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19. 그 드라마의 설정(4)
[오늘 : 도착하면 말씀하세요. 앞에 나갈게요]
오늘에게 답장을 보내며 고개를 들었다.
이촌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여기에 특별수사과 연구소가 있다.
* * *
정해영이 드라마에 대해 떠들 때는 주로 청룡이나 해태같이 CG로 떡칠하는 영물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래서 드라마에 들어오고 주술이니, 부적이니. 하다못해 저주에 대해 사람들이 말해 올 때도 내심 심드렁한 구석이 있었다. 솔직히 사람이 백조가 되어서 눈앞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어도 그걸 실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이 빌어먹을 드라마는 기준도 없다.
동화나 설화가 현실이 되는 건 알겠다. 하지만 어떤 놈은 퇴치 대상이고 어떤 놈은 불개처럼 무해하다.
하긴 이딴 드라마에 규칙이 어디 있겠는가.
다 작가 꼴리는 대로 썼겠지.
그러니까 주술이나 부적, 귀…… 신 뭐 그런 것도 있을 수 있다. 요괴와 영물이 나오는 판타지에 주술이 빠지는 건 아쉽지.
평일이었지만 오후라서 그런지 박물관 주위는 한산했다. 간간이 보이는 참관객들이 평화로웠다.
오늘은 커다란 박물관 본관에 비하면 깜찍하기까지 한 3층 건물 앞에 섰다.
“여, 여기에요.”
근처에 박물관 말고는 아파트 단지뿐이라 이런 곳에 왜 연구소가 있나 했는데 그냥 박물관 부속 건물이었나.
“이런 곳에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바, 박물, 관, 유물도…… 조, 사, 하니까…… 괜, 괜찮, 아요.”
유물……. 아냐, 생각하지 말자. 드라마에서는 다 그럴 수도 있지. 저주받은 유물은 영화에 많이 나오잖아. 미라 같은 걸로.
“그럼 여기가 본부입니까?”
“아, 아뇨. 겨, 경찰, 청 옆에…… 수, 사과…… 거, 건물이, 있구요…….”
“아, 그럼 여긴 진짜 연구소로만?”
“네, 네…….”
현실에서도 박물관에 이런 건물이 있었는지 고민했다.
……내가 박물관에 마지막으로 온 건 대학교 교양 과제 때문이다. 무슨 건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난다고. 몇 년 전 얘기인데. 본관만 기억에 남았다.
“드, 드, 들어, 오세요.”
연구소 문을 열며 오늘이 속삭였다. 난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실례하겠습니다.”
초능력 특별연구소라고 해봤자 건물 안은 평범했다. 정갈한 인상이긴 했지만 벽에 부적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구소니 연구원들도 있겠지만 건물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가운도 없고 전부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몇 명은 오늘을 보고 인사했고, 몇 명은 날 보며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보호 능력이 드문 만큼 봄부터 꾸준히 비상근무를 나갔더니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인이 되었다. 유명인이라기보다는…… 희귀동물 쪽에 더 가깝긴 하다.
“지하요?”
“네, 그, 지하에…… 따개실, 아, 아니, 봉인해제, 실이 있, 거든요…….”
뭔가 의미 모를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봉인…… 네?”
“그, 아, 안에, 뭐가, 들었… 는지, 모르, 는…… 물건을…… 여, 여는, 방이, 에요…….”
진짜 여긴 얼마나 섞인 세상이야.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돌아왔다. 이제 안 놀라기로 했잖아, 정해준. 여긴 원래 이런 세상이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는 3층뿐이네요?”
“…….”
오늘은 희미하게 웃었다.
엘리베이터에는 층 버튼이 네 개 있었다. 1, 2, 3. 그리고 B3.
지하 1층과 지하 2층은?
이거 자꾸 공포 영화 분위기잖아.
잠깐 불안했지만 다행히 지하 3층은 평범했다. 긴 복도가 있고 그 끝에 문 하나만 있었지만, 그래도 평범했다.
“비, 비상, 상황을 대, 비해서…… 방, 어 체계, 구, 축, 때문… 에 그래요…….”
복도를 걸어가며 1m 간격으로 있는 방화 셔터를 봤다. 공포 영화 패턴을 생각하면 저건 방화 셔터가 아니라 차단벽이겠지.
그러니까 이게 있을 만큼 위험한 물건을 여기서 다룬다고?
“이런 게 필요한 물건을 서울 한복판에서 다룹니까?”
