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19. 그 드라마의 설정(2)
새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안쪽에 경비원과 출입대가 있었고, 카페에는 인증받으러 온 사람들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었다.
“해준 씨!”
그 요란한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자 연락을 받고 내려온 이유나가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날이 따뜻해서 옷차림이 가벼워진 이유나는 아이돌답게 예뻤다. 정해영은 연기가 별로라며 안 좋아했지만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착한 이유나는 직장동료로는 100점이었다. 물론 일도 잘했다.
하지만 이곳이 드라마인 이상 이유나를 볼 때마다 껄끄러워졌다.
내가 아는 이유나는 회사원 이유나가 아니라 아이돌 이유나니까.
“이제 바쁜 건 좀 정리됐어요?”
“아우, 말도 마요.”
이유나는 손을 내저으며 깔깔 웃었다. 3월에 봤을 때만 해도 죽어 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활기가 넘쳤다.
“여전히 아메리카노죠? 시켜 놨어요.”
“아, 잘 마실게요!”
이유나는 배시시 웃으며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받기 싫어졌다.
“자요, 청룡님!”
“……고맙습니다.”
이제 와서 이 오해를 정정하기는 너무 늦었다.
돌이킬 수 없다면 다르게 이용할 방법이나 찾아보자. 한평화가 청룡을 좋아하니 선물로 줘서 호감을 얻어 낸다거나.
……선물 받은 걸 다른 사람 줘 버리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지?
“혹시 이거 하나 더 받을 수 있어요?”
“하나 더요?”
이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람이 청룡님을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음…… 어차피 우리 부서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하니까 한두 개는 더 남아 있을걸요. 가져다줘요?”
한평화는 드라마 등장인물이다. 한평화만 그런 게 아니라 그 가족들은 전부 등장인물이다. 설정을 생각하면 그것도 꽤 중요한 인물들.
정해영이 떠들어 대던 걸 생각해도 그렇다. 물론 걔의 사심이 들어가긴 했겠지만, ‘우리 언니’는 ‘내 새끼’ 다음으로 높은 빈도수를 자랑했다.
봉제 인형으로 호감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좋지.
“이런 인형에는 여태 관심이 없어서 그런데, 이거 구하기 힘들어요?”
“우리야 행사와 관련되어 있으니까 재고가 남는 거지, 아무래도 힘들죠. 한정 발매인 데다가 보통 복지 행사와 연계해서 나오거든요.”
정해영이 한 번씩 한정 발매니 뭐니 하면서 지랄을 떨어서 그게 얼마나 악랄한 짓인지는 안다.
이유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을 보았다.
이유나가 준 청룡 인형의 꼬리에는 새 상품이라는 걸 증명하듯 택이 달려 있었다. My Little 청룡……. 주제에 상표도 있어?
사진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심지어 손에는 여의주까지 쥐고 있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처음에는 기금 모집하느라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유명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sns에 한번 화제가 되는 바람에 이래저래 인기가 많아졌죠.”
이유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평화의 집이 떠올랐다. 인형 말고도 청룡 얼굴이 그려진 물건들이 많았다.
“청룡님은 괜찮은 거예요? 보니까 다른 종류로도 많던데.”
“수익금 중 일정 비율 이상 사회에 기부하면 상관없대요. 대신 청룡님 이름으로 기부해야 해요.”
굳이?
제대로 기부를 하는지 확인하려고 그러나.
“아마 공덕을 쌓으려고 그런 것 같아요.”
“……남이 해 주는 것도 인정됩니까?”
“결과적으로 청룡님 허락하에 진행되는 거니까요?”
부정행위 아냐? 아닌가? 부정행위 같은데?
뭐 이딴 설정을 넣어 놨냐 하는 기분이 되었다.
……청룡의 공덕에 관해서는 그렇다 치고, 본의 아니게 역사에도 관심 없고 사회에도 관심 없는 인간이 된 나와는 달리 이유나는 평범한 사회인이다. 정확히는 초능력자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사회인.
이런 인형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유나 씨도 이번에 목격된 뱀 이야기 들었어요?”
위험 등급의 요괴에 대해서는 단청의 자료집보다 좋은 게 없을 거다. 아직 가 보진 못했지만 임상규가 추천해 준 중앙도서관 자료실도 괜찮을 거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료, 이 세계에 대한 설정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런 점은 현실이나 드라마나 다를 바 없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다들 곤두서 있어요. 얼마 전에 요괴대책팀에서 명단도 받아 갔잖아요.”
“서울지원팀은 대충 정해졌다던데.”
“뱀을 찾는 대로 상황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뱀은 그, 민감하잖아요.”
10년 전의 그놈 때문이겠지. 순간 떠오른 통장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오전에 임 팀장님한테 들었는데 박서원 씨는 참여 안 해요?”
확답을 못 받았다고 하던데. 위험 등급을 잡으러 다닌다고 팀을 따로 꾸린 놈이 이런 일에 빠지는 건 이상하다.
그리고 박서원이 참여에 따라 일의 경중이 달라진다. 드라마와 관련이 있나, 없나의 문제니까.
“박서원 씨요?”
이유나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가할걸요?”
“그래요? 임 팀장님은 박서원 씨가 워낙 바빠서 잘 모르겠다고 하던데요.”
“아…….”
이유나는 잠깐 멈칫하더니 주위를 살핀 후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저희끼리만 하는 이야기인데요.”
나왔다.
비밀 이야기의 단골 대사.
“그, 뱀이 나타났다고 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박서원 씨는 무조건 참여한대요.”
그래. 이런 건 자료집에도 안 나온다고.
