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17. 우리 언니(3)
강원서천농원에 있는 한평화의 집은 2층 저택이다. 산속에 있는 대피소 같은 모습의 한평화의 집에는 빈방도 많다.
내려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이곳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뼈살이꽃을 언제부터 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진짜 대피소로 사용하던 건물일 수도 있다.
거실에 잔뜩 있는 청룡 인형을 보면 한평화는 딱히 청소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다. 부엌에서 차를 가져오던 한평원도 설거지부터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비어 있는 방은 먼지 한 톨도 없이 깨끗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안 쓴 티는 났지만 청소는 되어 있었다.
나와 한평원이 같은 방을 쓰고, 한진열이 한훈열과 같이 있었다. 혜사는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한평화의 방에 들어갔다. 여자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는데······ 그건 종족이 달라도 해당되는 사항인가?
어쨌든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한평원은 바로 곯아떨어졌다. 속 편해 보이는 게 부러웠다.
난 누우면서 직감했다.
난 오늘 한숨도 자지 못한다.
한창 추울 때 드라마 속으로 들어왔다.
뉴스에서 잠실 타워를 감고 있는 청룡을 보자 여기가 드라마 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해영이 몇 달을 그렇게 떠들었는데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드라마 속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제 봄이 왔다. 봄이 오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했다.
한평원도 내가 알던 배우였다. 사이코패스 연기가 일품이어서 알아봤다.
물론 난 배우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타입은 아니다. 한평원도 그 영화에서 사이코패스 연기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이름보다는 싸패고딩으로 더 유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명을 기억 못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왜 이제야 이걸 알았는지 모르겠다. 한평원 전에 임상규를, 그 전에는 구민석도 있는데.
아니, 애초에 이유나도 있었잖아. 내가 모르는 애도 아니었고, 아이돌인데. 그것도 아는 아이돌이었는데.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어둠 속에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왜?
백번 양보해서 영화에서 한 번 봤을 뿐인 한평원의 본명, 그러니까 배우 이름을 기억 못 하는 거야 그럴 수 있다. 내가 걔 팬이었던 것도 아니고. 살인마 연기가 인상 깊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국민배우라는 구민석은? 내가 맨날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임상규는?
하다못해 매일 친구 새끼들이랑 있는 메시지 방에서 보았던 이유나는?
한평화마저 정해영이 ‘우리 언니, 우리 언니’라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씨발, 나보고 우리 오빠라고는 한 번도 안 하더니.
그게 전부 기억 안 난다고?
“너무하잖아.”
처음으로, 그동안 외면하고, 외면하고. 또 외면했던 가정을 마주했다.
‘사실 여기가 현실이고, 정해영이 가짜 아닐까?’
* * *
“으, 춥다.”
산속이라 그런지 입고 온 옷으로는 추웠다.
“입을래?”
한진열은 입고 있던 점퍼를 펄럭거렸다.
나는 염치를 아는 인간이므로 보통이라면 거절했겠지만 다행히도 한진열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호랑이는 시베리아에서도 살지 않던가.
“감사히.”
“얼굴은 왜 그래? 잠 설쳤어?”
“아, 뭐······.”
“잠자리 바뀌면 못 자? 예민하네.”
어디가 현실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인간은 잠을 못 잔다. 기억해 둬라.
“오늘 내려가야 하지?”
“네.”
한진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보이는 호랑이 귀가 쫑긋거렸다.
······.
만져 보고 싶다.
“왜?”
한진열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래. 곰방대는 너무 옛날이야기지.
“피울래?”
“아뇨. 담배 안 피웁니다.”
“그래?”
동네 양아치처럼 보이지만 한진열은 산주인, 그러니까 산신령이다. 담배를 아무리 피워도 폐암은 걸리지 않겠지. 그건 좀 부럽다.
“근데 왜?”
“네?”
“바라는 게 있는 눈친데.”
귀 만져도 되냐고 물어봐도 물려 죽진 않을까. 아냐, 내가 어디 가서 호랑이를 이렇게 가까이 보겠어.
그리고 요즘 세상에 호랑이한테 물려 죽으면 토픽감이다. 그것도 강원도에서.
세상에 태어난 김에 신문에 이름 한 번쯤은 올려야······.
잠이 부족하니 별 헛소리가 다 나오네.
“별로요.”
“거짓말하지 마. 난 다 알아.”
“산신령은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금도끼 은도끼가 왜 유명한 얘기겠어?”