“꼭 그건 아니고요.”
지하 3층에 있는 유일한 문을 열고 남자가 나타났다.
“보통 위험한 물건들은 옮기다가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서 발견 장소와 가까운 시설에서 처리하는 게 원칙입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긴 보통 비교적 가벼운 것들을 처리하는 용도인데, 그렇다고 대비를 안 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 건물도 같은 설계로 지어졌어요. 지방의 시설도 다 똑같습니다.”
오늘은 남자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도 따라 들어갔다.
“…….”
열린 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워낙 살벌해서 잠깐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나도 들어갔다.
봉인해제실(封印解除室).
방문 위에 있는 글자가 무거웠다.
* * *
봉인해제실은 공포 게임의 마지막 스테이지처럼 생겼다. 벽과 천장에는 부적이, 바닥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힌 넓은 방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해준 씨.”
그 살벌한 풍경 속에서 남자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보고 오랜만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는데. 이 세계에서 내 인간관계는 좁다.
내민 손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얼결에 악수를 하며 남자의 얼굴을 뜯어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 그, 복숭아 때 봤던 김도훈이라고…….”
“아, 그때요. 실례 많았습니다.”
가짜 복숭아가 우리 집에서 터졌던 날 오늘과 함께 찾아왔던 수사관이다.
“아뇨, 해준 씨야말로 고생하셨죠.”
“수사관님이야말로…….”
“그냥 이름 불러 주셔도 됩니다.”
“아, 네…….”
김도훈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배한테 얘기는 들었습니다. 해준 씨 능력이 주술에도 듣는지 확인하고 싶다고요?”
“네.”
“확실히 기록은 있죠. 해준 씨 이전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보호 능력자분 아세요?”
“한평원 씨 부친이라 들었습니다. 얼마 전 한훈열 선생님을 뵈었거든요.”
“진짜요?! 와, 그분 정정하시구나. 하긴 돌아가셨다면 신문에 나왔을 테니까…….”
“너, 그, 그, 말, 엄청 실례야…….”
“물론 그런 분은 오래 사셔야죠! 그게 나라의 복 아니겠습니까!”
김도훈은 볼을 긁적였다.
“여하튼 좀 옛날 기록이지만, 그 돌아가신 한수현 초능력자도 특별수사과에 협력해 주신 기록이 있거든요.”
“보, 보호… 능력으로, 반사, 된, 저주를…….”
“네, 그러니까 해준 씨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미국에서는 부두 주술을 막았다고도 하고, 유럽에서도 최근까지 마법을 막았다고 하거든요.”
“기록이 있으면 저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모르죠. 같은 능력이라고 해도 개인 차이가 있으니까요.”
김도훈은 방 중앙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내가 애써 시선을 주지 않고 있는 상자였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건 직접 해 보는 수죠. 개인적으로는 해준 씨가 꼭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보호막이 막는다고 해도 없애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필요하다고요?”
“막을 새도 없이 사람에게 달려드는 것보다 미리 가둬 두고 살풀이하는 쪽이 더 쉬워요. 잘못해서 사람한테 쓰이면 한두 명 죽는 걸로 끝나지 않거든요.”
대충 그런 설정인가 보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그걸 뛰어넘는 저주가 나올 가능성은 존재한다. 보호막으로 그걸 잠깐이라도 붙들 수 있으면 된다나 뭐라나.
이 능력, 의외로 활용도는 높은데 보호막보다는 차단막이 더 많이 쓰인다. 그래서 차단막이 가능하면 등급이 높아지는 건가?
“1000년 된 유물 검사할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적을 붙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해준 씨 보호막이 통한다면 적어도 부적 절반은 줄어들겠죠.”
김도훈은 슬퍼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부적 안 붙이고 일하는 게 제 소원이거든요.”
뭔지는 몰라도 진짜 싫은가 보다.
“제일 중요한 건 안전이죠.”
물론 특별수사과의 두 수사관은 주술을 처음 접해 보는 초능력자에게 대뜸 저주를 튕겨 내 보라고 하진 않았다.
오늘이 바닥에 무언가 준비를 하는 동안 김도훈은 내게 물었다.
“부적 들고 다니시는 거 있죠?”
“네. 손목에 차고 다닙니다.”
김도훈은 내 왼손에 걸린 묵주와 어제 도서관에서 오늘이 준 부적을 보았다.
“나자르 본주까지 하고 다니세요? 근데 좀 작아 보이는데…….”
