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18. 오래된 통장(2)
인정하자.
나는 많은 면에서 노력하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생각해 봐라. 어느 날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이유는 없다. 잘못한 것도 없다.
내가 원한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내가 왜 노력을 해야 해?
내가 뭘 잘못해서?
그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특별한 징조조차 없었다. 차라리 내가 보던 드라마나 영화, 하다못해 책이어도 이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을 거다.
왜 하필?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내게 말하는데,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독한 꿈에 가까웠다. 어쩌면 내가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게는 기억이 있었다. 초능력 따위 없는 세상. 정해영이 드라마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기억.
그저 한숨 자고 일어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처럼.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가질 거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수고를 들이기 싫었다. 억울한 마음은 있었지. 억지로 끌려온 것이니까.
그래서 아무래도 좋았다. 호랑이니 서천꽃이니. 초능력이고 간에 그러려니 했다.
왜?
어차피 이곳은 현실이 아니니까.
정해영이 보던 드라마가 케이블에서 제작한 거라고 해도 결국 한국 드라마다. 보통 한국 드라마는 자극적인 법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왜 그렇게 되냐고 해 봤자 할 말은 없다. 자극적인 조미료를 잔뜩 친 세상인데. 하나하나 반응하고 놀라는 쪽이 더 피곤하다.
물론 현실에는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보면 놀라기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뭐? 영화에서 용이 나온다고 기겁한 적 있나? 어차피 영화관에서 나오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내게는 이 세상이 그랬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다.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근거는 없어도, 내가 이곳으로 넘어온 것도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라고.”
하지만 알고 있던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저기 저 학생은…….’
‘쉿, 나머지 가족이 전부 다 죽었대.’
‘전부?’
‘부모와 여동생이라고 들었는데.’
‘아이고…….’
‘친척들도 모두 휘말렸다는데 어쩜 좋아.’
새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사진이 떠오른다. 엄마와 아빠. 어린 정해영. 그 양옆으로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이 잔뜩 있다. 모두 국화꽃에 파묻혀 있다.
‘저쪽에도 고등학생 하나가 가족 다 죽었다더라.’
‘하필이면 주거 단지와 병원을 덮쳐서……. 너무 많이 죽었어.’
넋을 놓은 사람들. 엉엉 우는 사람들. 아냐,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내 기억이 아니라고!
알고 있던 기억이 사라지고 낯선 기억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통장에 찍힌 아홉 자리 숫자들이 눈앞에 맴돌았다.
내가 아무래도 좋았던 건 이곳이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
그렇다고 세 명분의 사망보험금이 있는 통장까지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다.
새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사진을 앞에 두고 18살의 내가 멍한 얼굴을 했다. 장례를 치를 사진도 구하기 힘들어 여동생이 다니던 학교와 아버지의 회사에 수도 없이 전화했다.
정해영이 다니던 초등학교도 피해 지역에 들어있다.
‘진짜 죄송한데, 여동생 사진이 없어서요……. 진짜, 진짜 죄송한데요, 우리 해영이랑 같이 찍은 사진 없으세요? 한 장만, 한 장만 제발 부탁드려요.’
정해영과 같은 반 아이의 부모님에게 무릎을 꿇었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아주머니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사진 한 장을 반으로 찢어 건넸다. 불에 탄 흔적이 있었다.
‘다 주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 아이 사진도, 별로 없어서…….’
‘아뇨, 이것만으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정해영의 생일 때 그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정해영.
내 기억이 아니다.
‘학생, 많이 힘든 거 알아. 여기 이거, 아버지 물건이야.’
봉사자 하나가 내게 작은 상자를 주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온전하게 시체가 발견된 건 아버지뿐이었다.
상자 속에 있는 지갑을 잡았다. 불에 그슬린 자국이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버지는 여기에 연애 시절 사진을 넣고 다녔다. 옛날이어도 좋으니까, 부모님 사진이 필요했다.
내 기억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부모님과 12살 생일의 정해영이 국화꽃과 함께 웃고 있다.
내 기억이 아니다.
내 기억이 아니라고.
내 기억이 아니란 말야.
‘오빠오빠오빠오빠!’
‘왜.’
‘나 용돈 주면 안 돼?’
‘네 용돈은 어쩌고.’
‘개강해서 돈 나갈 데가 많아서 그래. 응?’
‘이럴 때만 오빠지?’
12살에 죽은 정해영이 아니라, 21살의 정해영이 헤벌쭉 웃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그 얼굴이 지워지고 12살의 정해영이 나타났다.
‘오빠! 나 생일선물!’
‘아까 풍선 사 줬잖아!’
‘그게 왜 생일선물이야! 나 곰인형 가지고 싶어!!’
‘그거 작년에도 사 줬잖아.’
‘그건 작년이고, 난 올해 곰인형이 필요해.’
그래서 결국 그 곰인형 사 줬다.
채 반년을 가지고 놀지 못했지만.
