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15. 할아버지와 호랑이(1)
한평원 증조부의 성함은 한훈열이다. 1925년생이며 지금이면 겨우 중학생 정도 되는 나이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0살에 능력을 각성하여 16살 때 일본군에게 잡힌 아버지와 독립운동가들을 구출해 낸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 전설에서 구출된, 한평원의 고조부 되시며 한훈열의 부친 되시는 분께서는 초중고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독립운동가시다. 무려 상해 임시정부에서 찍은 사진에도 등장하시는 분이다.
거기다 한평원의 고조부…… 의 아버지 되시는 분도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다. 이분은 만주에서 일본군을 때려잡던 장군님이시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모두 독립운동가다. 이만하면 독립운동계의 로열패밀리라 할 수 있다.
삼대가 내리 독립운동가였고, 행적은 가문 단위로 교과서에 실려 있다. 매년 3월이면 방영되는 한씨가문 특집 다큐멘터리만 5부작이 넘는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대한민국에서 살다 보면 최소 한 번……. 한 번이 뭐냐. 어떤 경로를 통하든 매년 듣게 되는 이름이다.
……왜 그때 한평원이 당황했는지 알겠다.
한평원의 증조부, 한훈열의 능력은 비밀이 아니다. 인터넷에 한훈열만 쳐도 나온다.
나도 처음 내 능력에 대해 검색했을 때는 한글로 쳤었지. 옛날에는 우리나라에도 보호 능력자가 꽤 있었다고 나왔다. 그런데 그것치고는 관련된 자료가 영 안 나와서 해외 사이트를 뒤졌다. 그때 스쳐 지나갔던 이름 중에 독립운동가가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한평원의 집안이 독립운동가문인 건 모를 수 있다고 하자.
아니, 사실 백번은커녕 천 번 정도는 양보해야 할 것 같다.
뒷골이 당겼다. 아니다. 아냐……. 침착하자. 아직 수습할 수 있다. 그냥 멋쩍게 웃으면서,
‘하하, 제가 수능 때 근현대사를 안 봤거든요.’
하면 된다.
…….
될 리가 있냐! 사람이 더 무식해 보이잖아!
물론 나도 변명거리는 있다. 변명만 있나. 오히려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래. 내가 근현대사를 선택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수능 때 안쳤어도 국사는 배웠다. 중학교, 하다못해 초등학교 때도 국사는 배웠다. 하지만 거기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초능력자들이 창설한 독립군 같은 거 모른다고!
이 드라마는 독립운동 몇십 주년 기념 드라마도 아닐 텐데 왜 이런 설정을 넣은 거야?!
“할아버지가 해준 씨 되게 궁금해하시더라고요.”
한평원은 내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말했다.
한평원은 누구와 달리 상식 있는 현대인이라 내가 역사를 좀 모른다고 해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 점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물론 한평원은 죄가 없다. 그냥…… 이 빌어먹을 드라마가 문제지. 더러운 드라마. 원래도 안 봤지만 앞으로도 절대 안 볼 거다. 정해영보고도 적당히 보라고 해야지.
“그래요?”
“할아버지는 국내에 보호 능력자 맥이 끊긴 걸 슬퍼하셨거든요. 해준 씨가 각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 좋아하셨어요.”
독립운동가문이라. 내 원래 세계, 그러니까 현실에는 그런 게 없었으니 어떨지 궁금하긴 했다. 다르게 생각하니 입맛도 좀 썼다.
한평원이 운전하는 차는 산골로 접어들었다. 강원도에는 와 본 적이 별로 없어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멍하니 창밖 풍경이나 구경했다. 도로 위에 있는 차가 이것밖에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한평원이 살인마로 나왔던 영화는 몇 년 전이니까. 케이블 드라마에 나오면서 굳이 비슷한 역할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않았…… 겠지?
“다 왔어요. 여기서부터는 조금 걸어야 해요.”
차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비포장도로가 있었다. 좁아서 차는 들어가지 못할 너비다.
