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18. 오래된 통장(1)
“97,800원입니다.”
강원도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고 하면, 사실 거짓말이고, 한껏 늘어진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크고 작은 일은 여전히 일어나는 모양이지만 보호 능력이 필요할 정도의 규모의 일은 잘 없었다.
애초에 대한민국에는 보호 능력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보호 능력 없이 비상 상황을 해결한 기간이 길었다. 그러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보호 능력자가 있어도 실제로는 자주 부르진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서울은 센터가 세 군데나 있는 만큼 대기 능력자들도 많은 편이다. 오히려 서울보다는 다른 지역으로 불려 나가는 일이 많다.
“포인트 있으세요?”
“아니요.”
그래서 나는 따뜻한 봄날 아래, 방탕하게 뒹굴거리고 있다. 돈도 있겠다, 여행을 가면 딱 좋긴 하지만 절차가 귀찮아서 그건 말았다.
대신 인스턴트로 대충 때우던 식단에 변화를 주었다. 해 봤자 라면과 찌개 수준을 맴돌던 요리에 도전하기로 했다. 원래 요리는 시간과 돈과 공간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비싸고 부지런한 취미다.
······이 말은 갑자기 베이킹을 하겠다고 설치던 정해영이 했던 말이다. 정작 정해영은 쿠키 한 판을 굽고 때려치웠지만.
마트에서 장 본 것들을 정리하며 집을 둘러봤다.
방 네 개 욕실 두 개의 43평 아파트가 같은 이름의 오피스텔이 된 사실에도 슬슬 적응이 되었다.
······사실 이 코딱지만 한 집에서 살기 싫은 마음에 현실을 외면한 걸까?
아니, 아니다. 그보다 나는······.
혼자 살기는 적당한 크기다. 내가 기억하는 ‘내 방’과 물건들은 같다. 구석구석 뒤져 보면 차이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영부영 미루던 일이지만 한번은 찾아봐야 한다.
드르르륵.
식탁에 올려 뒀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항상 뭘 하려고만 하면 이 모양이지.”
난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네, 해준 씨. 요괴대책팀의 임상규입니다.”
임상규가 전화하는 일이야 뻔하다. 뭔가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이니까.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하하······ 제가 전화 드리는 일이 그것밖에 없습니까?”
물론 없다. 공무원이 업무 시간에 잡담 전화를 할 만큼 한가한 직종은 아니다. 요괴대책팀이면 더 그렇다.
“그럼 다른 일이라도?”
“그건 아니고요.”
거봐.
그래도 임상규가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급한 일은 아니다.
“해준 씨 혹시 뱀 좋아해요?”
“그냥 그런데요.”
“그래요? 잘됐습니다.”
장난치나.
“조만간 뱀 잡으러 갑시다.”
“네?”
* * *
뱀은 별로 안 좋아한다.
안 좋은 추억이 있는 건 아니고, 어릴 때 정해영을 데리고 동물원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정해영이 우겨서 파충류 관에 갔었는데, 거기서 정해영이 지 몸뚱이만 한 뱀을 몸에 감고 히죽히죽 웃은 게 트라우마 비슷한 걸로 남았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정해영이라서 그런가······?
여하튼 내가 뱀을 썩 안 좋아한다고 하니까 임상규는 말했다.
‘안 좋아하니까 더 잘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개소리지?
정해영은 비명을 지르며 바퀴벌레도 잘 때려잡지만 난 그런 야만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뱀을 잡으라 하시는데 어떻게 하겠나.
잡으러 가야지.
지금 당장 잡으러 가자는 건 아니었다. 경북에 있는 국립공원 등산객이 거대한 구렁이를 보고 신고했다.
‘지금은 목격담을 토대로 위치를 파악하는 중입니다. 구렁이는 위험등급이 높아서 최우선 처리 대상이거든요.’
위치를 확정하면 잡으러 갈 거고, 지금은 초능력자들 명단을 꾸리는 중이라는데······.
당장 여유는 있으니 집을 뒤지려던 건 잠깐 내려두고 뱀에 대해 공부해 보기로 했다.
공부. 가깝고도 먼 단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예전에 단청에 갔을 때 구민석이 준 자료를 떠올렸다.
