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33화 (33/202)

# 33

14. 드림팀(3)

퍼드덕.

방 안이라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데 고집스럽게 날갯짓을 하는 백조 두 마리가 있었다.

“…….”

그리고 그 앞에 영혼이 없는 표정으로 리드 줄을 끌어당기는 여고생이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저주에 걸린 건진 모르겠지만 날개를 파닥거리는 백조 두 마리와 본의 아니게 묵언 수행을 하게 된 여고생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혼미해졌다. 사실 저주에 걸린 건 나인 거 아닐까.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진짜로?

어쨌든 구민석은 내 정신상태와는 별개로 백하연에게 이것저것 말해주었다. 단청 연구원들이 기르는 쐐기풀과, 그 쐐기풀로 어떻게 옷을 만드는지에 대한 시뮬레이션 결과에 관한 내용이었다. 묘하게 21세기와 중세가 섞여 있는 대화였다.

그 연구원들은 괜찮은 걸까? 열심히 해서 단청에 들어왔는데 하고 있는 게 쐐기풀 기르는 거라고? 모시를 만드는 데 모시풀이 쓰이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 모시풀이 쐐기풀과에 속하는 줄도 처음 알았다. 연구원들이 모시풀로 만든 옷도 쐐기풀로 만든 옷으로 간주되어 저주를 풀 수 있는지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는 걸 들으니……. 심지어 그 토론은 결론이 안 나서 둘 다 기르고 있다고 했다.

거기 부회장님. 정말 회사 연구원을 그딴 거에 써도 괜찮은 겁니까?

“훈련은 어떻게 되어 가요?”

단청 연구원들의 피땀 어린 쐐기풀 연구에 대해 듣고 있는데, 그에 관심이 없던 박서원은 내게 훈련 성과를 물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코가 석 자다. 숙제 검사는 고등학교 이후로 받은 적이 없는데 기분이 꼭…….

“8등급 됐다고 그만둔 건 아니죠?”

학창시절 나는 알아서 예습 복습 다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숙제도 요령껏 했고, 시험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범생은 아니어도 요령은 좋았다. 그래서 박서원이 이 질문을 할 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에 대한 답변도 준비했다.

“같은 능력자분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훈련 방법을 물어보려고요.”

“한평원 만났어요?”

박서원 입에서 바로 한평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평원 씨를 압니까?”

“대한민국에 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박서원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뭔가 구미가 당기는 생각을 하고 있는 얼굴이다.

“걔 증조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고요? 잘됐네요. 좀 배우고 와요.”

……한평원이 그렇게 유명한 애야? 증조부가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다른 물 능력자와 함께 산불을 향해 물을 쏟아부었을 때도 한평원은 오래 버텼다. 정확한 등급은 몰라도 대단하긴 할 거다. 그날 산불이 진화될 때까지 안색이 멀쩡했던 건 한평원뿐이었으니까.

거기다가 박서원까지 한평원을 알고 있다니. 역시 한평원도 등장인물이다. 하긴 배우가 맞으니까 등장인물이겠지.

“평원 씨 증조부도 아십니까?”

“…….”

박서원은 묘한 눈으로 날 보았다. 저 눈빛은 안다. 대학교 때 교수님이 나와 내 동기들을 보던 눈빛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애가 다 있지, 하는 눈빛.

“어쩐지…….”

뭐라고 항의하고 싶은데 하면 더 바보가 될 거라는 감이 와서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재현이가 정해준 씨 이야기를 그렇게 하더라고요.”

재현? 잠깐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그게 북촌 도서관에서 만났던 의경 이름인 게 떠올랐다. 이상하게 내 눈치를 살피던 애.

“재현이가 사람 보는 눈이 없거나 내가 정해준 씨를 잘못 봤거나 했는데 역시 그런 사람은 아니었네요.”

“……무슨 뜻입니까.”

“생각이 깊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니면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한다거나? 근데 그런 것 같진 않고.”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해준 씨, 뉴스도 좀 보고 사세요. 세상 혼자 살 일 있어요? 산골짝에 틀어박힐 거 아니면 뉴스도 보고, 신문도 보고.”

피식 웃는 면상이 그렇게 재수 없을 수가 없었다. 진짜 이런 애가 인기가 많다고? 뭐 때문에? 얼굴? 키도 나보다 작잖아!