오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선물 받아서요.”
“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받은 부적은 좋은 물건이죠. 저도 여친이 준 거 있어요.”
김도훈은 팔목에 있는 염주를 흔들었다. 초능력을 비롯해 주술적인 물건을 주로 다루는 특별수사과 사람들에게는 생활용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오늘도 나자르 본주 팔찌를 끼고 있었다. 내게 준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부적도 붙이시고…….”
김도훈의 설명을 들으며 바닥에 무언가 그리고 있는 오늘을 보았다.
수수하고 조용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드라마적으로 생각하면 저런 조연이 한두 명 정도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내가 모를 뿐이지 오늘도 저쪽 세상에서는 연예인이고, 드라마에 출연했을 수도 있다.
수상한 점도 있다.
오늘과는 복숭아 사건을 제외하곤 딱히 접점도 없는데 묘하게 나에게 친절하지 않던가. 혹시 내게 반했나, 하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묵주를 주던 날 괜히 내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겠지. 어제 도서관에서도 이상하게 호의적이었다.
“아, 걱정 마세요. 해준 씨가 실패해도 저주는 이 방 안에서 자연 소멸되니까요.”
……물론 오늘이 단순히 친절한 성격이어서 그럴 수 있다. 등장인물이라 확신한 다른 사람처럼 내가 아는 연예인 얼굴이 아니니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다못해 오늘이 연예인같이 화려한 인상이었으면 조금 더 확신을 가질 텐데.
젠장.
“여기 붙어 있는 건 별거 아닙니다. 진짜 만의 하나 잘못되어도 살짝 어깨가 뻐근할 정도에요.”
김도훈은 손바닥만 한 중국 도자기 인형을 가리켰다. 완충재로 하나씩 감아서 박스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저게 도대체 몇 개야?
내 시선을 느꼈는지 김도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원래는 복을 기리는 인형인데 공정 과정에서 잘못되어서 그만…….”
“혹시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물건은 아니겠죠?”
“아, 그건 아닙니다. 이걸 만든 놈들은 복을 기리는 인형 안에 마약을 넣어서 밀반입하려던 일당이거든요. 인형을 잘못 만든 바람에 지금은 감옥에서 잘 썩고 있죠.”
……이런 부분은 또 묘하게 현실적이란 말이지.
“사용 허락은 받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김도훈은 별거 아니라는 어투로 말했지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귀엽게 생겼지만 공포 영화에서 불 꺼진 학교 복도에 놓여 있어도 이상하질 않을 생김새다. 심지어 박스에도 부적이 붙어 있고, 인형 몸통에도 부적이 있다.
괜히 온 거 아닐까…….
“그럼 방법은……?”
“부적이 붙어 있어서 이 상태로는 괜찮은데 형태가 깨지면 나오거든요. 제가 던지면 해준 씨가 그 주위에 보호막을 치시면 됩니다.”
“좀 무식한 방법 아닙니까?”
“원래 주술은 다 원시적인 법입니다.”
젠장, 정론이잖아.
전문가가 하는 말이니 토를 달수도 없다.
요괴나 영물이라면 현실에서도 책으로 본 이야기가 있으니 비교라도 할 수 있지만 주술 영역은 진짜 듣도 보도 못한 영역이다. 기껏 해 봤자 게임이나 영화, 만화에서 봤을까.
가끔 엄마가 이모를 따라 부적을 받아 올 때가 있지만 그것도 문에 붙이는 입춘대길이 끝이었다. 사실 그게 부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드라마 작가도 하나하나 고증을 따져서 시나리오를 쓰진 않았겠지. 애초에 그런 걸 따지는 인간이었으면 서울을 멸망시키지 않았을 거다.
“다, 다 됐, 어.”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오늘이 몸을 일으키자 김도훈은 상자에서 인형 하나를 꺼냈다. 염주를 찬 손 쪽이다.
……이 드라마 내에서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면 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 법이다. 처음 보호 능력을 사용했을 때와 같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쳐서, 반드시 돌아간다.
통장을 본 것이 첫 번째 발걸음이라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건 두 번째 발걸음이다.
“셋에 던지겠습니다. 준비되셨어요?”
“네.”
그리고 이건 세 번째 발걸음.
내 능력에 대해 한 단계 더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발걸음은 이곳, 이 드라마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많이 알수록, 뭐라도 하나 더 건질 확률이 높다.
“하나, 둘, 셋!”
손이 하얗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