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16. 방어와 보호(2)
딱!
“젊은 놈이 왜 이렇게 허리가 굽었어!”
“아이고.”
“어떤 상황이 있을지 모르니 언제나 평정!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지만!”
한훈열은 싸리 빗자루를 무지막지하게 휘둘렀다.
그 무자비한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지만 싸리 빗자루의 반경이 너무 넓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두 다리로 서 있어야지!”
딱!
“악!”
저 싸리 빗자루 도대체 뭔데?!
“훈열아, 안 힘들어? 안 쉴래? 마실 거 갖다 줄까?”
호랑이는 인간 속도 모르고 지 형제 챙기기 바빴다.
……아니, 뭐. 나 같아도 내 형제가 90살 할아버지면 걱정돼서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것 같긴 하다.
“정신 사납다!”
“왜 나보고 맨날 그래!”
한진열이 빗자루에 머리를 맞고 징징거렸다.
겉모습이야 청년이지만 속은 어쨌든 100살에 가까운 호랑이 아닌가. 하는 짓은 사춘기 중학생이니 어쩌면 좋을까.
기억해라, 정해준. 너는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또 늦었잖냐!”
한훈열의 빗자루가 정강이를 후려쳤다. 손잡이 부분이 아니라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프진 않았지만 폴짝폴짝 뛸 정도로 따갑긴 했다.
“이게 하루 이틀로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하루 이틀이라는 건 비유법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루 내지는 이틀이다.
강원도에 온 지 이틀째, 어째서 나는 한훈열의 빗자루를 맞고 있는가? 상황은 어제 낮으로…….
딱!
“딴 생각하지 말고!”
“악! 아파요, 아픕니다!”
……낮으로, 돌아간다.
* * *
“평원아, 서울로 언제 돌아가야 한다고?”
“내일 돌아가려고 했는데, 월요일까지는 있어도 괜찮아요.”
“그래?”
한훈열은 내 얼굴을 지긋이 보았다. 그냥 할아버지가 봐도 긴장될 판인데 눈앞에 있는 할아버지는 한국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기본 정도는 봐줄 시간이 되겠군.”
“예?”
“우리나라 보호 능력의 명맥을 이을 놈인데 그리 맥이 없으면 안 될 말이지.”
“네?”
“기초만 잡아 주마.”
내가 여기까지 와서 계속 네? 소리를 해야 해?
보호 능력자의 명맥을 유지하겠다는 이유로 친히 가르쳐 주겠다니. 20세기 초에 태어난 사람의 사고회로를 21세기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 이런 드라마가 인기가 많다고? 이런 할아버지 캐릭터도 인기가 있는 거야? 정해영! 대답해라, 정해영!!!
자, 어쨌든 이렇게 나는 한훈열의 싸리 빗자루 아래서 구르게 되었다.
이것 또한 비유법이 아니다. 한훈열은 정말 싸리 빗자루를 휘둘렀고, 나는 그걸 피해 굴렀다.
사실 빗자루만 있으면 괜찮았다. 보호막을 치고 버티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한훈열이 요구하는 건 좀 더 구체적이었다. 보호막을 계속 유지하는 건 안 된다. 타이밍에 맞추어 펼쳤다가 해제한다.
“같은 능력이라 해도 유지하는 데 소모되는 건 조금씩 다르지. 내 아는 놈들 중엔 머리털 빠지는 놈도 있었다.”
드라마 작가 제정신인가? 어떻게 그런 잔인한 설정을 넣을 수 있지?
“모든 능력이 다 그렇지만 이 능력은 특히나 판단력이 중요하다. 속도도 중요하지.”
한훈열의 말이 옳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서 보호막을 해제하고 있다가 한훈열의 빗자루 휘두르는 속도에 맞추어 보호막 펼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훈열아, 괜찮아? 내가 할까?”
이딴 소리를 하는 호랑이가 끼어들기까지는 괜찮았다.
덕분에 패턴이 늘어났다. 한훈열의 싸리 빗자루와 호랑이의 앞발. 저 할아버지는 지치지도 않나.
한진열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래. 할 짓 없는 고양이가 쥐 사냥하는 기분…… 쥐도 많이 봐준 것 같다. 드러누워서 장난감 낚싯대를 앞발로 톡톡 건드는 기분 아닐까? 실제로 지금 하고 있는 것도 크게 다르진 않다.
“음…….”
