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17. 우리 언니(2)
여자는 꽃 사이에서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꽃송이들이 여자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전구가, 위쪽에는 스키장처럼 환한 조명이 켜져 있어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크게 닮은 구석은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지는 뻔했다. 저 여자가 한평화. 즉 한훈열의 증손녀이자 한평원의 누나다.
……패션이 아주 비범하다.
“뭐야, 여긴 왜 온 거야?”
스팽글이 잔뜩 붙은 티셔츠와 몸빼 바지까지는 이해가 됐다. 제주서천농원에서 지냈을 때 옆에서 본 바, 농원의 노동 강도는 꽤 높았다. 일하는 데는 편한 옷이 최고지.
다만 100살 먹은 호랑이가 저거랑 같은 옷을 입고 있단 말이지. 한진열이 저 옷을 입고 있는 건 한평화의 영향인가.
“할아버지?”
한평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야, 한진열. 할아버지는 왜 모시고 와?”
“내, 내가 데리고 온 거 아니다…….”
한진열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묘한 기분이 되었다. 새로운 다크호스가 나타났다.
“얘가 어디서 구라를 까. 니가 데려온 거 아니면 누가 데려와?”
“다른 손님이 와서…….”
“손님은 손님이고.”
한평화를 혀를 쯧 찼다. 일하는 중이긴 했는지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밀짚모자도 쓰고 있었다.
……이미 해도 졌는데 저 밀짚모자는 무슨 소용이지?
아니, 밀짚모자까지는 그렇다 치자. 선글라스는 도대체 왜……?
밀짚모자의 챙 위로 선글라스가 조명에 비쳐 반짝였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이 사람이 범상치 않은 캐릭터 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놈이 버릇없게.”
“에이, 나 이런 거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한평화는 코웃음을 치며 아래로 내려왔다. 내려오다가 꽃이 담긴 바구니를 찼는지 파란색 플라스틱 통이 데굴데굴 굴러 아래로 떨어졌다. 담겨있던 꽃도 와르르 쏟아졌다.
“아, 씨발!”
한훈열은 이마를 짚었다. 한평원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호호야!”
한평화의 목소리에 멀리서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헥헥 거리며 달려왔다. 한평화는 골든 리트리버의 털을 쓰다듬으며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들어가죠?”
한평화는 꽃밭 한구석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집보다는 산에 있는 대피소 느낌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외관이 그럴싸해 보여서 제법 운치가 있었다. 내부도 신경 써서 꾸민 흔적이 보였다.
……라고 생각한 건, 사실 현관에 들어설 때뿐이었고, 거실로 들어가자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원 씨 누나는 청룡님을 많이 좋아하나 봐요.”
“네, 뭐…….”
잠실 청룡으로 인형이니 뭐니 많이 나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많은 물건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카펫에, 테이블보에, 컵, 접시, 방석……. 쿠션이나 인형은 당연히 있고. 심지어 5,000 피스 청룡 퍼즐도 액자에 걸려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보이는 모든 곳에 청룡이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현관에서 한평화가 꺼내 준 슬리퍼를 보았다. 무슨 미꾸라지가 그려진 줄 알았는데 이것도 청룡이었나.
“여전히 여긴 정신 사납구나. 좋아하는 건 좋지만 좀 정리하고 살지 그러냐.”
“다 내가 알아서 해요, 할아버지.”
한평화는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야, 한평원. 가서 마실 거나 가져와.”
“어…….”
한평원은 여기서도 막내였다.
“황이, 황삼이랑 백호 둘도 있고…….”
한평화는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한평화의 눈이 스치자 호랑이들은 깜짝 놀라며 달아났다. 소파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폼이 익숙했다.
“황일이는 어디 있어요?”
자기 이름이 나오자 황일이 깜짝 놀라 장규혁의 품 안으로 달아났다. 한평화의 눈이 여자아이를 향했다.
“서얼마…….”
한평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황일이야? 인간으로 둔갑했어? 아이고, 장하다, 우리 새끼!”
내내 차가운 태도를 보이던 한평화가 갑작스럽게 돌변했다.
“아우, 시러어!!”
“언니 좀 봐 봐, 응? 세상에, 완전 예쁘네! 인간으로 둔갑도 하고, 이제 다 컸네! 아우, 언니가 계속 봤어야 했는데. 그치? 제주도로 홀랑 가 버리고.”
“아아아아, 언니 아냐!”