초능력 개발이니 뭐니 훈련도 하고 비상근무를 뛰다 보니 체력이 붙었는지 오히려 몸은 가볍기까지 했다. 날도 맑고, 미세먼지는…… 생각하기 싫고. 어쨌든 풍경도 좋으니 걸을 맛이 났다.
강원도에도 봄이 한창이다. 푸르게 우거진 산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해가 벌써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좋게 생각하자. 그냥 여행 왔다고.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길을 오르는 게 힘들어서는 아니다.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어……?”
길옆에 계단으로 된 등산로가 나왔다. 오르막이 가파른 게 딱 봐도 힘들어 보이는 길이다. 한평원이 눈길을 주지 않으니 우리가 올라갈 길은 아니다. 다만 내 눈을 사로잡는 표지판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길,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표지판이었다.
[강원서천농원]
“…….”
그래, 강원도에 뼈살이꽃을 키우는 서천농원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말이지…….
좀…… 작위적이지 않아? 드라마라서 그런가? 그런 걸로 대충 해도 되는 건가?
“해준 씨? 힘들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조금 거리가 멀어진 한평원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렇지만 시선이 자꾸 서천농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했다.
조만간 저길 향할 것 같다는, 예감 아닌 예감이 들었다.
* * *
산길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평원 씨.”
아무 말 않고 걷고 있긴 하지만 한평원의 증조부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산골 속에서 사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냥 산골도 아니고 차에서 내려서 한참 걸어야 한다니.
“네?”
“평원 씨 증조부께서 지내시기에는 길이 너무 험하지 않습니까?”
나름 길이 나 있긴 하지만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차도 다니지 못하면 생필품을 나르는 데 문제가 많다.
한평원은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뒷마당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데, 그쪽 길을 공사하고 있거든요. 여긴 임시방편이죠.”
“공사가 언제까지인데요?”
“다음 주요.”
다음 주 지나서 날 데려오면 안 됐던 걸까…….
능력에 대해서 물으러 가는 입장에서 이런 말 하기도 염치없긴 하지만, 애초에 날 초대한 건 한평원의 증조부 아니신가. 살짝 반발심이 올라왔다가 그 할아버지가 90살이 넘는 분이시고, 독립운동가라는 사실도 떠올라 말았다. 오랜만에 등산도 하고 좋네…….
“그리고, 어.”
“네?”
“그, 자동차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한평원 씨 증조부께서요?”
“아뇨, 할아버지 말고요.”
“그럼?”
한평원은 하하, 웃기만 했다. 도서관이나 산불 때는 이것저것 잘 말해 주기에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이거 영 불안한데.
보통 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경험상 인간의 감이란 것은 생각 외로 높은 적중률을 보였다. 불길한 것에는 더욱 적중률이 높았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게 괜히 있는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다면 인간사는 반드시 나쁘게 흘러간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한평원의 얼굴은 평범했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 앞에 뭐가 있어서? 90살 독립운동가 할아버지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왔냐?”
그때,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90살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형, 할아버지는?”
“이제 인사도 안 해?”
“얼마 전에도 봤잖아…….”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남자 하나가 배를 벅벅 긁으며 다가왔다. 운동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키도 크고 몸도 근육질인데, 입고 있는 옷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할머니들이 입을 법한 몸빼 바지였다. 거기다 맨발에 슬리퍼.
남자는 삐딱하게 서서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날 보았다.
“얘냐?”
이건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정해준 씨야.”
“……안녕하세요.”
부모님한테 인사 하나는 죽어라 교육받은 불쌍한 대한민국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남자는 멀뚱히 내 얼굴만 바라봤다. 한평원이 남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
“어? 아, 거, 안녕하쇼. 훈열이 보러 왔다고?”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내 얼굴을 본 한평원은 하늘을 바라봤다. 한숨을 푹 쉬는 게 세상 고달픔이 거기 다 깃든 얼굴이다.
한평원에 대한 평이 확확 바뀐다. 쟤도 가여운 인생을 살고 있어 보였다.
