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19. 그 드라마의 설정(1)
잊지 말아야 할 건 이곳이 드라마라는 점이다.
각종 동화와 설화가 뒤섞여 있는 세상. 그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초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단청에서 봤던 백조 형제를 봐라.
이 세상은 사람이 백조로 변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한심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백조가 되고, 제비를 구해 주면 박씨를 물어다 주는 곳이다.
과연 소원을 이루어 주는 물건이 ‘여의주’밖에 없을까?
현실에서도 여의주에게 소원을 이뤄주는 힘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설정이 없었어도 상관은 없다.
원래 드라마는 작가 입맛대로 설정이 바뀌는 거 아닌가. 작가나, 배우, 감독, 뭐…… 외부의 압력이 있다거나.
현실에서의 법칙은 제쳐 두자. 여기서는 이 세계의 법칙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솔직히, 현실에서의 기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가족의 사진을 구하려고 뛰어다녔던 기억이나 장례식 풍경은 이쪽의 기억이었고, TV에서 보았던 배우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다른 기억들도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이 어디였는지 상관없다. 평행세계 같은 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현실이었을 수도 있다.
내게 이곳은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빌어먹을 드라마.
어땠든, 나는 소원을 이뤄 주는 물건을 찾아야 한다. 왜, 유명한 거 있잖아. 램프에서 튀어나오는…… 이건 애니메이션이던가?
“오빠, 어디 아파요?”
누가 등을 가볍게 쳤다.
“아프면 나오지 말고 쉬어요.”
“집에 있으면 뭐 해.”
“와, 그거 진짜 아저씨 같은 말인 거 알죠?”
최나라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아프면 병원 가고! 쉬어야죠! 우린 몸이 자산인데!”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는 게 딱 고등학생이었다. 힘이 넘친다.
내가 별말 없이 어깨만 으쓱거리자 최나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시끄럽게 굴 것 같아서 나는 최나라가 조용해질 만한 질문을 했다.
“모의고사는 어땠어?”
“……와, 오빠 진짜 치사한 거 알죠?”
원래 어른은 다 그런 법이다.
“흥, 이렇게 불려 나오지만 않으면 내 모의고사 등급이 하나는 더 오를 거예요.”
최나라는 교복을 입은 채 말했다. 조금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고3 되면 부르는 일 많이 없을 거라더니 속았어!”
비상근무를 하다 보면 최나라처럼 교복 입은 학생을 종종 보곤 했다. 최후의 양심인지 중학생 이하는 없었지만 교복 입은 애들이 요괴를 상대하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참……. 그렇단 말이지.
언제 한 번 임상규에게 슬쩍 물어보니 미성년자를 부르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있다고는 했다. 다만 학생처럼 위치가 확실한 초능력자는 드물어서 거리 사정상 가끔 부르는 일이 생긴다고.
동화로 예쁘게 포장하고 있긴 해도 위험한 세상이다. 인간이 백조가 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근데 오빠 진짜 얼굴 안 좋아요. 괜찮은 거 맞아요?”
“어제 드라마 본다고 늦게 잤거든.”
“……와, 지금 고3 약 올리는 거? 완전 나빴다.”
“공부 안 하잖아.”
“하거든요? 저 공부 잘해요!”
최나라는 발끈해서 말했다. 기운이 넘치는 애와 얘기하다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교복 봐요!”
“교복이 왜?”
까만 치마에 까만 조끼. 슬슬 날이 더워져서 단추를 채운 와이셔츠가 보인다.
“아씨, 이 동네에서는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곳인데! 나 공부 좀 하거든요?”
“그래, 그래.”
다들 말은 그렇게 한다. 정해영도 말로는 공부를 잘했다.
……최나라 교복이 이상하게 눈에 익은데. 별 무늬 없는 치마에 조끼. 검정과 흰색, 파란 줄이 섞여 있는 넥타이. 눈썰미가 나쁜 편은 아니니까 내 감은 믿어도 좋다.
그리고 잊으면 안 되는 게, 최나라는 등장인물이다. 보통 드라마에서 그렇듯 여기도 등장인물끼리 다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한평원 가족과 박서원이 연결되어 있듯이.
