비슷할 정도로 몸집이 작아져요. 해준 씨한테 할당될 임무는 작아진 신선비를 가두는 차단막이겠지요.’
성아영과의 전화 내용을 떠올렸다.
‘이때, 신선비를 잡지 마세요.’
‘……놓아주라고요?’
‘어차피 박서원 씨가 쫓아가서 잡을 거예요. 신선비는 움직임이 빠르니까 해준 씨가 놓쳐도 실수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 그래도 성격 나쁜 뱀이라면서요. 그걸 그대로…….’
‘박서원 씨가 확실하게 처리할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된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만약 주위에 다른 초능력자들이 없다면 해준 씨가 신선비를 잡아 놔도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만 않으면 돼요.’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고.’
‘박서원 씨는 확실하게 그 뱀을 잡을 거랍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준 씨가 그냥, 실수 한번 하면 끝나는 일입니다.’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 일이 드라마 스토리와 관련 없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