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14. 드림팀(1)
드라마 세계 속으로 들어온 뒤로 아침마다 휴대폰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침대에 누워 숨을 쉬다가 휴대폰을 들어 시간과 함께 간밤에 일어난 일을 확인했다.
[불개, 애완견 되다?]
[불여우에 대한 대책 마련 시급]
[길 잃은 불개, 초능력자의 번견으로]
며칠 전, 충북에서 있었던 산불과 함께 백성찬의 일이 뉴스를 탔다. 덕분에 각종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백성찬과 불개가 차지하고 있었다.
불개는 가끔 나타나는 몇 안 되는 무해한 동물이다. 등장 조건이 좀 까다로워서 그렇지 삽사리와 꼭 닮은 외견 덕분에 원래부터 인기는 많았다.
그렇지만 인간을 공격하진 않아도 불개는 기본적으로 들개였다. 경계심이 많다.
그런 불개가 일식이 아닐 때 모습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람을 따르는 것도 처음이다.
당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백성찬에게는 다행히도, 불개는 보통의 개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먹이를 가리지도 않았고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 영리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으면 내가 키우고 싶을 만큼 귀엽기도 했다.
물론 백성찬은 그걸 불행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불 능력자들도 불개 앞에서 불을 만들어 봤지만 백성찬이 보여 준 불이 퍽 인상 깊었는지 불개는 백성찬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백성찬은 그의 짐작대로 반강제로 불개를 떠맡았다. 다음 월식이 7월이니, 그때까지 꼼짝없이 불개를 키워야 한다.
까만 삽사리를 내려다보던 백성찬의 얼굴은 밝지 않았지만…….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그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내가 왜 이런 본 적도 없는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지, 정해영의 남자 보는 눈은 왜 그따위인지,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당면한 고민은 이거다.
[9일 4시 단청 본사 회장실]
누가 보냈냐고?
당연히 박서원이다.
제주도 건에서는 전화를 하더니 이젠 문자만 찍 보낸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가고 싶지 않아서 문자를 못 받은 척해 볼까도 했는데 안 통할 것 같아 포기했다. 그래서 전화를 해 봤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아직도 해외인가.
박서원이 드라마 주인공이고, 나는 이 드라마에서 나가야 하니 이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박서원은 가까이 두고 싶은 타입은 아니다. 박서원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툭툭 내뱉는 말이나 표정, 자기 할 말만 하고 마는 것까지 참……. 최나라의 말대로 재수 없다.
물론 묘하게 선은 지킨다. 하긴 다 내려놓는 건 아직 대한민국 드라마에서는 이르지.
사실 무엇보다도 꺼려지는 이유는 박서원은 드라마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주인공이라 가까이 있어야 하지만 드라마 주인공이기에 가까이 두고 싶지 않다.
다른 인물보다도 박서원을 볼 때마다 이곳이 드라마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오늘도 내 새끼 너무 예쁘다!’
그렇다. 박서원은 정해영이 사랑해마지않는 ‘내 새끼’ 아니던가. 정해영과 관련된 건 피하고 싶다.
……뭐. 박서원이 내게 충분히 호의를 베푼 건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름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한강을 내려다보는 고급 아파트에서 살아보겠어.
다시 문자를 봤다.
[9일 4시 단청 본사 회장실]
……긍정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단청 같은 큰 회사 회장실을 가보겠어?
일반 직원도 쉽게 못 갈 곳이다. 거기 앉아 있던 부회장 얼굴을 떠올리니 속이 울렁거렸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얼굴이었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아는 얼굴이 등장한다. 꼭 여기가 드라마라고 내 귀에 대고 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후…….”
침대에 누운 채로 문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냐.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갈 수밖에 없겠지. 무려 주인공님의 호출이다. 어쩌면 드라마 주요 스토리가 풀릴지도 모른다. 내가 그걸 구별할 방법이 없어서 문제지만…….
‘내 새끼가 오늘은 뭐 했는지 알아? 숨 쉬었어!’
정해영은 쓸모가 없다, 쓸모가…….