우리나라 전래동화였나? 에라이, 드라마가 언제부터 원산지를 따졌겠어.
“그 이야기 나무꾼이 원하는 거 바로 안 줬잖습니까······.”
한진열은 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대신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진짜 바라는 거 없어?”
“없다니까요.”
“흠.”
한진열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봤다. 새벽 공기에 드러난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왜 자꾸 인간 모습인데 호랑이가 섞여서 나오는 거야. 사람 간 떨어지게.
한진열은 느긋하게 담배를 입에 물며 시야 가득 펼쳐진 꽃밭을 보았다. 나도 자연히 한진열의 시선을 따라갔다.
뼈살이꽃은 꽃송이가 크다. 새하얀 게 멀리서 보면 목화밭 같다. 그 새하얀 꽃송이들 사이로 밀짚모자 하나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한평화다.
“평화는 여길 싫어하지만 여길 좋아하거든.”
“······드라마 여주인공 같은 감정선인데요.”
“어릴 땐 때려치우고 몇 번 박차고 나간 적 있는데 결국 다시 돌아왔거든.”
신파 여주인공이세요?
밀짚모자는 어젯밤 보았던 것처럼 챙 위에 선글라스가 끼워져 있었다. 밤에 볼 땐 몰랐는데 이제 보니 싸구려 플라스틱 선글라스였다. 쓰는 것 같진 않은데 그냥 장식용인가? 점점 더 영문 모를 캐릭터다.
“지금도 봐라, 새벽같이 나와서 일하잖아. 쟨 꽃밭에 있을 때 제일 활기가 넘쳐.”
“적성이 맞나 봅니다.”
“적성?”
한진열은 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한평화가 들었을까 싶어 그쪽을 바라봤지만 밀짚모자는 여전히 하얀 꽃 사이에 있었다. 제주도의 살살이꽃보다 뼈살이꽃이 키가 훨씬 커 밀짚모자 말고는 한평화가 보이질 않았다. 꽃을 따고 있는 것만 어렴풋이 보였다.
“쟤가 이 꽃밭을 만들었는데 적성이 없으면 큰일 나지.”
“한평화 씨가 여길 가꾼 겁니까?”
“평화가 꽃을 피웠으니까.”
“원예에 소질이 있으신가 봅니다?”
“자기가 피운 꽃을 못 키우면 안 되지.”
······대화가 이상하게 빙빙 도는 기분인데.
“저렇게 안 돌봐도 평화가 있으면 알아서 피고 지고 다 할걸. 수확은 다른 이야기지만.”
한평화의 능력은 뭐 식물 키우기라도 되나. 식물용 테라피?
“······한평화 씨 능력입니까?”
“응? 아, 뭐,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한진열은 어깨를 으쓱였다.
“쟤가 없으면 서천농원도 없었을 테니까. 평화가 꽃을 피운 지도 15년 정도 됐지······.”
한진열은 아련한 눈으로 추억에 잠겼다. 근엄한 호랑이 모습이면 모를까 늘어진 티셔츠와 현란한 무늬의 몸빼 바지, 샛노란 머리통으로 저런 표정 지으면 꼴값······.
호랑이한테 사람 속을 읽는 능력은 없겠지?
“그런데 너 말야.”
한진열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 겨우 손가락 마디만 한 길이로 별짓을 다 한다 싶었다. 곰방대를 쥐고 있는 게 더 어울릴 포즈다. 생긴 건 저 담배가 맞긴 한데.
“혹시 복숭아랑 사이 나빠?”
“······네?”
산주인 정도 되는 호랑이라면 과일과도 사이가 나쁠 수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복숭아랑 무슨 일 있었어?”
“어······.”
가짜 복숭아 사건이 떠올랐다. 정해영 같은 복숭아. 냄새만 더럽게 좋았다.
“다른 사람이랑 냄새가 섞여서 긴가민가했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알겠네. 너한테서 복숭아 냄새나.”
거실에서 터진 복숭아를 뒤집어쓴 건 겨울의 이야기다. 그 복숭아가 얼마나 지독했던 없어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잘 익은 복숭아 냄새인데, 킁. 딱 썩기 직전의 냄새······. 아니지, 이미 썩었나? 정해준아, 너 살아 있는 거 맞니?”
“저도 제가 좀비인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 말하는 인간들은 보통 살아있더라.”