한창 날 가지고 놀던 한진열은 고양이처럼 가만히 자리에 서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입을 우물거렸다. 인간으로 둔갑한 산주인의 생태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어서 한진열이 뭐 하려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뒤에서 관전 중이던 한평원이 당황한 얼굴로 귀를 막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크르르……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크륵……
호랑이다.
머리가 노란 동네 양아치 같던 남자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얼굴이 흐릿해졌다. 보고 있는데 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웃고 있지도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지만 그건 울부짖기 위해 입을 연 것에 불과하다.
한진열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좀 더 입을 크게 열었다. 온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귓가에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짐승이 목덜미를 물고 있는 기분이다.
커흐…….
“이 미친 새끼가!”
“아!”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던 분위기가 끊겼다. 한훈열은 손에 쥔 빗자루로 한진열의 머리를 후려쳤다.
“어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짖어!”
“아무리 그래도 호랑이한테 짖는다는 게 뭐야, 짖는 게…….”
“그럼 짖지, 뭐냐? 이런 미친놈 같으니라고.”
“아우씨…….”
한진열은 빗자루로 후려 맞은 머리를 매만졌다.
* * *
이게 첫날 저녁까지 있었던 일이다. 난 능력에 대해 설명이나 들을까 해서 왔는데 어쩌다가 흙투성이가 되도록 구르게 됐는지 모르겠다. 산속 해가 일찍 진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다음 날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또 훈련을 시작했다. 고마운지 화가 나는지 잘 모르겠다. 눈앞에 있는 게 정해영이였다면 못 참고 한마디 했을 텐데 할아버지라 어쩔 수 없었다. 옆에 있는 호랑이가 무서웠던 건 아니고.
어제의 한진열의 울음…… 짖음은 미수로 끝났지만 훈련 패턴에 추가되었다. 크게 우는 건 아니고, 크르르, 하고 낮게 그르렁거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100살 산주인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100살이면 산주인치고는 다 큰 것도 아니라는데 성체가 되면 도대체…….
“정신 차리고!”
할아버지도 힘들긴 했는지 싸리 빗자루가 휘둘러지는 빈도는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그만큼 한진열이 날뛰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보호막을 펼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어제는 짖다 말았지만 오늘은 한진열이 끝까지 으르렁거렸다. 타이밍에 맞춰 보호막을 펼쳤다가 해제하느라 죽을 맛인데, 한진열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진짜 딱 죽기 좋은 기분이 되었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해준 씨!”
쏴아아.
조금 적응됐다 했더니 타이밍 맞추어 한평원이 물을 쏟아부었다.
“미안합니다!”
미처 막지 못한 물이 쏟아져 홀딱 젖었다. 이게 세 번째다.
이 가문 진짜 싫네!
아니, 그래. 명맥 끊기 싫다는 다소 낡아빠지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로 날 훈련시키는 것까진 좋다 이거야. 그런데 훈련 방법까지 이렇게 하드 할 필요가 있어? 이거 드라마 아냐? 몇 세 드라마야? 보통 드라마가 15세인가?
아무리 케이블이라 해도 15세 드라마에 사람이 죽겠어?! 보호 능력이 왜 필요한데? 애초에 나는 드라마 등장인물이 아니니까 원래 드라마에는 보호 능력자도 없을 거잖아!
이제 그냥 집에 가고 싶어졌다. 현실로 돌아가면 꼭 내가 시청자 게시판을 테러한다. 무슨 이따위 드라마를 만드냐고.
“어허!”
“으르렁!”
“미안합니다!”
씨발!
* * *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고는 해도 물을 뒤집어쓴 채 있기에 강원도 산속은 추웠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고 한진열의 옷을 빌려 입었다. 다행히 몸빼 바지가 아니라 평범한 추리닝이었다. ……이런 옷도 있으면서 왜 몸빼 바지를 입고 있어?
옷을 갈아입고 마루에 나오자 한평원이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걸로 기본은 됐군.”
“아, 네…….”
한훈열이 원하는 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곧바로 보호막을 펼치는 수준이다. 한순간의 망설임에 목숨이 달려 있다나 뭐라나. 한훈열이 살아온 시대를 생각하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는 하지만, 솔직히 지금 시대에는 괜한 말이다. 어차피 현실로 돌아가면 이런 능력 따위 쓸 수 없다. 초능력이 있는 건 이곳뿐이고.
차라리 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나 통장 잔고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면 열심히 수련했을 텐데.
“요즘 애들은 여기까지도 못 오던데 의외로 잘 따라왔구먼.”