“재현이 오래 봐서 걔가 고생하는 것도 오래 봤거든요. 그래서 혹시 정해준 씨가 실수할까 봐 알려 주는 거예요.”

박서원은 안쓰러움과 비웃음, 걱정과 잔소리 등등을 한 번에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 배우는 다른가 보다.

그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표정으로, 박서원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에 인터넷에 김무영 쳐 보세요.”

김무영이 누군데?

“한평원도 좀 쳐 보고요.”

그렇게 말하면 찝찝하잖아. 내가 도대체 뭘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내게 이름 두 개를 던져 준 박서원은 백조 두 마리에게 신경을 썼다. 정확히는 백조 두 마리와 묵언 수행 중인 여고생 앞에서 보고서를 넘기며 프레젠테이션 중인 구민석을 보았다. 그러자 백조 두 마리가 꽥꽥거렸다. 마치 자신들에게 관심 좀 달라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박서원은 구민석에게 뭐라 말하다가 짜증 나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백조를 노려봤다.

“…….”

다시 봐도 정말 이상한 풍경이다. 요즘 드라마는 다 이런 건가?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짜증을 내다 못한 박서원이 리드 줄을 염력으로 들어 올려 백조를 꽁꽁 묶기 시작했다. 동물단체에서 동물 학대라고 항의할 만한 모습이다.

도대체 정해영은 왜 이딴 드라마를 좋아한 거지. 이름도 그렇다. 줄임말도 이상하잖아. ‘빌더쓰’라니. 빌어먹쳐먹게 더러운 쓰레기의 줄임말인가?

“이 새대가리 새끼야! 머리까지 새가 된 거 아니면 얌전히 있으라고!!”

“서원 씨, 입도 묶어 버리는 게 어떤가?”

두 손을 맞잡은 채 오빠를 꽁꽁 묶어 버리는 모습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고생까지.

이게 위험등급군의 괴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모인 팀이라고? 백하연을 제외한다고 해도 여전히 개판이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건가? 이걸로 괜찮은 거냐고!

리드 줄에 날개가 감긴 백조가 길게 목을 빼며 울었다. 백조가 돼지 멱 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꽤애애액!!”

하하, 이런 쓰레기 드라마…….

* * *

한평원에서 연락 온 건 백조 두 마리를 소개받고 정확히 이틀이 지난 뒤였다.

“주말에 괜찮으세요? 아, 서울 벗어나는 거니까 미리 신고해 두세요.”

드라마 속 초능력자의 삶이란 바쁜 듯 바쁘지 않아서, 가끔 요괴대책팀의 임상규의 연락을 받고 나간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 벗어나는 것도 말해야 한다고?

마침 아직 해산 전이라 임상규에게 물어봤다.

“강원도요? 미리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긴 합니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초능력자에게 곧바로 연락하는 데, 그때 지역에 없으면 난감한 일이 생기니까요.”

특히 나 같은 특수 능력자가 연락 없이 빠지면 힘들다고 했다.

“저희한테 바로 연락하셔도 되는데, 소속 센터에 연락 주는 게 나을 겁니다. 보통 관리부서에서 처리하거든요. 센터에서도 초능력자 위치를 대충이나마 파악해 두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관리부서의 김석준에게 연락했다.

“뭐? 강원도? 언제 가서 언제 오는데? 아, 알았어. 일정 바뀌면 꼭 말해 줘야 한다.”

그러고 보니 교육 때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긴 있다. 비상근무인 만큼 무책임하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힘들게 된다고. 솔직히 공무원이나 군인이 아닌데 행동에 제약까지 줘야 하나 싶긴 하지만, 나름대로 세금 같은 걸로 혜택이 있는 모양이긴 하니 그걸로 퉁치나 싶다.

어쨌든 한평원한테서 연락이 온 덕분에 미루던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박서원이 가르쳐줬던 이름을 검색해 보자. 또 괴상한 눈초리를 받기 전에 알아 둬야지.

솔직히 이곳에서 지내려면 이것저것 알아둬야 하지만, 동시에 알면 알수록 이곳이 내 세계가 아닌 걸 실감하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미루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는 걸 자꾸 미루게 되었다.

그래도 이제 미룰 수 없다.

먼저, 김무영이다.