최나라는 심드렁한 내 반응에 씩씩거리다가 물었다.
“진짠데. 오빠는 얼마나 공부를 잘해서 그래요?”
저 교복을 어디서 봤는지 고민하며 내가 졸업한 대학을 말해 주었다. 최나라가 펄쩍 뛰었다.
“오빠, 공부 잘했어요?”
“지금은 기억 안 나.”
“하긴 오빠 원래 새날 직원이라고 했죠…….”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교복 입은 애를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기껏 해 봐야 최나라나…….
아, 그 아이인가? 백조 두 마리의 여동생?
걔가 입고 있던 교복이 저거랑 비슷해 보이기는 한데…….
“쳇, 그럼 내가 꼭 오빠보다 더 등급 높은 대학에 가고 만다.”
의심은 가는데 최나라한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너희 학교에 혹시 오빠 저주 푼다고 말 못 하는 아이가 있지 않아?’
수상해 보인다.
대신 나는 최나라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수능 칠 때 엿이나 사 주마.”
“……어감이 이상한데. 욕하는 거 아니죠?”
“사 주지 말까?”
“아뇨, 사 줘요…….”
최나라는 패잔병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학교로 돌아갔다. 지금 돌아가면 딱 맞춰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겠네.
나는 최나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며 어수선한 현장을 보았다.
아침부터 요괴대책팀의 연락을 받고 나왔다. 부지런한 요괴다. 일찍 일어난다고 해서 벌레를 먹을 수 있는 세상도 아닌데.
“사슴 가죽은요?”
“거의 다 왔답니다.”
뒤늦게 현장으로 온 임상규는 다른 팀원들에게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하다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침부터 고생하십니다, 해준 씨.”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요괴를 가두고 있는 차단막을 확인했다. 차단막 안에는 최나라의 불에 노릇노릇 구워진 돼지가 쓰러져 있었다.
물론 보통 돼지는 아니었다. 불에 구워졌긴 해도 황금빛 털이 아침 햇살 아래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뭘요. 저렇게 태워도 안 죽는다면서요?”
아무리 봐도 죽은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살아 있다나 뭐라나. 저놈을 제대로 죽이기 위해서는 특수 가공한 물건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차단막으로 가둬 두고 있었다.
학생인 최나라는 돌아갔지만 돼지를 가둔 차단막 주위에는 다른 초능력자들도 대기하고 있기도 했고.
“금돼지, 이놈은 서울에서 보기 힘들거든요.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어디서 나오는 놈입니까?”
“경상도 쪽이요. 옛날에 가죽 때문에 많이 잡아서 지금은 개체 수도 줄었습니다. 밑에서도 보기 힘든 놈이 왜 여기까지 와서 난리인지…….”
임상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쥐를 잔뜩 잡아서 한시름 덜었더니 다른 게 말썽입니다. 아주 골치가 아파요.”
“가죽 도착했습니다!”
“아, 해준 씨, 차단막 좀 풀어 주시겠습니까?”
“네.”
신호에 맞춰 차단막을 해제하자 요괴대책팀 사람 몇 명이 달려들어 금돼지 목에 가죽 한 장을 내려놓았다. 공무원이지만 저 사람들도 고생한다 싶었다.
“꽤애애액!!”
최나라가 힘껏 태워버린 금돼지는 죽은 듯 꼼짝 안 하더니 가죽이 닿자마자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저런 요괴들은 대처법이 다 따로 있습니다. 그걸 초능력자들이 전부 익혀서 대처하는 건 힘드니, 저희가 숙지하고 있다가 그때그때 적절한 초능력자의 도움을 얻어 퇴치하는 거죠.”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오는 작업이다.
“고생 많으십니다…….”
“다 돈 받고 하는 일인걸요.”
원래 세상에서는 돈 받고 노래 부르는 일을 하던 임상규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은 금돼지 주위로 금줄이 쳐졌다. 저만한 사체를 처리하는 것도 일이겠다 싶었다. 잠깐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임상규에게 물었다.
