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47화 (47/202)

# 47

19. 그 드라마의 설정(3)

소원(所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크고 작든 소망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복권 당첨이라든지.

그런 세속적인 욕망 말고, 동화 속 소원 이야기를 해 보자.

먼저, 소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신화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다. 영생을 살고 싶어 하거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하거나. 대개 그런 이야기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소원을 빈 대가로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결말까지는 필요 없고,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나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존재. 신화에서 소원을 이루어 주는 건 보통 신이다.

그렇다면 동화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 중 하나인 신데렐라를 떠올리자.

그래, 신데렐라에서는 소원을 들어주는 물건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가고 싶어 하자,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와 마차를 준비해 주는 요정은 등장한다.

그럼 이 요정은 신데렐라의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닐까?

정해영이 좋아하던 동화책 중에는 짚을 금으로 만든 난쟁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 난쟁이는 방앗간 집 딸 대신 짚을 황금으로 바꿔 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첫 아기를 주기로 하였다. 난쟁이가 바꿔 준 금으로 딸은 왕비가 되었고, 딸은 난쟁이에게 아이를 주지 않기 위해…….

결말은 상관없는 이야기다. 어쨌든 이 난쟁이도 딸의 소원의 들어주지 않았는가?

비록 대가가 필요하더라도 임상규가 추천해 준 중앙도서관 자료실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소원을 들어주고, 대가를 가져간다.

원래 세계였다면 이 이야기들은 아동열람실에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져 꽂혀 있었을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는 엄중한 관리를 받고 있는 특별자료실 안의 자료들이다.

……정말로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이겠지.

소원을 이루어 주는 반지, 요정, 마녀, 난쟁이. 오래된 번역서처럼 보이는 책에는 마녀나 난쟁이 퇴치방법도 적혀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이 세상의 유럽에는 마녀나 난쟁이도 있는 게 확실했다.

물론 유럽 말고, 우리나라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여의주와 큰 차이가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어느 어부가 그물에 걸린 잉어를 구해 주었는데, 이 잉어는 사실 용왕의 아들로 보답으로 보배 구슬을 주었다.

용왕의 아들이면 용이다. 이 구슬이 여의주가 아니더라도 결국 용에게 은혜를 입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바엔 이무기를…….

지하철에서 보았던 영상이 생각났다.

……해외로 나가는 게 나을지도.

젠장, 결국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판타지라고 해도 너무 나갔다고…….”

정해영, 이 미친년은 도대체 왜 이딴 드라마나 보고 다닌 거냐고.

창도 없는 지하 자료실에서 동화책만 읽고 있으니 돌아 버릴 것 같아서 일단 밖으로 나왔다. 폐관 시간까지 조금 남았으니 자판기 커피나 하나 마셔야지.

* * *

“어?”

“어어?”

자판기는 못 찾고 도서관 카페테리아 스무디 하나를 사서 나오다가 아는 얼굴을 만났다.

“아, 안, 녕, 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씨.”

덥지도 않은지 이 날씨에 검은색 목티를 입고 있는 수사관, 오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인사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 차, 차, 찾아볼 게, 있어, 서……. 해, 해준 씨, 는요?”

“저도 좀 조사할 게 있어서요.”

나는 오늘을 보았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드라마 등장인물은 아닐 것이다. 드라마를 찍을 때 엑스트라를 고용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애초에 나도 등장인물은 아니니까.

그래도 유럽에서 저주받아 온 백조가 있느니만큼 해외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정도의 설정은 있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을 거고.

“오늘 평일 아니에요? 이렇게 와 있어도 돼요?”

오늘은 등장인물일까?

“이, 일이에요!”

“일이라고요?”

“어, 업무, 에, 필요, 한…… 자료를, 화, 확인…… 하러…….”

“그래요? 그럼 어느 자료실 가시는 거예요?”

“초, 초능, 력, 특별, 자, 료실요…….”

“아, 나도 계속 거기 있었는데. 방금 오신 거죠? 못 본 걸 보면.”

오늘은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도수가 높은 안경을 낀 오늘은 배우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수했다. 아이돌이나 가수도 아닌 것 같고.

……등장인물일까?

아니면?

“어, 그, 그…….”

오늘과는 복숭아 때문에 알게 됐지만 바꿔 말하면 복숭아가 아니면 만날 일 없는 사람이다.

보통 드라마 등장인물끼리는 서로 연결고리가 있다. 박서원과 한평원처럼. 하지만 특별수사과라.

박서원은 주로 해외를 돌아다니고, 국내에서는 단청을 통해 업무를 주로 받는다. 요괴잡이는 보통 요괴대책팀을 통해 연락을 받으니 초능력과 관련된 범죄를 수사하는 특별수사과와는 아무래도 연결고리가 옅다. 초능력자인 만큼 특별수사과와 완전히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억지로 연결 지을 만한 건수도 없다.

“그, 이거!”

오늘은 내 손을 잡아챘다.

“이, 이거요!”

“아, 덕분에 잘 하고 다닙니다.”

손목에 걸린 십자가가 흔들렸다.

“이게 필요한 사건은 아직 못 만난 것 같은데, 그래도 오늘 씨 말대로 매일 하고 다니…….”

“이, 이거, 왜!”

“네?”

“새, 색이, 바랬, 잖아요!”

“어…….”

오늘이 너무 기겁해서 나도 눈을 아래로 내렸다. 오늘이 주었던 묵주가 달랑거렸다. 내 눈에는 오늘이 주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데 오늘의 눈에는 아닌가 보다.

오늘은 내 팔을 번쩍 들어 마구 흔들었다.

“여기! 여기가!”

