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15. 할아버지와 호랑이(2)
한진열의 꼬리가 느리게 흔들렸다.
주황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 짧은 털.
아무리 봐도…… 그거다.
호랑이.
“정해준입니다.”
“흠.”
시야 한구석에서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호랑이 꼬리가 있다. 시선을 안 주려고 노력하지만 신경이 자꾸 쓰인다. 눈앞에 호랑이가 두 발로 걸어 다니는데 어떻게 안 볼 수 있어?
물론 그래서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오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한훈열의 눈은 도깨비처럼 시퍼렇게 번쩍였다. 호랑이 앞에 서면 이런 기분이 될 듯했다. 정작 진짜 호랑이는 동네 양아치처럼 생겼는데.
한훈열은 백 살에 가까운 나이가 거짓말인 것처럼 기운이 넘쳤다. 그놈의 다 해진 티셔츠를 오늘에야말로 가져다 버릴 거라면서 싸리 빗자루를 휘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진열은 꼬리도 모자라서 흰 털이 보송보송 난 호랑이 귀까지 꺼내놓으며 빗자루를 피해 폴짝폴짝 뛰었다.
“네가 보호막을 쓴다고?”
“네.”
“보여 봐라.”
싸리 빗자루를 장군님 검마냥 짚은 채로 한훈열이 말했다. 연세가 많으시기도 했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수능 칠 때도 이것보다 긴장되진 않았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속이 울렁거리며 손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호오…….”
한훈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손을 보았다. 보호막을 제대로 펼치지도 않았는데 토할 것 같았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 교실 앞에 나가서 노래 부르던 게 떠오른다. 여기 괜히 온 거 아닐까?
한훈열과 나 사이에 하얀 막이 생겼다.
“흠.”
한훈열은 가만히 보호막을 봤다. 보호막이라고 해 봤자 투명하니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형형한 눈빛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훈열은 싸리 빗자루 끝으로 보호막을 툭툭 쳤다. 영력도 없고 힘도 실리지 않아서 느낌도 없었다. 한훈열은 보호막을 쿡쿡 찌르다가 불렀다.
나 말고, 한진열을.
“진열아.”
“어엉?”
한훈열에게 꾸중을 듣고 마당 구석에 박혀 있던 한진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랑이……. 호랑이 맞는 거지? 내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거 한번 쳐 봐라.”
“이거?”
“자, 잠깐만요, 할아버님!”
“어느 정도로?”
“톡 쳐 봐라. 저놈이 다칠 정도는 말고.”
한진열은 배를 긁적였다. 귀도 꼬리도 없어진 상태지만 호랑이가 분명하다. 왜 사람 모습인지는 알고 싶지 않다. 제주도의 반달가슴곰도 웅녀가 됐는데 호랑이라고 왜 못 하겠는가. 그것보다는 저 호랑이가 보호막을 치는 작금의 현실이……!
“큭!”
“버티는데?”
“강도는 괜찮군.”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보호막을 유지하긴 했지만 부딪친 힘만 따지면 북촌 도서관의 도깨비보다 세다.
갑자기 이게 뭐야? 억울해서 한평원을 돌아봤지만 한평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하다는 듯 고개만 까닥거리고 있었다. 역시 저 새끼는 사이코패스 역이 틀림없다.
한훈열은 한진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설마 또 치라고 하는 건가 싶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한진열이 옆으로 비켜섰다. 한훈열은 잠깐 날 보더니 싸리 빗자루를 들어 보호막을 쿡 찔렀다.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네?”
“역시 이건 부족하군. 정해준? 정해준이라고 했나?”
“네, 네…….”
“들어오너라. 이야기 좀 하지.”
한훈열은 한평원을 보고 말했다.
“평원아. 넌 차 좀 내오너라.”
“네, 할아버지.”
한훈열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본 것처럼 꽤 연식이 있어 보이는 한옥이다. 이런 산속에 있는데 관리가 잘 되어있는 게 놀랍다. 실내도 깔끔하고 현대식이지만 좌식이다. 한진열이 익숙하게 방석을 꺼내 깔아 주었다. 무려 호랑이님께서 주시는 방석이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자기 불러서 정신이 없을 테지.”
“아닙니다.”
봄이라지만 강원도 산속은 추웠다. 바닥에서는 따뜻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방석 없이 바닥에 풀썩 앉은 한진열의 얼굴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삐죽 튀어나온 귀와 꼬리에 시선이 자꾸 가자 한훈열이 혀를 쯧, 찼다.
“내 아버지가 거둔 놈이야.”
“네?”
“어릴 때 거두셔서 형제처럼 같이 자랐어. 육이오 이후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산속에서 지내게 했더니 사회성이 좀 없어.”
그게 한진열 이야기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한훈열의 아버지라면 독립운동가 한윤현이다.
제주도에서 보았던 어린 산주인들이 떠올랐다. 일제 때 일본군이 산주인들을 죽여 새끼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죽거나 숨어 지냈다고. 분명 독립군에서 그런 어린 산주인을 키웠다고…….
“내가 뭐 어때서!”
한진열이 항변했지만 한훈열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저렇게 노곤하게 풀어진 얼굴로 그렇게 말해 봤자 안 먹히지.
“아까 평원 씨가 형이라 불러서 형제인 줄 알았습니다…….”
“저놈이 철이 없어서 그래. 원래는 평원이도 저놈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와서는.”
한훈열은 안타까운 눈으로 한진열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테레비를 놓는 게 아니었는데……. 평화, 고년 때문에…….”