“혹시 이런 요괴나 관련된 물건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능력 연구 겸 공부 좀 해 두려고요. 그런데 생각보다 자료가 별로 없더라고요.”
단청에서 준 자료집은 국내와 요괴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위험 등급 요괴만 자세하게 적혀있지 무해한 놈들은 언급만 하고 지나갔다. 나는 그보다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다. 인터넷은 가볍게 보긴 좋지만 심도 있는 내용은 나오지 않고.
“와…….”
임상규는 감동받은 얼굴로 날 보았다.
“공부하시는 초능력자도 다 보네요……. 다른 분들도 해준 씨처럼만 해 주면 정말 좋은데.”
나도 다른 꿍꿍이가 있으니 떳떳하진 않지만 알아서 오해해 준다는데 나쁠 건 없다.
“일반 서적으로는 힘들 거고, 중앙도서관 한번 가 보세요. 초능력 면허 인증받으면 관련 자료실 이용하실 수 있거든요.”
“다른 나라 이야기도 많습니까?”
“다른 나라요?”
“얼마 전에 그, 저주로 백조가 된 분들을 우연히 만났거든요. 그걸 보니 좀 궁금해져서…….”
“아, 백 쌍둥이 만났어요? 덕분에 우리도 골치 아프다니까요……. 어지간히 알려진 이야기라면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보를 얻는 건 중요하다. 여의주가 아니더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한다.
소원을 이뤄 주는 내용이 나오는 동화는 분명 많다. 내가 기억하는 동화만 해도 몇 개 있다. 그게 진짜 현실의 동화인지는 모르겠고, 맞는다고 해도 여기서는 다르게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 꼭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물건이라도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나를 집으로 보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목격됐다던 뱀은 찾았습니까?”
“아뇨, 꼬리가 영 안 잡힙니다.”
임상규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얌전한 놈이면 좋을 텐데, 보통 뱀들은 포악한 놈들이 많아서요.”
“어떤 놈인지는 알고요?”
이무기는 뱀 요괴에 속하지만 모든 뱀 요괴가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뱀이 수련을 하면 이무기가 된다고 하니 어쩌면 여의주를 가지고 있을지도…….
젠장, 나도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돌아가게 되면 정해영 등짝 하나로 안 끝낼 거다. 걔는 좀 혼나야 한다.
“아직 확신은 못 합니다만, 원래 그쪽 지방에 신선비가 많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선비 아닐까 싶습니다.”
신선비……. 그건가? 구렁덩덩 신선비?
“그럼 저 말고 누가 또 대기하고 있습니까?”
“서울에서는 해준 씨 말고는 손요운 씨와 이세빈 씨, 이다혜 씨 정도가 되겠습니다.”
모르는 이름과 아는 이름이 나열되었다.
“백주하 씨와 백주연 씨가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이 두 사람은 움직일 상황이 아니니까요.”
“……박서원 씨는 안 갑니까?”
“단청을 통해서 연락을 넣긴 했습니다. 워낙 바빠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임상규는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대충 상황은 그렇고, 찾는 대로 연락이 갈 테니까 그 전까지는 평소처럼 지내시면 됩니다.”
평소처럼 지내라고 해 봤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결국 정보가 제일 중요하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과, 이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때마침 손에 쥔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는 아니다.
[이유나 : 해준 씨 뭐 해요?]
드라마 등장인물인 이유나다.
[정해준 : 비상근무하고, 집에 가는 중이요]
[이유나 : 그럼 오늘은 더 일 없는 거예요?]
[정해준 : 아마도?]
[이유나 : 그럼 회사 잠깐 들릴래요?]
[정해준 : 왜요?]
이유나는 대답 대신 사진을 하나 보냈다. 잠깐 기다리자 로딩이 끝나고 봉제인형 하나가 나타났다.
화환을 쓴 청룡 봉제인형이다. 알록달록한 화환에 맞춰 청룡도 어쩐지 묘한 분홍빛을 띠고 있다.
[이유나 : 새로 나온 청룡님 인형이에요.]
[이유나 : 해준 씨 청룡님 좋아하잖아요?]
[이유나 : 차장님이 따로 챙겨 놨으니까 가져가래요.]
[이유나 :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