* * *
오랜만에 찾아온 단청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외관이나 내관이나 반짝반짝거리는게 여기만 22세기 정도 되는 느낌이다.
박서원도 없이 혼자 와서 어쩌나 싶었지만 로비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날 먼저 알아봤다.
“정해준 씨 되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엄청난 거물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렇게 속물적인 인간이었다니.
“이쪽으로 오시죠.”
아직 날이 추웠을 때 박서원과 함께 왔던 곳에 다시 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끊임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나무로 된 문을 지나서.
“…….”
인간이 좀 속물적이면 어떤가. 원래 인간은 속물적인 동물이다.
“부회장님이 곧 오신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비서가 정중하게 말했다. 눈 한 번 깜빡하자 내 앞에 고급스런 잔에 담긴 커피와 다과가 차려졌다.
……문득 단청에서 책임진 내 통장 잔액이 떠올랐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적어도 그거 하나는 그리울 거다.
“정해준 씨?”
멍청한 얼굴로 과자만 오독오독 씹어 먹고 있는데, 비서의 말대로 부회장, 구민석이 금방 나타났다. 여전히 얼굴이 적응이 안 된다.
“일찍 왔군. 정작 서원 씨는 아직 안 왔는데 말이지.”
일찍이라고 해 봤자 연락받은 시간이다. 4시. 음, 좀 넘긴 했다.
“뭐……. 박서원 씨는 바쁘잖습니까.”
“나보다?”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와 굴지의 대기업 총수라. 흠.
“관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구민석은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런데 박서원 씨 외국이라고 들었는데……. 한국엔 언제 들어왔습니까?”
“두 시간 전쯤?”
“……네?”
“공항에 도착했다고 연락받았거든.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박서원이 조금 불쌍해졌다. 그 인간도 결국 스폰서 앞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군.
“서원 씨 없어도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구민석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였다.
……왜 저한테 친한 척이세요. 어색하게.
“어쨌든 해준 씨 활약상은 많이 들었네.”
“활약상이라니…….”
“북촌 도서관이나 이번 불개 때도 힘 좀 썼다지? 역시 보호는 탐나는 능력이라니까. 좀 더 많으면 좋으련만.”
“아, 뭐……. 그렇죠. 우리나라에는 두 명밖에 없다고 압니다만.”
그나마도 한 명은 할아버지니 실질적으로는 나 하나다.
나라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보호막 능력자가 아예 없는 곳도 많으니 한국 정도면 선방한 축이다.
구민석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이렇게 보기 힘든 능력이 아니었는데 육이오 이후로는 씨가 말라서…….”
“……?”
여기서 6.25 전쟁 얘기는 왜 나와? 젠장. 진짜 역사책이라도 하나 사서 봐야겠다.
“어쨌든, 해준 씨가 잘 해 줘서 보람이 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아,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구민석은 싱긋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엔 나 말고 정해영이나 우리 엄마가 왔어야 했다.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할 텐데.
구민석과 일대일로 이야기를 하기에는 구민석이 너무 대단한 인간이라서 제대로 볼 용기도 안 났다. 국민배우 얼굴에 대기업 부회장이라니. 오버스펙도 정도껏 해라. 하긴 드라마라면 평범한 축일지도 모른다.
비서가 구민석 몫의 커피를 내오고, 우린 조용히 커피나 마셨다. 원래 커피는 잘 안 마시는데 대기업 회장실에 나오는 커피는 도대체 어떻게 내린 건지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 비싼 커피겠지.
“서원 씨 왔네.”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시던 구민석이 뜬금없이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했는데, 정말 조금 뒤 문이 열리며 박서원이 들어왔다.
구민석은 휴대폰을 잠깐 만지다 품에 넣었다. 그렇게 착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늦었다고 미리 연락을 준 모양이다. 대기업 부회장 앞에서는 박서원도 어쩔 수 없는 일반 시민이다. 초능력자도 별거 아니다. 누가 말했지 않은가. 돈이 최고의 초능력이라고.
“걔네는요?”