황일이 바동거리며 한평화의 손을 피해 장규혁의 몸을 타기 시작했다. 장규혁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황일의 몸무게를 모두 받아 냈다. 황일은 자기가 고양이라도 되는지 장규혁의 품에서 장규혁의 어깨로 올라갔다.
호랑이들이 제주도로 가기 전에 강원도에서 지냈다고 했었지? 저 꼴을 보니 왜 제주도로 갔는지도 알겠다.
골든 리트리버 호호도 소파 밑에 들어간 호랑이들의 냄새를 킁킁 맡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녹차가 다 떨어져서 뼈살이꽃차 가져왔어요.”
“됐다. 밖에 굴러다니는 게 뼈살이꽃인데, 녹차가 있겠냐.”
그리고 그 난리 통에도 불구하고 한평원과 한훈열은 평화롭게 차를 마셨다. 한진열도 눈치를 보다가 그 틈에 끼어들었다.
나? 나는 깍두기처럼 멍청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고.
하, 개판이군.
* * *
겨우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인사를 나누었다.
“여긴 정해준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며 입은 인사하지만 한평화의 눈은 호랑이들에게 가 있었다.
장규혁을 따라 제주도로 가기 전 호랑이들이 있었던 곳이 이곳이 맞는지 한평화는 이상할 정도로 장규혁에게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저씨가 내 호랑이들을 데려갔잖아요!”
“아니, 어차피 평화 네가 돌볼 여건은 아니잖아…….”
“넌 빠져 있어!”
한진열이 끼어들었지만 한평화의 사나운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얼마나 아껴 줬는데!”
“누나는 아껴 주기만 했잖아…….”
“너도 빠져!”
한평원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기들한테는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누나랑 궁합이 안 좋았잖아.”
“빠져 있으라니까?!”
그리고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다.
“이 아이들은 아가씨 애완동물이 아니어요.”
혜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한평화의 눈썹이 불길하게 치켜 올랐다.
“이 여자는 뭐야?”
한평화는 혜사의 무릎에서 뼈살이꽃차를 마시고 있는 황일을 향했다. 자기는 꿈도 못 꾸는데 처음 보는 여자를 호랑이들이 잘 따르는 것 같자 심기가 꼬여 보였다.
“누나! 이분은!”
250살 곰을 향해 ‘이 여자’라고 부른 누나를 보며 기겁한 한평원이 끼어들었지만 한평화의 입이 좀 더 빨랐다.
“이부운?”
한평원이 얌전한 성격으로 보이던 것에 비하면 한평화는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 같았다. 생긴 것도 전혀 닮지 않았고, 성격도 딴판이고. 역시 남매라도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나와 정해영만 봐도 그렇잖은가.
“야, 여긴 내 집이거든? 내 집에서 내 손님으로 대우받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예의라고!”
얘, 분명 싫어하는 시청자 많았을 거다. 이런 캐릭터라면 정해영도 한마디 했었을 텐데.
흠. 정해영은 나한테 드라마에 대해 그렇게 떠들면서도 캐릭터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아니, 말했는데 내가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정해영이 한평화에 대해서 말했을 수도 있다. 내가 못 알아들었겠지만. 보통 정해영의 수다는 ‘내 새끼’에 편향되어 있었고 그나마 여자 캐릭터에 대해 말한 건…….
‘여주도 괜찮긴 한데 너무 모범생이야. 역시 우리 언니가 최고지. 첨에는 왜 또 그런 재수 없는 캐릭터를 맡겼나 했는데, 보다 보니까 넘 귀엽더라고. 그 얼굴로 완전 울보야, 울보. 갭모에 쩔어!’
…….
…….
……방금 나 엄청난 걸 떠올리지 않았어?
‘여주도 괜찮긴 한데 그래도.’
여주?
여주인공?
당황하지 말자, 정해준. 당황하지 말자.
그래, 어쨌든 이건 한국 드라마다. 일반적으로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있으며 사랑을 한다. 그러니까 여자주인공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어째서 이 생각을 못 했지?
그래, 이 드라마에는 여자주인공도 있다!
……알아봤자 뭐하냐. 남자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놔둬도 잘 흘러갈 거다. 드라마는 원래 역경과 고난을 넘어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 서울이 좀 날아갈 수도 있고…… 씨발.
좋아. 이건 잊자. 아니, 잊진 말고 잠시 넣어 두자. 어차피 강원도 산골짜기에서는 쓸모없는 정보고, 서울 한복판이어도 쓸모없는 정보다.
‘우리 언니가 좀 더 자주 나왔으면 좋겠다!’
‘니 새끼는?’
‘걘 당연히 자주 나와야지!’
