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17. 우리 언니(1)
“어머나, 버릇없기는.”
250살 먹은 곰 아가씨의 눈에는 100살 호랑이 청년은 애새끼만도 못한 존재로 보이는 듯했다.
한훈열의 차가운 눈빛 아래서 발을 꼼꼼히 닦은 한진열이 새끼 호랑이들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혜사는 냉정하게 한진열을 평가했다.
같은 호랑이라도 다섯 마리의 새끼 호랑이에게는 친절한 것과 완전 딴판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 큰 건 재수 없고 애기 때가 제일 귀여운 법이다.
“우리 아이가 배울까 봐 너무 무서워라.”
“호랑이가 왜 댁 애야?”
한진열이 뾰족하게 대꾸했다.
“낭군님과 내가 사랑으로 돌봤으니 당연히 우리 아이지요.”
“헹, 곰이랑 인간이?”
“원래 이 땅에 터 잡은 인간이 누구와 짝을 지었는지 모르시는지?”
곰과 호랑이가 기 싸움을 하는데 왜 인간이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정한다. 눈치를 보는 인간은 나뿐이다. 그게 더 억울하다.
분명 지난달에 제주도에 둘만 놔두었을 때만 해도 곰을 볼 때마다 어깨를 움찔움찔 떨던 장규혁은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혜사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어색하지가 않았다. 혜사는 한진열과 치열하게 말싸움을 하면서도 장규혁의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주전부리를 챙겨 주었다. 장규혁은 전과는 달리 태연하게 혜사의 손에서 양갱을 받아먹었다.
그렇다고 장규혁이 받아먹기만 하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간식거리에는 손을 잘 대지 않았지만, 찻잔을 자주 비우는 혜사를 위해 장규혁은 혜사의 잔이 비지 않도록 따뜻한 차를 계속 채워 주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장규혁을 보았다. 저 사람……?
“장규혁 씨.”
혜사가 한진열과 의미 모를 눈싸움을 하는 동안 장규혁의 귀에 속삭였다.
“예?”
“혜사 님과 많이 친해지셨습니까?”
“처음보다야 익숙해졌죠.”
“익숙해지기만 했습니까?”
“혜사 님 주소지가 농원으로 되어있어서 같이 지내다 보니…… 좋은 분이시더라고요.”
“그러시겠죠.”
장규혁은 잠깐 침묵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는데, 아닙니다.”
“아, 네…….”
“아닙니다.”
“뭐…….”
“아니라고요.”
“…….”
“낭군님, 저에게 무어라 말씀하셨는지요?”
한진열과 으르렁거리던 혜사가 장규혁을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다. 맹수에서 수줍은 여인으로 바뀌는 걸 보고 있으니…….
“아닙니다, 혜사 님.”
“…….”
“…….”
장규혁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본인이 그렇다는데 옆에서 뭐라 할 건 아니지. 드라마적으로 생각하건대, 이 두 사람은 드라마의 로맨스 코미디를 담당할 것이다. 지지고 뭘 볶아 먹든 간에 결국 이어지긴 할 거다.
장규혁이 저렇게 부정해도 혜사를 밀어내지 못하는 거 보면, 뻔하지. 거기다 여자아이로 둔갑한 호랑이까지 있으니 이거 뭐, 완전 신혼부부 아냐?
“낭군님이 호랑이가 있다고 해서 참고할 만한가 싶어 온 것인데, 털갈이도 해 본 적 없는 호랑이일 줄이야……. 이러면 부족하지만 제가 가르치는 게 나을 것이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댁은 곰이잖아! 곰과 호랑이가 같은 줄 알아?”
한진열이 역정 냈다. 왜 내가 강원도까지 와서 호랑이 교육권 다툼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왜? 도대체 왜?
아니 새끼 호랑이를 누가 교육하냐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야?
그러나 집주인마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손님인 내가 뭐라 할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한훈열은 중간중간 훈수를 두기까지 했다.
“그래, 그래도 같은 호랑이가 낫긴 허지.”
“하지만 곰 아가씨 정도면 종족은 달라도 경험이 훨씬 많으니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아무리 봐도 싸움을 붙이려는 게 목적 같긴 하지만…….
“보아하니 터전도 없는 듯한데!”
“윽, 그건…….”
혜사에게 말발은 달려도 바득바득 맞받아치던 한진열이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혜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잠을 오래 자서 원래 터전을 잃긴 했지만 섬주인께 허락받아 한라산 일부를 터전 삼기로 하였답니다. 당신은요?”
“으…….”
한진열은 입을 우물거렸다. 혜사의 눈이 반짝였다.