“해준 씨, 여긴 진열이 형이에요. 한진열.”
남자는 한평원의 말을 듣고서야, 아, 하며 머리를 긁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맞아,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인사를 하라고 했었지.”
뭐라는 거야, 이 사람······?
“내 이름은 한진열이고…… 알아서 불러.”
저 손을 꼭 잡아야 하나. 잡기 싫었지만 인사하는데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정해준입니다.”
남자는 조금 아플 정도로 내 손을 잡았다. ……시비 거는 건 아니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진열을 봤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늘어진 티셔츠 아래로 보이는 몸이 근육질인 거 보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잡은 것 같기도 하고.
“나이도 내가 더 많은데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내가 훈열이랑 우리 가족 말고 인간 보는 게 오랜만이라서 좀 어색해.”
“아, 네…….”
증조부의 성함을 찍찍 내뱉는데도 한평원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 가풍이 미국식일 수도 있지. 한국에 산다고 꼭 한국식 가풍을 유지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너무 유교에 얽매어 있는…… 개뿔.
한진열은 휘적휘적 걸었다. 그럭저럭 정리가 되었다고는 해도 흙바닥인데 슬리퍼를 신고 잘도 걸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좀…… 이상한 거 보면 드라마 스토리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기는 한데,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 상식이 파괴되는 기분이다. 진짜 괜찮을까?
한진열은 자기가 나이가 더 많다고 했지만 아무리 잘 쳐 줘도 한평원과 비슷해 보였다. 한평원이 몇 살이지? 스물넷? 스물다섯?
한평원이 형이라 부르는 걸 보면 어리진 않을 텐데. 모르겠다. 드라마 등장인물이라 생각하면 뭔가 남모를 사정이 있는 캐릭터일 수도 있다. 증조부 성함을 무슨 옆집 친구처럼 불러도 가만히 있는 한평원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형, 누나는요?”
한평원은 살짝 내 얼굴을 보더니 한진열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성이 같은 거 보면 형제나 친척이려나?
아니다. 인터넷에서 봤을 때 한평원 형제는 누나뿐이다. 젠장……. 인터넷에 치면 가족사항도 다 나오는 유명한 집안인데 그걸 전혀 모르는 내가 얼마나 무식해 보였을까.
이미 엎지른 물이다. 모른 척해야지.
“네 누나? 안 내려오던데.”
“살아 있죠?”
“안 내려오는 거 보면 살아 있겠지.”
독립운동가문의 대화도 나와 정해영 대화 수준이랑 차이가 안 나는군. 왠지 안심이 됐다.
“한 번씩 확인 좀 해요.”
“내가 왜?”
“……누나도 할아버지 증손녀거든요?”
한진열은 하품을 쩍 했다.
“누가 뭐래? 그래서 숨 붙어 있는지는 확인하고 있잖아.”
내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걸 보면 역시 드라마 내용이겠지? 한평원 같은 가정사가 드라마에 안 나올 리도 없다.
어쨌든 나무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라. 마당 빨랫줄에 걸린 수건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고즈넉한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을 가르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진열!!!”
마른 몸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싸리 빗자루를 쥔 할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났다. 일어난 키가 나이답지 않게 컸다. 젊었을 때는 분명 한 덩치 하셨을 거다.
“도대체 얼마나 말해야 알아먹을 거냐! 괭이 새끼도 네놈보다는 잘 알아 처먹는다.”
“윽.”
한진열은 이어지는 노성에 어깨를 움츠렸다.
“아, 그치만 이게 편한데…….”
“손님 오시는데 그런 천 쪼가리는 그만 입으라고 하지 않았냐!”
한진열은 눈치를 살살 보며 한훈열에게 다가갔다.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었다.
“……?”
잠깐만.
“그치만, 훈열아.”
꼬리?!
“다른 옷은 불편하단 말이야.”
한진열의 바지춤 사이로 검은 줄무늬가 그어진 노란 꼬리가 삐죽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