정해영이 이 빌어먹을 드라마, ‘빌더쓰’를 보면서 자주 언급한 건 딱 두 명이다. ‘내 새끼’와,
‘우리 언니.’
정해영은 중학생 때부터 아이돌이나 배우를 좋아했는데, 나이나 성별 불문 보통 이름을 불렀다. 정해영의 팬질을 본의 아니게 십 년 정도 지켜봤는데 정해영이 이름 말고 다른 호칭을 덧붙인 팬질 대상은 딱 세 명이었다.
하나는 빌더쓰의 주인공. ‘내 새끼’ 박서원.
하나는 엄마와 같이 좋아하던 국민배우. 구민석 ‘님’.
마지막은 정해영이 약 5년 동안 사랑한 ‘우리 언니’…….
…….
아니, 잠깐만.
구민석은 배우 이름이 아니잖아. 이 빌어먹을 드라마 속의 캐릭터 이름이지.
거기다 ‘우리 언니’의 이름은 뭐였지?
“뭐? 곰? 그게 뭐가 대수인데?! 뭐, 마늘이랑 쑥을 백 년 동안 먹기라도 했어?!”
“누나, 백 년이 아니라 백일…….”
“한평원, 넌 닥쳐!”
한평화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한평원과 한진열이 쩔쩔매며 한평화를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런 깡은 좀 배우고 싶다.
혜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한평화의 말을 듣고 있었고, 한훈열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평화 대신 혜사에게 사과했다. 장규혁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혜사의 품에서 황일을 받았다.
“나만 이런 시골에 처박아 두고!”
“그건 누나가 원해서…….”
“한평원, 닥치랬지!”
“평화야.”
“나도! 나도 청룡님 보고 싶어!!”
허어어엉…….
한평화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잠깐 딴생각 하는 동안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됐지? 주인공 없다고 전개가 막 나가는 거야?
결국 한훈열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화야.”
한평화가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원한다면 언제든 내려와도 좋다. 저번에도 말했지 않느냐. 서울에 갈 터냐? 너희 어멈이 거기 있으니 가도 괜찮다.”
한평화는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눈이 시뻘겋다. 한평화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 있을래요.”
“그래. 그럼 가서 물 마시고, 얼굴 씻고, 쉬고 있거라. 할아비랑 좀 이따 이야기하자.”
“네…….”
한평화는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갔다.
“…….”
그쯤 되자 알아보기 싫어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한평화가 정해영의 ‘우리 언니’였다. 정해영 방에 붙은 브로마이드에는 진한 화장을 하고 가죽재킷을 입고 있어서 알아보는 게 늦었다. 아역 배우 출신인데, 중간에 가수로 데뷔해서 정해영이 ‘우리 언니는 못 하는 게 뭐야’ 하면서 울었다.
정해영의 방을 무려 5년 동안 장식한 ‘우리 언니’였다. 최근에 ‘내 새끼’한테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그 전만 해도 정해영의 일 순위였다.
젠장,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한평화도 날카롭게 생기긴 했지만 진하게 화장한 ‘우리 언니’의 인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핫핑크 스팽글 티셔츠에 몸빼 바지를 입고 있잖아.
거기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정해영 방에서 ‘우리 언니’ 브로마이드를 본 것도 5개월 전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그런 배우 겸 가수는 없으니까.
“혜사 님, 죄송합니다.”
한훈열은 곰 아가씨라는 호칭을 접고, 혜사에게 절을 하며 사과했다.
“아니어요.”
혜사는 한훈열을 일으켰다.
한평화가 내뱉은 말은 그냥 사람 사이에 들어도 무례한 말이었다. 그러나 혜사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저 아가씨 터전은 이곳이죠? 영역에 허락받지 않고 곰이 들어왔으니 화가 날만 하지요.”
내가 아무리 정해영에게 관심이 없어도 5년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정해영한테는 뭐 그런 노래를 좋아하냐 했지만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한 번도 빼놓은 적 없는 곡이라고. 임상규 노래랑 같이 내 노래방…… 아니, 이건 아니고.
아니, 그 전에 임상규의 본래 이름은 뭐지?
임상규는 재난안전대책본부 요괴대책팀장 이름이잖아.
내가 말하는 건 대한민국 발라드의 신이라 불렸던 가수라고.
대한민국 국민배우라 불리는 그 남자의 이름은?
정해영의 ‘우리 언니’의 이름은 뭐야?
누가 그 부분만 지우개로 지워낸 것처럼 텅 비워져 있다.
도대체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