아니,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내가 아는 정해영은 올해 22살이 되는 정해영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대학 생활을 즐기던 22살의 정해영.
걔는 그런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애다. 12살에 죽지 않고.
손안에서 통장이 구겨졌다.
어차피 쓰지 않을 돈이니 상관없다. 당장이라도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런 돈이라도 가족의 흔적이었다.
남아 있는 게 겨우 조잡한 가족사진과 보험금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 * *
“……담배 피우고 싶다.”
군대에서 피다가 엄마가 기관지가 안 좋아서 끊었다. 이런 기분일 때는 피워야 하는데.
어차피 여긴 엄마도…….
아니,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기억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 엄마는 잘 살고 있다.
“씨발…….”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본래 내가 살던 아파트와 같은 위치에 있다. 살고 있는 동네도 같다.
이 빌라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아파트 단지였다.
조용하고 동네였다. 여기서 오래 살았는데.
머릿속에서 장례식 풍경이 떠나지 않았다. 그게 진짜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오빠, 같이 보자니까? 이거 오빠도 좋아할 만한 내용이야.’
‘드라마 안 본다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여기, 이거 봐 봐. 드라마 장면인데, 청룡도 나오고 그래.’
‘요즘 드라마는 별 이상한 시도를 많이 하네.’
‘아, 진짜! 오빠가 좋아하는 아이돌도 나온다니까?’
그렇지만 여기가 현실이면 너무 잔인하다.
정해영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여대생이 된다. 평범하게 연예인을 좋아하고, 과제에 치여 죽는 그런 애.
여기의 정해영은? 그 아이가 어떻게 죽었을까. 평범하게 자라날 기회를 박탈당하고, 겨우 12살에 죽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할 나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현실이 되면 안 된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조용한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가 나타났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저쪽’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만 눈에 거슬리는 부분은 있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어쩐지 눈에는 익숙한 건물들.
한번 자각하고 나자 어떤 기억들이 섞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바뀐 지 오래되어 눈치채지 못한 기억들도 많을지 모른다.
세상이 바뀐 지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내 몸은 얼마나 이곳에 적응했을까?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며 손을 보았다. 살짝 정신을 집중하자 손이 하얗게 빛나며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
……초능력 같은 게 생길 거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나 주지. 이 능력으로는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나, 둘, 셋!”
조금 앞에서, 여자 두 명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직 지지 않은 벚꽃이 아파트 단지를 장식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활짝 핀 벚꽃을 보며 깔깔 웃었다.
나는 급하게 보호막을 없앴다. 다른 사람 눈에 띄어 좋을 건 없다.
천천히 걸어가며 벚꽃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이 모든 게 꿈같이 느껴졌다.
아니, 꿈은 맞지. 여긴 드라마니까.
사진을 찍은 여자들이 꺄르르 웃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문득 그 모습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이쪽의 기억은 아니다. 엄마 얘기니까.
한 5년 전쯤에, 엄마한테 새 취미가 생겼었다.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고, 엄마가 화면이 큰 스마트폰으로 휴대폰을 바꾸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원래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셨는데, 스마트폰은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 준 격이다.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다.
잘 나온 건 가족 메시지방에서 자랑하곤 했다. 정해영은 정신 사나운 이모티콘을 쓰며 칭찬했고,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엄마가 찍은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지정하곤 했다.
하늘, 꽃, 나무, 육교, 음식…….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모델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피사체는 가족이었다. 아빠와 정해영, 나.
작년 엄마 생신 때, 정해영이 엄마가 찍은 가족사진을 인화해서 선물로 주었다. 몇 장은 거실 장식장 위에 자리 잡았다. 장식장 위에는 그런 사진들이 많았다. 부모님 결혼사진, 나나 정해영의 아기 때 사진.
내가 떠올린 기억은, 우리 집에는 사진이 많았다는 거다.
앨범도 많았다. 그 앨범 중에는 정해영이 12살 생일 때 친구네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 놀러 가 찍은 사진도 있다.
지금의 내 방에 남아 있는 정해영의 사진과 같은 배경으로.
“…….”
아마 이곳에서도 엄마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겠지. 가족 앨범도 많이 만들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건 겨우 가족사진 한 장뿐이다.
아니, 그것도 가족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말도 안 되는 곳이 잠깐이나마 현실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 이곳이 현실이라고 해 보자.
그럼 내게 남은 건 뭐지?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예상했던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신경질적으로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곳에서 내게 남은 게 뭐지?
가족은 모두 죽었다. 남아 있는 친척도 없다.
이런 상황이면 친구들도 어떻게 됐는지 뻔하다.
내게 남은 거?
억지로 가족사진이라 부르고 있는 세 장의 사진?
아니면 가족 사망보험금이 담긴 오래된 통장?
“……돌아가야 해.”
이곳은 절대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긴 드라마 속이다.
정해영이 좋아하는 드라마.
이곳은 드라마여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