“산속이라 도망갈 수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한진열이 의외로 핵심을 찔렀다.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모른 척 넘겼다.
“박서원 씨에게도 비슷하게 훈련을 받았거든요.”
처음 등급판정을 받을 때 일이 떠올랐다. 무식하게 검을 날리던 그 새끼. 천벌 받아라.
박서원 이름을 꺼내자마자 한훈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고놈이 진짜…….”
한훈열은 이글이글 거리는 눈으로 날 노려봤다. 이 할아버지 진짜 정정하시네. 원래 세계에서는 뭐 하시는 분일까. 물론 배우기는 하시겠지만 작중 설정보다는 나이가 적겠지.
“정해준이, 박서원이한테 넘어가면 안 된다. 알겄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비슷한 얼굴을 했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땐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게 상책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진 모르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내, 박서원이가 그런 꿍꿍이가 있는 줄 알았으면 안 도와줬지.”
한훈열은 무어라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들어주던 한진열은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았어도 결국 도와주긴 했을 거잖아.”
“……허, 그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독기에 가득 차서 왔는데! 안 도와주게 생겼나!”
“걘 그때부터 싹수가 노랬어.”
“에잉, 박서원이 고것도 팔자가 기구혀. 불쌍한 것.”
한훈열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박서원 씨도 여기서 배우고 갔습니까?”
“처음 왔을 땐 수능 치고 오라고 돌려보냈었고…….”
한진열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그다음엔 수능 성적표 쥐고 올라왔었지? 그거 보고 얘도 참 독하다 싶었는데.”
박서원이 고등학생 때 각성했다고 지나가면서 들었으니까 그럼 기본기를 여기서 배웠다는 말이다. 이렇게 다 연결되는군.
“나도 덕분에 같이 훈련했잖아요. 난 그때 할 생각 없었는데.”
“넌 인마, 그때 안 했으면 홍수 났었어.”
한진열은 한평원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돈 아니지 않았어요?”
“너희 외가 중에 네 능력이 제일 센 거 알지? 그때 안 잡았으면 큰일 났을 거다.”
한평원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한평원 초능력 등급이 높은 모양이다.
간혹 막 각성한 이들이 자기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난리가 난다고 들었다. 홍수가 날 정도의 각성 여파라면 지금 등급도 엄청 높겠지. 이래 봬도 짧게나마 등급산정부서에 일했다. 그 정도 알아볼 깜냥은 있다.
“정해준이.”
밝혀진 등장인물 간의 연결고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한훈열이 불렀다. 이 할아버지가 부르면 이상하게 긴장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지은 기분.
“서울 가서도 훈련 빼먹지 말고 잘 하고.”
“아, 네…….”
교장 선생님이 하시는 말과 다른 게 없긴 하네.
“……혹시 모르니 알려 주는데.”
“네?”
내가 만약 드라마 등장인물이라면 분명 별명은 네 귀신일 거다. 아무것도 모른 채 모범생 노릇 하기도 힘드네.
“그, 차단막 말이지.”
한훈열이 입을 열려는데, 마루에 드러누워 있던 한진열이 벌떡 일어났다.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고 꼬리와 귀가 튀어나왔다. 내가 고양이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저건 백 퍼센트 경계하는 모습이다.
“뭐냐.”
한진열은 코를 킁킁거렸다.
“익숙한 냄새와…… 모르는 냄새가.”
보통 저런 말 하면 정체 모를 암살자가 들이닥친다. 여기가 비록 드라마 속 세계긴 하지만 미국 드라마도 아니고 한국 드라마다. 습격 같은 이상한 일은 없겠지.
조금 걱정하긴 했지만 여긴 호랑이가 있다. 알아서 다 하겠지.
“흥.”
한진열의 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호랑이 쪽의 귀. ……이상한데? 사람 귀랑 호랑이 귀랑 왜 같이 있어? 인간 쪽은 둔갑한 모습이라 그런가?
“어어?”
어제 한평원과 걸어온 길에 사람 그림자가 졌다. 이야기 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 걸 봐선 한두 명이 아니다. 모퉁이에서 나타난 아이는…… 아이?
“킁!”
분홍색 리본이 달린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청재킷까지 야무지게 입고 머리도 양 갈래로 땋은 깜찍한 모습이었다. 한진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잠깐, 그렇게 튀어가지 마.”
그리고 그 뒤로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활발한 게 보기 좋지 않아요, 낭군님?”
제주도에서 만났던 장규혁과 곰, 혜사가 양손에 이동장을 들고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