공부······ 공부해야겠지. 그동안 애써 외면했는데 이젠 마주 볼 때가 왔다.
총 7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이 날 맞이했다. 들고 오느라 힘들었다. 차라리 파일로 줄 것이지.
뱀······ 뱀······.
여기 있다.
[국내의 뱀]
우리나라에 뱀이 이렇게 많았나. 빽빽한 항목을 보자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뱀은 한반도 전 지역에서 발견되며 치악산의 구렁이(이무기)가 유명하다.]
[은혜 갚는 종류가 있는 반면, 인간에게 적의를 가지는 종류도 있다. 구분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무기나 강철이같이 큰 종류가 해악을 끼치면 큰 피해가 일어나므로 보통 사냥에 목표를 두고 있다.]
[······크게 보면 이무기와 용도 뱀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용은 포함하지 않지만 이무기는 생김새부터 뱀과 비슷하며, 서식지나 활동 양식 또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무기처럼 용의 하위 갈래라고 할 수 있는 강철이는 좀 더 뱀에 가깝다. 현재 가장 유명한 강철이는 10년 전 참사를 일으킨 ‘산암’이 있으며 행방은 알 수 없다.]
검은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니.
대학교 전공책도 이렇게 빡빡하진 않았다. 대학 졸업 이후로 공부 같은 건 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었다.
“······청소나 할까.”
원래 공부할 땐 공부 빼고 다 재밌다.
* * *
“도대체 복숭아 냄새는 언제 빠지는 거야.”
아직도 코끝에 은은하게 감도는 복숭아 냄새에 진저리를 치며 방향제를 꺼냈다.
의식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지만 가짜 선도를 올려놓았던 부근을 지나면 은근한 단 냄새가 맴돌긴 했다. 가짜라고 해도 공들여 만들었던 탓인지 냄새가 영 빠지질 않는다.
덕분에 내 방에도 냄새가 배어 옷장 안에서도 복숭아 냄새가 났다. 특히 겨울옷······. 이걸 어쩌면 좋냐.
통장에 있는 돈을 떠올렸다. 어차피 여유가 있다 못해 넘쳐나는데 다 버리고 새로 살까? 겨울도 다 지났는데.
솔직히 지금은 하는 일도 없어서 이 돈을 그대로 써도 되는지 양심이 좀 아프긴 했지만 어쨌든 준 돈 아닌가? 나중에 밥값 하면 되겠지.
마음먹은 김에 해치우자.
옷장에서 겨울옷을 뭉텅이로 꺼냈다. 복숭아가 터진 건 부엌 쪽인데 왜 여기서 냄새가 더 나는지 모르겠다.
버릴 옷들을 거실에 쌓아 뒀다. 기억 속에 있는 내 옷장과 달라진 점이 없다. 취직 준비한다고 샀던 정장이나, 지난 가을에 샀던 스웨터,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 샀던 롱패딩까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파트가 오피스텔이 된 걸 빼면 크게 차이는 없나. 가족과 친구가 모조리 사라진 점도 뺀다면.
기억에 있는 옷도 그대로고, 물건도 바뀐 게 없다. 1인 가구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냉장고도 내 기억 속의 ‘집’에 있던 냉장고와 똑같은 모델이다. 4인 가족이 쓰던 그 냉장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디가 진짜인 거냐고.
혀를 끌끌 차며 옷을 그대로 버리려고 하다가 혹시 몰라서 옆에 앉아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이나 지폐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뭔가 중요한 걸 적어 놓은 쪽지라도.
“······.”
쓰레기도 있지만.
언제 먹었는지도 모르는 껌 종이를 버린 후 다른 옷을 주워들었다. 얘는 주머니가 두툼해 보여서, 조금 기대가 됐다. 돈 봉투라도 들어있지 않을까?
“······통장?”
아니, 뭐······. 이것도 돈 봉투라면 돈 봉투기는 한데.
문제는,
“처음 보는 건데?”
내 기억에 없는 통장이라는 거다.
