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17. 우리 언니(4)
한훈열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네 누나가 먼저 꺼낸 말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한평원은 안절부절못했다.
“곰 아가씨가 도와줄 거다. 걱정하지 말거라.”
“누나도 자기 힘을 감당 못 하는데 진짜 괜찮아요?”
“곰 아가씨 나이가 250살이라는데 우리 같이 100살도 안 된 놈들이 붙어 있는 것보단 낫겠지.”
“난 100살이거든?”
“나이를 뒷구멍으로 처먹어서는 입만 살았지.”
한훈열은 한진열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봄이라 그런 거니 여름이 되면 좀 진정되겠지. 아니면 네가 붙어 있으려?”
한평원이 멈칫했다.
“그건 좀······. 누나가 싫어할걸요.”
“누나 핑계 대기는.”
······가족회의 자리에 참관객으로 앉아 있는 기분이었고, 실제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제 슬슬 한평화가 인간인지도 헷갈린다.
“그리고 평화가 허락해 줬으니 장규혁이도 한결 나을 거다. 쯧, 여기서 제주도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그걸 그렇게 하다니. 미련한 것도 정도가 있지.”
가족 이야기에 끼는 건 좀 그렇지만 장규혁 이야기는 괜찮겠지.
이곳이 드라마인지 현실인지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은 내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여기가 드라마라고 외치고 있다. 이곳이 현실이었다면 초능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렇잖아.
“장규혁 씨가 그동안 무리하고 있었습니까?”
“책임감이 너무 강해도 문제야. 나 같으면 그냥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둘 텐데.”
딱! 한훈열이 한진열의 머리를 후려쳤다. 한진열은 억울한 눈으로 한훈열을 보았다.
“네가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쯧, 꽃밭을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무리한 거지.”
“······저, 살살이꽃밭이면, 규혁 씨가 다른 사람한테 맡긴 거 아닙니까?”
물을 많이 맞으면 썩기 시작하는 꽃이다. 비가 올 때 방수 천을 둘러 줄 사람이 없으면 그 노란 꽃밭은 금방 썩은 내를 풍기기 시작할 거다, 그 뒷감당을 하기 싫으면 따로 사람을 두는 게 낫다.
“관리야 장규혁이가 계속하지.”
“규혁 씨는 여기 있잖습니까?”
“아, 정해준이, 자네. 장규혁이 능력을 못 들었는가?”
“네.”
몇 번 물어보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 물어보지 못했다. 한훈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장규혁이 능력은 분신이야. 본체와 거리가 멀수록 유지하기가 힘들지. 그래서 식사자리에서 곰 아가씨가 부지런하게 장규혁이한테 몸보신할 고기를 나르지 않았나?”
* * *
분신이라. 그래. 그럴 수 있지.
보호 같은 애매한 개념의 능력보다 분신같이 직관적인 능력이 사는 데 더 도움 될 거다.
하기야, 물이나 불을 만들어내고 중력도 조종하고, 빠르게 움직이거나 하다못해 미래를 보는 능력까지 있는데 분신이 없을 리가 있나.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을 얕봤다.
이곳이 현실이라도 당연하다. 사람 수만큼 생각도 다양한데 초능력이라고 오죽할까. 여태 초능력을 얕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을 얕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슬슬 내려가야죠?”
한평원은 익숙하게 차를 내왔다. 하얀 꽃잎이 보였다. 뼈살이꽃이다.
겨울잠 자는 곰 때문에 제주도에서 잠깐 지낼 때 장규혁이 내준 대부분의 음식에 살살이꽃이 들어갔던 것처럼 여기서도 뼈살이꽃이 많이 보였다. 살살이꽃처럼 국에도 들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뼈살이꽃잎 무침은 좀 놀랐다. 뼈에 좋은 음식이라고 해봤자 우유의 진화 식품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뼈살이꽃의 효능은 과학적으로 증명됐어요. 이따 갈 때 좀 챙겨드릴까요?”
“마트에서도 팔던데. 산지에서 나는 것과는 다릅니까?”
“뼈살이꽃 100퍼센트와 0.3퍼센트는 차이가 나지 않을까요?”