“무조건요?”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온대요.”
의외의 말이다.
“요괴대책팀도 다 알고 있을걸요?”
“임 팀장님은 그런 말 안 하던데요.”
“그야 남의 개인사인데 공무원들이 티 내 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테니까요.”
촉이 왔다. 이건 드라마 내용이다.
“개인사라고요?”
“이거 진짜 다른 데 가서 얘기하면 안 돼요.”
괜한 걱정 하기는.
나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 친구 없어서 얘기할 곳도 없어요.”
“에이.”
이유나는 내 말을 농담으로 생각했는지 작게 웃고서 입을 열었다.
“박서원 씨 여동생이 10년 전 강철이 사태 때 죽었거든요. 그래서 뱀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고…….”
“……10년 전이요?”
속이 메슥거렸다. 방에 있는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업계에서만 쉬쉬 도는 이야기인데 그 사태 이후에 박서원 씨가 각성했나 봐요.”
박서원이 각성한 10년.
그게…… 이렇게 연결되는군.
“여동생을 못 지킨 거에 한이 맺혀서, 그렇게 뱀을 잡아 죽인다고.”
* * *
머리가 복잡했다.
‘10년 전’이 이 드라마의 주요 키워드라는 점은 잘 알겠다.
지금 드라마 등장인물로 판명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년 전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래. 심지어 나와도…….
10년 전, 서울 북부를 덮쳤던 재앙, ‘산암.’
내 개인적인 원한과는 상관없이 드라마와 관련된 주요 이벤트는 알아 두는 게 좋다. 알고 있다. 지금은 뭐든 머릿속에 박아 둬야 할 때다.
지하철 문에 기대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인터넷에 ‘산암’을 검색해 봤다.
10년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가장 최근에 올라온 글은 겨우 1시간 전이다. 올해가 10주기라고, 벌써부터 언론의 주목도가 높다.
……토할 것 같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글의 섬네일로 길다란 끈 같은 게 있었다. 화질이 떨어져서 뭔가 했는데, 글을 누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놈이 ‘산암’이다.
“윽.”
익숙한 풍경 사이로 거대한 구렁이가 보였다. 낮은 화질로도 삐죽삐죽 솟아 있는 비늘이 구분되었다. 놈이 지나갈 때마다 진득진득한 타르 같은 게 뚝뚝 떨어졌다. 노란빛이 번뜩이는 새빨간 눈동자만큼은 흐릿한 화질 속에서도 선명했다.
메슥거리는 속을 누르며 스크롤을 내렸다.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귓가에 울리는 고동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글의 중간 즈음에 동영상이 하나 있었다.
이걸 눌러야 할까? 내가 이걸 보고 괜찮을까?
그렇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한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저게 뭐야?’
‘도망가!’
재생하자마자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놀랐다. 지하철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다행이다. 재빨리 소리를 끄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카메라가 도로를 기어가는 뱀을 잡았다. 도로에 있던 자동차들이 뱀을 피해 달아났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뱀은 느리게,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너무나 빠르게 움직였다.
몸통이 움직일 때마다 자동차가 짓눌렸고,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건물이 부서졌다.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시민들의 대피를 도왔다. 뱀의 머리 부분에서 불꽃과 물이 쏟아져 내리는 걸 보니 초능력자들도 뱀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을 것이다.
도로를 가득 채운 거대한 뱀이 비현실적이다. 달려드는 초능력자들이 귀찮았는지 뱀은 몸을 곤두세웠다.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뱀은 다시 움직였다. 사거리에서 뱀은 왼쪽으로 꺾었다. 이상하게 눈에 익은 도로다.
……나는 저 도로를 알고 있다.
놈이 기어들어 가는 아파트도.
카메라가 비틀거리며 아파트를 잡았다. 흐릿하게 아파트 옆면에 써진 글자가 읽혔다.
평 안
1차
……우리 집이잖아.
평안 아파트 1차.
“학생? 괜찮아?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네, 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급하게 지하철을 내렸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토할 것 같다.
어떻게 개찰구 밖으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근처에 보이는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웨에엑.”
신물이 올라올 때까지 토했다.
“……씨발.”
잊어버리지 말자. 기억해라, 정해준.
여긴 드라마다.
평안 아파트 1차 701호 우리 집은 멀쩡하다.
아빠와 엄마는 일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고, 정해영은 해가 지고 한참 지나서야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귀가할 것이다.
정해영은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씻고 나오면 딱 드라마 시간이다. 정해영이 TV를 틀고 엄마도 옆에 앉는다. 책을 읽던 아빠도 아닌 척 드라마를 보기 시작할 거고, 엄마가 훈수 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테다.
그냥…… 그게 맞는 일이다. 그게 현실이다.
그런 괴물이 도로를 기어 다니는 게 아니라.
비틀거리며 나와 세면대에서 입을 헹궜다. 거울에 파리한 안색의 남자가 서 있었다.
자동차가 장난감으로 보이는 거대한 뱀은 현실이 아니다.
손에서 불과 물을 만들어내고,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그런 건 전부 지어낸 이야기다.
빌어먹을 초능력 따위가 없는 곳.
그곳이 나의 현실이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
“…….”
청룡 봉제인형이 담긴 종이봉투를 꽉 쥐었다.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집에서 허송세월 보낼 때가 아니다.
지하철 노선도를 봤다. 다행히 여기서 가까운 곳이다.
중앙도서관이라고 했지?
가서, 이 세상에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것이 존재하는지 알아보자.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의 손을 빌려도 좋다.
인간이 백조로도 변하는데 소원 들어주는 악마라고는 없을까.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