한훈열은 냉정하게 말했다.
“저 괭이 놈은 무시하고.”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고양이다.
그러나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한진열을 보니 무시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곧 한평원이 차와 다과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녹차와 유과였다.
“갑작스레 불러서 당황했을 턴데 미안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그래…….”
한훈열은 녹차 향을 음미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눈빛도 또렷하고 목소리도 깊고 중후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나 마른 몸이 나이를 말해 줬지만 꼿꼿이 선 허리를 보면 누가 100살 할아버지로 볼까.
“내가 평원이 시켜서 자넬 부른 건 다른 게 아니야.”
이게 무협지였다면 이 할아버지는 분명 은거기인이다. 지금도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지만…….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보호막을 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네.”
그리고 은거기인에게서 기연을 얻는다는 점에서 나는 주인공…… 헉,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다른 놈이 잘 맡고 있다고.
“다행히 이 내가 죽기 전에 보호 능력자가 한 명이라도 나와서 다행이야. 손주 녀석이 죽은 뒤로 다신 없을 줄 알았는데.”
“너 안 죽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진열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한훈열은 손을 움찔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분명 손에 뭐라도 쥐여 있었으면 한진열을 후려 팼다.
“내가 왜 안 죽냐!”
“내가 있는데 왜 죽어!”
“둔갑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개소리한다! 괭이 놈, 나가서 멍멍 짖어나 봐라.”
“아씨, 너 만날 나만 구박하지.”
“네놈이 개소리만 하잖어. 괭이 주제에.”
“고양잇과지만 고양이는 아니거든!”
호랑이 입에서 듣기에는 묘한 말이긴 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틀린 말도 아니고. 난 표정관리만 잘 하면 된다. 어쨌든 이 드라마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 같은 분 아닌가. 호랑이까지 포함해서.
혀를 끌끌 차며 호랑이를 구박하던 한훈열은 한진열이 궁시렁대며 입을 다문 후에야 다시 날 보았다.
“평원이 말로는 분리해서도 펼칠 수 있다지?”
“네, 차단막까지 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나 말고 초능력자가 없어서 훈련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용케도 여기까지 했군.”
음, 그건 나름대로 기연이 있었지. 은거기인은 아니었지만.
“박서원 씨가 도와줬습니다.”
찻잔을 들어 올리던 한훈열의 손이 멈췄다.
제발, 이런 드라마 같은 연출 하지 마.
“……박서원이라고 했나?”
괜히 이렇게 긴장하게 만들지 말라고.
“네.”
“그래…….”
한훈열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드라마틱한 연출! 그만하라고!!
“그 후레자식이…….”
“……네?”
“박서원 그놈이 뭐라고 했나?”
“네?”
“그놈 자식이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라.”
박서원 이놈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별로…… 특별할 건 없습니다. 분리 훈련하는 방법이랑…… 저 말고 다른 이를 중심으로 치는 보호막을 차단막이라고 알려 주기만…….”
“흥. 내가 더 안 가르쳐 줬으니 그놈도 별수 있나. 양놈들이랑 어울려도 거기까지겠지.”
애초에 보호 능력자는 전쟁 때 다 나가 죽고 없으니까.
한훈열이 짧게 덧붙인 말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전쟁. 전쟁……. 무슨 전쟁을 말하는 거지? 한국전쟁?
초능력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70년대부터였고, 그나마도 보호막처럼 보기 힘든 특수 능력에 관해서는 정보가 없었다. 젠장, 역사 공부 안 한 게 여기서……. 아냐, 아니라니까. 난 할 만큼 했어! 세계가 뒤바뀌기 전까지는!
“정해준이, 자네 박서원이랑 같이 일 하나?”
“네? 일이야 같이하죠. 같은 회사인데요.”
“새날?”
“네…….”
박서원은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이 할아버지마저 욕을 하냐.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박서원.
“그 외에 따로 말한 건 없고?”
“어, 같이 일하자고 하기는…… 했습니다.”
한훈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게 죄는 아니지.”
눈빛으로 이미 유죄를 선고해 놓고 인간적으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박서원이와 관련 있다고 해서 보호막 다루는 법을 안 가르치진 않을 거네. 다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박서원 씨를요?”
“자네는…… 관련이 없겠군. 모르지?”
“네?”
“앞으로도 계속 모르길 바라네. 혹여나 관련될 생각 말고.”
“솔직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네.”
……정말? 정말 이걸로 됐다고?
드라마 등장인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이게 드라마 장면 중 하나라면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지루한 장면일 거다. 쓸데없이 5분씩 잡아먹고 하는 그런 장면.
어차피 난 등장인물이 아니니 드라마 장면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 빼고 여기 앉아 있는 세 명은 등장인물일 테니까 어쩌면 비슷한 장면이 드라마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훈열이 주인공인 박서원을 아는 거 보면.
“좋은 일에 쓰길 바라네.”
한훈열은 날 똑바로 보며 말했다. 거절할 수 없는 박력이 느껴졌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에 쓰라니. 착하게 살아라 같은 두루뭉술한 말과 똑같다. 새해 덕담 같은 거라 생각하지, 뭐.
“자, 그럼 정해준이. 내 질문 하나 하겠네.”
따끈따끈한 바닥에 앉아 있으니 나도 졸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움직이고, 산길을 걷고, 호랑이를 만나 긴장까지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하품을 참았다. 여기서 하품이라도 하면 뭔 쪽이냐. 뒤에 한평원이 있는 걸 잊지 말자.
“방어(防禦)와 보호(保護)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