아, 네······. 이런 면에서는 저쪽이나 이쪽이나 별 차이가 없다.
“어차피 서천꽃은 계절을 타지 않아서 일 년 내내 일정한 양은 나오거든요. 근데 사람이 가꾸는 거라 한계가 있어서 물량 자체는 크게 많지 않아요. 대형마트 아니면 잘 없다고요. 사업하자는 사람도 있긴 했는데 할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 주셔서······.”
내 눈빛이 이상했는지 한평원이 변명했다. 별로 변명을 바란 건 아니지만 말하니 들어는 줬다.
장규혁이 관리하는 걸 옆에서 봤을 때 귀찮긴 했지만 까다로울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건 아니었다. 장규혁이나 한평화가 혼자 관리해서 그렇지 사람만 몇 명 더 쓰면 힘들지도 않을 거다. 이렇게 작은 규모로 운영할 필요도 없고.
“······지금 해준 씨 생각하는 게, 딱 구차한 변명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내가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사극도 아니고 그냥 초능력을 접목한 판타지 드라마치고 너무 구석구석 설정이 잡혀있다. 차라리 이게 소설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무슨 드라마에서 함유량까지 따지나? 관련된 에피소드라도 있는 걸까?
······이런 설정들이 내가 이곳이 ‘현실’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마냥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귀찮은 설정이 많은 세계다.
“······맞는 말이죠. 어차피 서천꽃 관리는 어디까지나 누나가 하고, 누나가 없으면 없어질 건데요, 뭐.”
어젯밤에도, 새벽의 한진열도 그런 골조의 이야기를 했었다.
한평화가 서천농원, 그러니까 서천꽃밭을 만들었고 한평화가 없으면 사라질 거라고.
“저, 평원 씨 누나 분은 그러니까, 어떤 능력을······?”
한평원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이거 비밀인데······.”
보통 이렇게 시작되는 말은 들으면 후회하는 종류다. 한평원은 전적도 있다.
“······비밀이면 안 듣겠습니다.”
“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어디 가서 얘기만 안 하면 돼요!”
“그럼 중요한 비밀 아닙니까? 그걸 뭘 믿고 알려 줍니까?”
비밀 같은 건 아니었지만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회사 잘리게 해 주겠다던 놈이 있었다.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해서 한평원을 보자 한평원은 해맑게 웃었다.
“해준 씨는 어디 가서 얘기할 분이 아니잖아요!”
······.
그동안 인류애를 너무 잃었다. 가슴이 찡해지다 못해 양심이 아팠다.
“한평원 씨, 절대 사업하지 마세요.”
사이코패스 역 맡았다고 내심 피하고 있었는데 이런 착한 사람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역시 사람은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사실 그건 첫인상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영화······ 따지면 다른 세상 이야기잖냐.
“우리 외할머니가 신기가 있으세요. 그러니까, 꽤 유명한 무당분이셨거든요.”
근데 솔직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뭐하시고 사셨는지보다 한평원네 집안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집안이 집안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한평원네 정도 되는 집안이면 저쪽에서도 많이 들을 이야기다. 3대가 내리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대한민국에 살면 한 번 이상은 듣게 된다.
“원래 서천꽃은 우리나라에 거의 남아 있지 않거든요. 옛날에는 좀 더 많았다고 했는데 할아버지 말로는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없어졌다고 들었대요.”
“전기요?”
“아마 땅이 발전해서 그런 거 아닐까 해요. 서천꽃은 원래 이승에 있는 꽃이 아니니까 저승으로 돌아간 거라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효능을 가진 서천꽃들이다. 저쪽 세상에 있었으면 엄청 난리가 났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없어져야 할 꽃이에요. 실제로 북한은 몰라도 남한에서는 보지 못한 지 꽤 됐거든요.”
나는 창문 너머로 새하얀 꽃밭을 보았다. 제주도의 서천농원이 남한 유일한 살살이꽃밭이듯 이곳도 유일한 뼈살이꽃밭일 터였다.