터전은 영물들의 근간이 되는 땅이다. 켕켕 거리며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새끼 호랑이들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터전이 있다. 지금은 그걸 다스릴 능력이 안 돼서 그렇지.
“나, 나도…….”
“없지요?”
“그……. 아냐, 있어. 있, 었지.”
한진열은 한훈열을 흘긋 보며 말했다.
“……터전을 떠난 지 오래됐으니까, 없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으…….”
조금만 더 하면 혜사가 한진열을 울릴 수 있을 듯싶었다.
혜사는 한진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터전을 떠났다고요? 어째서요?”
“……훈열이네 집안은 원래 함경도 출신이야. 내가 태어난 산도, 내가 터전 삼은 곳도 다 북쪽에 있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훈열은 아내의 집안을 따라 남한으로 내려왔다. 한진열은 고민하다가 전쟁 통에 형제처럼 지낸 인간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안전한 곳까지만 데려다주려고 마음먹었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은 호랑이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치열했고, 휴전이 되면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한진열이 터전으로 삼은 산에서 지낸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진열은 부모에게 물려받아 인간 부모와 인간 형제와 함께 지낸 산을 지금도 생생히 그려 냈다.
“그랬었군요.”
지난 세월 동안 한반도에서 유일한 산주인으로 남아 있던 한진열의 이야기를 들으며 250살 먹은 곰의 눈은 조금 다정해졌다.
한진열의 나이가 백 살 정도 되니까…….
인간의 기준을 들기에는 너무 다른 종족이지만 대충 뭐. 못해도 이모와 조카 정도의 나이 차는 아닐까.
“인간과 같은 성을 쓰고 있기에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터전이 있는 호랑이라면 이름도 있겠지요. 알려 줄 수 있나요?”
“……나중에. 그렇지만 난 이 이름이 더 좋아. 날 키워 준 아버지는 진현 아버지고, 내 형제는 훈열이야.”
“그래요.”
혜사는 아까와는 달리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열은 괜히 멋쩍어졌는지 귀를 부르르 떨며 한훈열 뒤로 냉큼 달아났다.
한훈열도 나이답지 않게 정정했지만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로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아무리 백 살 먹은 호랑이라 해도 덩치 큰 고양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혜사의 마음에 무슨 변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매우 온화해졌다. 혜사의 눈빛이 너그러워지자 한진열도 슬그머니 기세를 낮추었다.
“그, 어차피 나는 훈열이 때문에 호랑이들을 많이 못 봐주니까…… 내가 못 봐줄 때는 네가 가르쳐 주면 될 것 같아. 나보다 경험도 많을 테니까 곰이어도 훨씬 나을 거야…….”
“형제분을 돌보고 계신가요?”
“훈열이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걸!”
한평원의 영혼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저 소리가 개소리라는 걸 잘 알겠다.
“쟤네도 원래 여기 있었는데 여기는 돌볼 여건이 안 돼서 제주도로 보낸 거거든. 규혁이한테서 떨어질 생각도 안 하고…….”
“아기들이 낭군님을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곰과 호랑이의 눈이 어린 호랑이들을 향했다.
장규혁의 무릎을 베고 여자아이, 그러니까 황일이 잠들어 있었고 나머지 호랑이들도 장규혁의 뒤편에 쪼르르 엎드린 채 졸고 있었다. 한평원이 구워 준 소고기를 모조리 해치운 호랑이들의 배는 빵빵하게 불러 있었다.
난방이 도는 바닥만큼이나 따뜻한 풍경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올라가 보진 않고?”
대충 분위기가 정리되자 한훈열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장규혁은 살짝 대답을 망설였다.
“글쎄요…….”
어디를 말하는지 모르는 나와 혜사는 가만히 있었고 장규혁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말이 고민이지, 별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게 훤히 보였다.
도대체 저 위에 뭐가 있어서 반응이 그래?
“…….”
자고 있던 황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슬그머니 장규혁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음…….”
장규혁은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황일의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장규혁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가자고?”
끄덕.
“인사해야 해.”
“음.”
장규혁의 얼굴이 크리스마스 날,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네 살 난 딸아이를 보던 사촌 형처럼 변했다. 정말 들어주기 싫지만 결국 들어주고 마리란 걸 직감했을 때 아빠들은 보통 저것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땅주인. 인사.”
장규혁은 고뇌했지만 그마저도 황일이 한 번 더 소매를 잡아당기자 무너졌다. 호랑이 모습일 때는 제일 어른스럽다고 느꼈는데 이렇게 보니 쟤도 아직 새끼구나, 싶었다.
“그래…….”
내 짐작대로 장규혁은 결국 패배했다.