앞으로 최소 10년 동안 복숭아는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회사에서 위로 차원으로 줬던 선도복숭아 급이 아니면 안 먹을 거다. 내 입은 고급이니까.
“어쨌든 너 복숭아 조심해라.”
어른 말씀 안 들어서 좋을 거 하나 없고, 그건 100살 먹은 호랑이 말씀도 마찬가지일 거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잖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별 미친 복숭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진 않았다.
······이곳에 대해 알아갈수록, 여길 현실이라 여기게 되면 어쩌지.
* * *
“낭군님, 이것도 드시어요.”
혜사는 방긋방긋 웃으며 젓가락으로 고기반찬을 집어 장규혁의 밥 위에 올렸다. 장규혁은 텅 빈 눈동자로 쌀밥과 함께 고기반찬을 먹었다.
“낭군님 많이 힘드신가요? 그러게 꽃밭은 그냥 내버려 두지 그러셨어요.”
혜사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장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제 기운 빠져나갈 건 없으니 푹 쉬시면 괜찮을 거여요.”
······생각보다 사이가 많이 진전된 거 아냐?
저 두 사람이 드라마 등장인물인 건 확실하고, 처음에 질색하던 장규혁의 태도가 한 달 새에 이렇게까지 바뀐 걸 보면 진도는 나름대로 나가는 모양이다.
하긴, 거실에 앉아 드라마를 볼 때는 화면 전환이 자유로우니 주인공 말고도 다른 등장인물을 볼 수 있지만 여긴 아니지 않은가. 나도 주인공인 박서원이 뭘 하고 사는지는 모른다. 박서원이 어디 있는지 보려면 뉴스를 찾아보는 게 훨씬 빠르다.
한 달이면 뭐······. 뭣보다 저 곰이 어마어마하게 들이대지 않는가. 도대체 장규혁의 어떤 점이 곰의 마음을 강타했는진 모르지만 동굴에서부터 낭군님, 낭군님 거렸다.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마음에 봄바람 한 점 불 기간이다.
그리고 그런 장규혁의 맞은편에는 한평화가 있었다.
어제 엉엉 울며 짜증 내는 모습이 거짓말처럼 한평화는 새치름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긴 했지만 확실히 저 얼굴은 정해영의 ‘우리 언니’긴 하다. 콘서트에서 기타를 때려 부수는 영상이 남아 있는 여가수.
······본명은 여전히 기억 안 나지만.
간간이 혜사가 장규혁의 반찬을 챙겨 주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했다. 새벽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던 한진열도 이상하게 조용했고.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언니, 내가 할게.”
······?
식사가 끝나고 식탁을 치우려는데 여태 가만히 있던 한평화가 툭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언니라고 불릴 사람은······.
“어머머, 아니어요, 내가 하면 되어요.”
“아, 내가 손님한테 이런 일을 시키겠어?”
“어머나, 난 어여쁜 내 동생을 돕는 것이어요?”
······?
드라마를 보다가 한 편을 빼먹은 기분이다. 나만 그런가 싶어서 한평원을 돌아보니 걔도 눈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한다니까!”
한평화는 짜증을 냈지만 어제에 비하면 기세가 한풀 꺾여 있다. 그냥······ 적당히 부끄럼타는 정해영 정도로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실 내가 밤을 새우느라 하루를 건너뛴 걸까?
한평원이 내 팔을 툭툭 쳤다. 숨소리를 낮추며 슬쩍 눈치를 보다가 한평원을 따라 나갔다. 거실로 나오자 숨통이 좀 트였다.
“할아버지, 누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훈열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곰 아가씨가 평화 고놈을 붙잡고 이야기하더니 잘 해결된 모양이다.”
“너무 잘 해결됐지 않아요?! 누나 안 저렇잖아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생기면 좋지, 무얼. 어차피 곰 아가씨와 장규혁이도 한동안 여기 있을 텐데.”
“네?!”
한평원이 깜짝 놀랐다. 한진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넌 어차피 서울 돌아가잖아? 왜 놀라?”
“아니, 어떻게 안 놀라?”
거실 소파는 이미 호랑이들이 점령했다. 청룡 얼굴이 그려진 쿠션 하나가 호랑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용호상박이라더니 딱 그 꼴이다.
“어린 산주인 때문에 머무는 건 알겠는데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 저번에도 그랬잖아요.”
“그랬지.”
“누나가 허락했어요? 영역 침범당하면 별 지랄을 다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