“누나는 초능력자는 아니에요. 근데 외할머니가 무당이시거든요? 누나는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왜, 보통 사람은 못 보는 걸 보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우리 누나가 그래요.”
타임. 아니, 잠깐만. 타임!
여기 그냥 초능력만 있는 거 아니었어? 장르가 판타지 아니었냐고! 주술이니 뭐니 얘기는 있었어도 왜 갑자기 호러? 장르 좀 지키라고!
“그렇다고 누나가 무당인 건 아니고······.”
당황하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여기가 드라마라고 가정하자.
본명이 뭔지는 기억 안 나지만 한평화는 정해영이 무려 ‘우리 언니’라고 끼고 노래를 불렀던 애다. 그런 캐릭터의 배경이 ‘그런 게 있었죠.’ 따위로 끝나진 않을 거다.
“그냥 잘 보는 애였는데 10년 전쯤에 사고가 있었거든요.”
그래, 뭔 저주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부적 같은 게 생활용품으로 추천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일종의 초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긴 한데, 그보다는 역시 주술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저주를 막을 수 있는 부적이 생활용품이면 저주를 거는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인가? 이쪽은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그때 할아버지 집에 있었는데, 누나가 이 일대를 영역으로 잡으면서 여긴 우리 가족들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게 되었거든요.”
이런 위험한 곳이 현실 세계일 리 없다.
“······그렇게 누나가 꽃을 피우게 된 거예요.”
“마지막 과정이 좀 생략된 것 같은데요, 평원 씨.”
“어, 그런가요?”
한 평원은 하하, 웃었다.
“누나가 명맥이 끊긴 서천꽃을 다시 피웠어요. 할아버지는 없어져야 할 꽃이라고 정부가 애걸복걸했는데도 딱 누나가 아슬아슬하게 유지할 크기만 놔두게 했어요. 그나마도 어린 산주인들과 같이 제주도로 살살이꽃을 보내 버렸죠.”
산속에 숨겨져 있던 꽃밭을 떠올렸다. 관리인 하나, 호랑이 다섯. 이제 곰이 한 마리 늘었지만 유일하다는 말이 붙은 꽃을 관리하는 데에는 적합한 인원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워낙 찾아와서 피살이꽃은 제한을 안 뒀어요. 대신 살살이꽃과 뼈살이꽃은 겨우 꽃차로만 먹을 수 있고요. 사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그런 효능이 있는 꽃차라고 생각하지 꽃송이를 흔들면 뼈가 붙고 살이 차오르는 서천꽃이라고는 생각 안 할걸요? 다치는 일이 많은 초능력자들이면 몰라도.”
“······그럼 평화 씨는?”
사실 물을 필요도 없다.
서천꽃밭에 무당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예상은 갔다. 살살이꽃, 피살이꽃, 뼈살이꽃이 나오는 이야기는 뻔하다. 처음부터 서천농원이라고 대놓고 나왔다.
한 평원은 누나보다도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승에 있는 서천꽃밭을 불러오는 무당이죠.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바리데기일까요.”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이걸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얘가 드라마 등장인물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 가정사에 이렇게 엮이고 싶지 않다. TV로 보는 것과 눈앞에서 듣는 건 다르다.
“뭐, 누나가 반쯤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꽃밭이니까 해준 씨도 누나한테 잘 보여 봐요. 꽃차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꽃송이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한평화의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라는 소리다. 서천농원의 운명은.
정부 사업이라 하기엔 너무 주먹구구식이고, 개인 사업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름이 무겁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엮여 있다.
드라마라서 가능한 설정일까?
······이곳이 현실이라고 치면, 한훈열이 버티고 있으니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겠지.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와 호랑이는 꽤 무서울 거다.
“또 궁금한 거 있어요?”
“아뇨.”
얌전한 얼굴로 웃고 있는 한 평원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평화가 서천꽃을 피워 낸 게 10년 전이라. 한평원의 아버지도 10년 전에 죽었다고 했다.
궁금한 건 있다. 내가 아는 서천꽃밭의 꽃은 네 송이라는 점이다. 뼈살이꽃,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
죽은 자에게 숨을 돌려준다는 숨살이꽃도 한평화는 피워 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