박서원은 회장실을 둘러보다가 대뜸 물었다. 누구 더 올 사람이라도 있나.
구민석은 우아하게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안 왔어.”
“그럼 일찍 올 필요 없었네.”
4시부터 30분가량 기다린 나는 안 보이는 건가? 박서원은 눈이 삔 걸까? 대한민국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서 저런 애가 드라마 주인공을 다 할까…….
아니면 내가 드라마를 안 봐서 최근 트렌드를 못 따라가는 걸까? 사실 대한민국 드라마치고 박서원은 인격자인 걸까?
드라마 속에서는 알 방법이 없군.
박서원은 자기 집 거실처럼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저런 당당함은 배워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딜 가도 내 집처럼 지낼 수 있어 보였다.
“아직도 그래요?”
“아직도 그렇지.”
“……그럼 언제쯤?”
“회사 연구팀 돌리고 있긴 한데, 아무리 빨라도 여름은 되어야 할 것 같더군.”
“하…….”
박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 같은 새끼들.”
깜짝 놀라 박서원을 보았다. 말투가 좀 퉁명스러워도 원색적인 욕은 거의 하지 않던 박서원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박서원의 심기를 거슬러도 단단히 거스른 모양이다.
“거, 친구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게나.”
구민석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친구? 박서원한테도 친구가 있어?
“병신 같은 건 병신이라고 해야죠. 회장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뭐…….”
구민석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박서원에게 주의를 줬다.
“회장 아니라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고요.”
“왜 안 중요하나? 기자들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잖나. 무슨 드라마 속 재벌 상속 다툼도 아니고.”
드라마 속 재벌이 드라마 속 재벌을 논하다니. 표정관리, 표정관리.
“걔네 때문에 일정이 다 틀어진 건 사실이잖아요.”
“걱정 말게.”
구민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손해배상 청구는 안 해도 개같이 부려먹긴 할 거네. 난 손해 보는 성격은 아니거든.”
……흠. 대화에 못 따라가고 있는 게 나뿐인 게 아쉽다. 제발 사람을 불렀으면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주제로 대화해 줬으면 싶다.
하지만 돈이 뭐라고, 난 내 통장에 상상도 못 할 거액을 꽂아 준 남자의 얼굴을 보며 과자를 먹었다. 원래 돈 주는 사람이 최고다. 개소리를 하려면 적어도 돈은 주고 해라. 그럼 들어 줄 수 있다.
“그래도 너무 구박하지는 말게. 인간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서원 씨. 시간을 벌었다고 여기자고.”
구민석의 말에 박서원은 입술을 씰룩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울린 인터콤이 아니었다면 꼬인 소리를 했을 성싶다.
“부회장님, 백하연 학생과 그…… 도착했습니다.”
“아, 얼른 들여보내게.”
박서원은 팔짱을 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입꼬리가 또 말려 올라가는 게 심사가 꼬여 보이기도 했고, 굉장히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누굽니까?”
“앞으로 같이 일할 사람들이요.”
사람‘들’?
“지금은 사람이라고 하기 좀 그렇긴 한데.”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인사는 해 둬요.”
두꺼운 나무문은 여전히 소리 없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여자애 하나가 들어왔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교복 위로 두툼한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 학교에서 바로 왔는지 가방을 메고 있다.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드라마 등장인물이라고 확신을 가질 만한…… 이거 너무 쓰레기 같은 말이잖아.
여자애는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게 영락없는 고등학생이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손목에 빨간 리드 줄을 걸고 있는 거?
문득 백성찬의 불개가 떠올랐다. 한평원이 걔한테 빨간 목줄을 선물해 줬었다. 저 여자애도 애완견을 데려온 건가. 동물은 좋아하는 편이라서 기대를 가지고 리드 줄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
눈을 한 번 비볐다. 보고 있는 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비벼 봤다. 여전했다.
박서원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백조 두 마리가 같이 일할 애들이에요.”
하얗고 긴, 우아한 자태의 목에 가죽으로 된 빨간 목걸이를 하나씩 끼고 있는 백조 두 마리가 박서원의 말에 날개를 푸드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