찝찝한 기분에 열어보기가 겁났다. 도대체 무슨 통장이라 겨울옷에 이렇게 처박혀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리는 건 자잘한 잔돈뿐이지 이런 통장을 넣고 잊어버리진 않는데. 설마 내 통장이 아닌 건가? 그럼 더 큰일인데?
무슨 폭탄을 열어보는 심정으로 눈을 반쯤 뜬 채 통장 첫 장을 펼쳤다.
······다행히 내 이름이 적혀 있다. 정해준.
일단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점에 안도했다.
안심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통장은 발급받은 지 오래되었는지 끝이 닳아 있었다.
뒤에서부터 펼쳐 마지막으로 통장을 쓴 날을 확인했다. 저쪽에서도 내가 만든 지 오래되어 깜빡한 통장일 수도 있다. 얼마 들었을지나 확인하자.
그렇게 일찍 마음을 놓아선 안 되는 일이었는데.
“······이게, 얼마야?”
처음 영문을 모른 채 주변 상황을 파악했을 때를 떠올렸다. 연초에만 해도 통장에 있던 돈은 60만 원에 불과했다. 저쪽에서도 그랬으니 난 내 전 재산이 그건 줄 알았지.
무슨 돈인지 모르겠는데 마지막에 찍힌 잔고가 너무 당황스러운 숫자였다. 진짜 무슨 돈이야?
그러니까······ 무려 9억. 자잘한 숫자를 다 떼고도 9억이다.
“······?”
이쪽의 나는 위험한 세계에 몸담고 있었나? 단청에서 지급된 후원금을 봤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현실감 없는 숫자다.
내 통장이니 내 돈이 맞는 것 같지만, 이만한 돈이 있는데 안 썼다고? 왜?
오래된 통장에는 몇 번 돈을 쓴 흔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2015년이 마지막이다. 꽤 큰돈이 나갔는데 완전히 낯선 숫자는 아니었다. 돈을 보낸 곳도, 그러니까.
이거 대학등록금 아냐?
시기와 금액이 얼추 맞아떨어진다.
속으로 신음을 삼키다가 제일 위를 보았다. 처음 이 돈이 들어왔을 때.
다른 건 둘째 치고, 어디서 이 돈을 보내 줬는지 보았다.
‘ECM 생명.’
이게 뭔지는 안다. 보험사잖아.
“······.”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장만 봤다.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었다. 역시 여긴 드라마다. 드라마겠지.
처음 돈이 입금된 날짜.
2009년. 10년 전.
숨이 턱 막혔다.
손이 자꾸만 떨렸다. 몇 번이고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인터넷을 켤 수 있었다.
검색······ 뭘, 뭘 검색해야 하지?
10년 전, 10년 전 뭐?
그때,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배너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글이 있었다.
‘끔찍했던 뱀의 재해, 그로부터 10년.’
뱀······.
뱀.
그래. 아까 보았던 자료에도 있었다.
[현재 가장 유명한 강철이는 10년 전 참사를 일으킨 ‘산암’이 있으며 행방은 알 수 없다.]
용이 되지 못하고 타락한 이무기를 강철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10년 전 날뛰어 큰 피해를 입힌 강철이가 있다. 강철이 ‘산암’.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10년’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나왔다.
한평원의 아버지, 한훈열의 뒤를 이은 내 직전의 보호 능력자가 죽은 ‘10년’ 전.
한평화가 서천꽃을 싹 틔웠다는 ‘10년’ 전.
이것도 관계있는지 모르겠지만, 박서원이 한훈열을 찾아간 것도 수능 치는 나이랬으니 얼추 ‘10년’ 전의 일이다.
그래, 박서원이 능력을 각성한 것도 ‘10년’ 전이라고 했고.
그리고······.
나는 방에 있는 사진을 떠올렸다. 같이 찍지 않은 가족사진.
12살 생일, 놀이동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정해영의 사진.
정해영이 그 사진을 찍은 것도 ‘10년’ 전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멍청해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의 주요 키워드는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아마 나도······.
나는 가족사진을 보았다. 내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는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동안 질리도록 봤다.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젊은 부모님이 찍었던 사진.
놀이동산에서 찍은 정해영의 사진.
어두운 안색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는 내 증명사진.
“······씨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