한훈열의 뒤를 따라 장규혁과 혜사가 일어났다. 황일이 장규혁의 손을 잡고 종종거리며 걸어갔다. 장규혁이 일어나자 졸던 호랑이들도 하품을 하며 일어나 따라갔다. 무슨 오리 새끼들도 아니고.
어쨌든 그 모습은 꽤…… 단란한 풍경이었다.
문득 우리 가족이 생각났다. 아빠나 엄마나 모두 형제가 많아 친가나 외가나 대가족이다. 사촌들끼리도 사이가 좋아 자주 연락하고 만났다. 지금은 뭐, 하나같이 없는 번호라고 뜨지만.
“평원아, 너도 갈래?”
밖으로 나오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나 있었다. 산속이라 해가 일찍 지는 걸 감안해도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지금 출발해도 서울에 도착하면 한밤중일 거다.
한평원도 그 사실을 생각했는지 한진열의 말에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해준이도 한 번쯤 봐 두는 게 좋을 거다.”
그러나 한훈열의 이 말에 나와 한평원의 행선지도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 * *
인간 넷, 곰 하나, 인간으로 둔갑한 호랑이 둘, 새끼 호랑이 넷.
어쩌다 인원이 이렇게 늘어났을까……?
하늘이 어두워져서 해가 금방 질 텐데 곰과 호랑이는 그렇다 쳐도 인간들도 겁 없이 길을 나섰다. 곰과 호랑이가 있으니 위험하지 않다는 자신감인가? 난 역시 이곳과 맞지 않는다. 집에 가고 싶어졌다.
제일 앞서 가는 한진열의 손에 손전등이 쥐어졌다. 밤눈이 어두운 인간들에게도 쥐어졌다. 한훈열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인원이 많으니 어두운 산길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한훈열은 걱정되었다. 저 할아버지, 본인 나이 생각을 너무 안 하시는 듯하다.
호랑이들끼리 장난치는 소리와, 혜사가 장규혁에게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걸었다.
그래도 한훈열의 집을 나와서 걷는 것까지는 평탄했다. 처음 들어왔던 길, 그러니까 한평원의 차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한 지점까지는 괜찮았다.
한쪽에 서 있는 한평원의 차를 아련한 눈으로 봤다. 집에…… 가고…… 싶다…….
“발밑 조심해요.”
한평원이 주의를 줬다. 이제부터 계단이라고 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밝아지니까…….”
계단을 오르느라 잠깐 흔들린 손전등이 옆에 있는 표지판을 비췄다.
[강원서천농원]
…….
내가 생각하는 그거겠지?
어째서인지 이 계단의 끝에 있을 것이 예상이 갔다.
“규혁 씨.”
“네?”
“제주도에 있는 꽃밭은 어때요? 이렇게 나와도 괜찮은 겁니까?”
장규혁은 잠깐 조용해졌다.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서 장규혁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 때문에 흐릿한 형체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돌봐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요?”
제주도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그래도 이렇게 하루 이틀 나와 있는 동안 커버쳐 줄 인력은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마저도 없으면 큰일이다. 당장 노동청에 신고해야 할 회사다. 농원도 회사라면.
“여기도 그 서천농원인 겁니까?”
“네.”
“그럼 여기서 키우는 꽃은…….”
제주서천농원에서 키우는 꽃은 살살이꽃이었다. 피살이꽃은 각 지역 헌혈지부에서 키운다고 했고. 마지막 남은 꽃이 분명…….
그때 어쩐지 주위가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진짜 환해졌다. 계단 양옆에 있는 울타리에 색색별로 빛나는 꼬마전구가 감겨 있었다.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반짝반짝거리는 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건……?”
“거의 다 왔네요.”
한평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울타리를 감고 있는 전구는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종류가 다양해졌다. 동그란 볼 같이 생긴 전구도 있었고, 꽃 모양도 있었다.
이 산속에서 어떻게 전기를 끌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전구를 보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슨 게임맵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여기가…… 서천농원 본점이에요.”
빛나는 전구를 지나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계단식 논 형태의 평지가 펼쳐졌다.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은 흙바닥이 제일 아랫단, 계단과 연결되어 있고 그 위부터 새하얀 꽃이 가득 펼쳐졌다. 꽃잎 하나하나가 큼지막해서 멀리서 보면 종이로 접은 꽃 같았다.
색색별로 빛나는 전구와 어우러진 새하얀 꽃. 꽃 이름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뼈살이꽃.
“아, 뭐야! 갑자기 왜 잔뜩 왔어?!”
그리고 하얀 꽃 사이로, 뾰족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