김재현 본인의 이름도 아니고 생뚱맞게 김무영 이름이라니. 한평원은 한평원 이름 검색해 보랬었잖아.

그런 소소한 불만을 앉고 이 말도 안 되는 드라마 세계에 들어온 뒤 늘 신세 지는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김무영…….

“…….”

내가 김재현을 처음 보았을 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고 느낀 게 기억났다. 그럴 만도 하지. 포털 사이트에 뜬 프로필 사진은 영화나 드라마에 악역 전문으로 자주 나왔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드라마를 많이 안 보긴 해도 영화는 종종 봤고, 유명 배우를 몰라볼 만큼 속세와 먼 삶을 살진 않았다.

프로필 사진의 김무영은 김재현을 꼭 닮아 있었다. 아니지, 김재현이 더 어리니 김재현이 김무영을 꼭 닮았다.

김무영이 배우인 건 맞으니 그럼 드라마 등장인물이겠고. 그런 김무영을 닮은 김재현도 등장인물이 맞겠지. 앞으로도 잘 해 줘야지. 왜 이렇게 닮았는지는……. 아, 혹시 진짜 배우의 아들인 건가? 부자가 나란히 배우라. 그래. 그런 거면 닮은 게 당연하지. 김재현 얼굴이 눈에 익었던 것도 김무영 배우 때문이었군.

그런데 왜 굳이 김무영을 쳐 보라고 한 거지.

“……아.”

프로필 사진이 너무 눈에 익어서 한 번에 발견하지 못했는데, 김무영 이름 옆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니 머리가 아팠다.

[전 국무총리]

씨발…….

기억을 되새겨 보자. 나는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이렇게 이유 없이 기시감이 들진 않을 거다. 분명 어디선가, 이름을…….

…….

…….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하긴 테스트 영상은 뉴스에 안 내보냈으니까 못 알아보겠네요. 이거 그거에요.’

‘김무영 게이트.’

입사 초기에,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전 국무총리의 사생아의 편의를 봐주려던 이들이 시작한 각종 비리의 온상. 그런 이야기를…… 들었긴 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왜 박서원이 나보고 뉴스 좀 보라고 했는지 알겠다. 변명의 여지가 없……. 아니, 사실 억울하다.

아니, 누가 국무총리가 이 배우일 줄 알았냐고! 악당처럼 생기긴 했지만 내 세상에서 이 얼굴은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봤던 프로그램에서 아내랑 같이 나와서 화목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사생아 때문에 게이트까지 터뜨리고 감옥 갔을 줄 어떻게 아냐고!!

여기 정말 싫다……. 집에 가고 싶어…….

김무영……. 그러니까 김재현 건은 이렇다. 그래, 정치인 얼굴 모르는 게 대수냐.

연예인 얼굴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은 없……. 시발, 지금은 좀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연예인 몰라도 원래는 사는 데 지장이 없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얼굴만 대충 알면 되지 않나? 어차피 투표 때도 얼굴 보고 찍지 않잖아. 공약을 봐야지.

이름은 알지만 뉴스를 안 봐서 얼굴을 몰랐어요,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럼. 아무런 문제없다. 뉴스를 안 보는 게 죄도 아니고. 안 그래? 그렇잖아! ……근데 여기 대통령은 누구지? 그건 그대로인가?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래도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박서원이 말한 이름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한평원.

……얘도 그때 반응이 이상했는데. 사람 되게 찝찝하게 만드는 반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길 못 알아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한평원이 전 대통령 아들이라고 해도 놀라지 말자. 현 대통령 아들이라고 해도 놀라지 말자. 설마하니 미국 대통령 아들이라고 해도 놀라지 말자.

마음을 굳게 먹고 포털 사이트에서 김무영 이름을 지우고 한평원을 넣었다. 제발, 제발 그냥 좀 유명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네?

“후…….”

슬쩍 휴대폰 화면을 보니 대통령 같은 건 없었다. 한평원. 초능력자(물). 괜히 졸았네. 평범하잖아.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연관검색어가 평범하지 않았다. 한평원 능력. 한평원 물. 한평원 독립운동가. 한평원 할아버지. 한훈열.

결국 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독립운동가 가문을 못 알아본 걸 수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두 눈 딱 감고 무식한 척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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