“잘 모르겠는데요…….”

“여, 여기요!”

눈앞에 들이밀어진 작은 십자가를 유심히 봤다.

오늘이 보라니까 보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원래 이 색이었지 않나?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묵주를 팔에 두르긴 했지만 자세히 본 적은 없다.

……오늘의 말을 듣고 나니까 때가 좀 탄 것 같기도 하고.

“무, 무슨, 일이……. 혹시, 저…… 주?”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정처 없이 흔들리는 오늘의 눈을 보니 괜히 등이 오싹해졌다. 공포영화에서 괜히 불길한 소리를 늘어놓는 초반부 같은 대사잖아.

“매일 하고 다니다 보니 그을음이라도 묻었겠죠. 산불 현장에도 불려 갔었거든요.”

“아, 으……. 자, 잠, 깐…….”

오늘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손에 차고 있던 팔찌를 벗었다. 검은 점이 콕 찍혀 마치 눈알처럼 보이는 파란 구슬들을 실로 엮은 팔찌였다.

“이거…….”

오늘은 그걸 그대로 내 손목에 채웠다. 늘어나는 실로 만들었는지 내 손목에도 들어가긴 했지만 조금 작은 감이 있었다.

“이거, 차고…… 계세요…….”

“저번에 묵주도 주셨잖아요. 괜찮습니다.”

“내, 내가, 안, 괜찮…… 아요.”

오늘은 단호하게 말했다.

“호, 혹시, 모르…… 니까, 그, 차고…… 계세요…….”

팔찌를 풀어 오늘에게 다시 줘도 오늘은 고개를 저었다. 뒷짐까지 지며 피하길래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근데 전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데, 어쩌죠?”

오늘은 지난번처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웃었다.

“이, 인터넷, 으로, 산, 거니까…… 괜찮, 아요.”

해외 사이트에서 5개 묶음으로 산 터키의 부적이라고, 오늘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 * *

중앙도서관의 특별자료실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 오후 내내 있었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나 하나였고, 그나마 조금 전 오늘이 와서 두 명이 되었다.

“…….”

“…….”

오늘은 익숙하게 책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다. 읽는 것보다는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며 내용을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확인하러 왔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오늘은 자료 검색도 하지 않고 책을 몇 권 더 꺼내 와서 마찬가지로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다른 사람이 보는 곳에서 소원에 대해 알아보는 건 너무 수상해 보여서 내 앞에는 다른 책이 꺼내져 있었다. 초능력자나 인증받은 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자료실에서 소원에 관한 책만 보는 건 ‘나에게는 이룰 소원이 있습니다.’ 하는 꼴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의심받을 행동은 삼가는 편이 좋다.

그래서 택한 책이…….

[한국 뱀 요괴의 생태]

……곧 뱀 요괴 잡으러 가야 하니 핑곗거리로는 좋겠지.

“…….”

“……?”

시선을 느꼈는지 오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오늘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혹시 추천하는 책 있어요?”

“네, 네?”

“추천하는 책이요.”

“어…….”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경북에서 뱀 요괴가 난리라기에 미리 좀 알아 둘까 해서 읽고 있거든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이 자료실에는 우리밖에 없어서 목소리를 낮출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읽어 봤자 없는 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가 추천해 주는 게 있나 해서요.”

“아……. 음.”

오늘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음…….”

그리고 분주하게 자료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랑……. 이것도……. 아, 이 책도…….”

그리고 오늘이 돌아다니는 만큼 내 앞에도 서적이 쌓이기 시작했다. 거짓말 안 하고 산만큼 쌓였다.

“어…… 오늘 씨?”

“요것도…….”

“오늘 씨?”

“아, 네, 네?”

“감사하지만 오늘 다 읽긴 힘들 것 같은데요.”

내 눈높이까지 쌓인 책 더미를 가리키며 웃자 오늘도 아차 했는지 난감하게 웃었다.

“사진 찍어 놓고 시간 날 때마다 볼게요. 그러니까, 영역과 터전, 원시 주술의 복합적 의미…….”

이 한 권을 읽는 것만 한 달은 걸리겠다. 특별자료실의 책은 대여도 불가능하니까 이 책 더미를 다 읽으려면 일 년은 필요할 테다.

“음…….”

오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잠깐, 만요…….”

휴대폰을 들고 구석에 가서 문자를 보내고 전화도 몇 통 하더니, 오늘은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해, 해준 씨, 혹, 혹시…….”

오늘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 시간, 되…… 세요?”

“네?”

오늘의 귓가가 조금 빨갛다.

“해준, 해준 씨, 능력…… 보, 보호, 맞죠……?”

“아, 네. 보호예요.”

“저…… 그, 괘, 괜찮으면, 능, 력……. 시, 시, 시험, 안, 해볼…… 래요……?”

흠.

“그, 보호, 능력은…… 드, 물어서…… 기록, 이, 잘, 없…… 지만…….”

나 이전에 한국에 있는 능력자는 한훈열 하나. 그 외에는 10년 전 죽은 한훈열의 손자가 마지막이었다.

“주술…… 도, 막았, 다는…… 기록이…… 있, 어요…….”

한훈열이 그랬었지. 이 능력은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우, 우리 쪽, 에는…… 전문, 가가, 있으니까……. 아, 아, 안전하게, 시험, 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내 눈치를 보았다.

“폐가 되지 않으면 제 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이야긴걸요. 제가 가도 괜찮습니까?”

“그, 네…….”

“진짜요?”

“네.”

오늘이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 드라마 등장인물이 아니며,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오늘도 의심스러운 구석은 있었다.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하지만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드라마와 관련 없는 사람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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