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13. 불조심 캠페인(3)
“해준 씨?”
교복을 입고 사람을 죽이던 과거, 영화에서 보았던 한평원과는 달리 눈앞에 있는 한평원은 성인 남성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과거에 살인마 배역을 맡았다고 몇 년이 지난 드라마에서까지 같은 역할을 맡지는 않을 거다. 거기다 영화와 드라마다. 완전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정해준 씨?”
그렇지만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곳에서 갑자기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요.’라고 하면 누구라도 긴장이 될 것이다.
이건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이 드라마 장르 진짜 호러나 스릴러 아니지?
“그, 무슨 얘기를……?”
“별건 아니고요.”
한평원은 멋쩍게 웃었다.
초능력자는 말도 안 되는, 마법같은 능력을 가졌을 뿐 기본적으로 육체 자체는 평범한 사람들과 같다.
특히 내 능력은 집중력에 꽤 영향을 받는데, 한평원이 갑자기 돌아서 내게 주먹질을 하면 보호막은 금방 풀리고 만다.
물론 방열이 뛰어난 슈트에 머리도 단단히 보호하고 있고, 혹시 모르니 소방관들이 산소통까지 꼼꼼하게 챙겨 줬다. 보호막이 풀린다 해도 타 죽진 않는다. 머리 위에는 물 초능력자가 탄 헬기도 있다. 걱정하지 말자.
아니, 애초에 한평원이 여기서 사이코패스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마도.
차라리 못 알아봤으면 상관없었을 텐데 왜 하필 이 순간 떠올려서는. 괜히 찝찝해지잖아.
“그, 혹시 시간 되시면…….”
이거 번호 따이는 기분인데. 아니지, 번호는 저번에 따였는데.
“저희 증조할아버지 만나러 가시지 않을래요?”
대화가 너무 널뛰어서 따라가지 못했다. 그냥 할아버지도 아니고, 증조할아버지? 뭐야?
어쩔 수 없이 나는 늘 하는 말을 했다.
“네?”
이 드라마에 들어온 뒤로 내가 너무 멍청해지는 기분이다. 이러다가 정해영처럼 되면 어쩌지.
“어……. 그러니까 평원 씨 증조부께서……?”
다행히 한평원은 사이코패스 같은 것도 아니었고, 머리도 정상이었다. 정해영과 정반대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친절하고 정상인이다.
“증조할아버지께 해준 씨 얘기를 해 드렸더니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니, 사실 대뜸 증조할아버지 만나러 가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왜 절 보자고 하시는 건가요?”
“같은 능력이라 궁금하신 거 아닐까요? 저도 그냥 데리고 올 수 있으면 데리고 오라는 말만 들어서…….”
한순간이나마 의심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한평원의 말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북촌 도서관에서 요괴대책팀의 임상규가 그랬다. 대한민국에 보호막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라고.
90살 할아버지와 나.
……그 90살 할아버지가 한평원의 증조할아버지란 말이지.
초능력자 세계는 좁다.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봐라. 임상규한테서 말을 들은 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 말고 다른 보호 능력자의 소식을 듣냐. 할아버지라서 은퇴했다고는 해도. 그래서 나도 외국 사이트를 뒤지며 능력에 대해 검색했지 않은가.
음……. 이렇게 된 거 능력 쓰는 방법에 대해 물으면 알려 주려나.
“저야 괜찮습니다. 언제 찾아가면 됩니까?”
“할아버지께 물어보고 알려 드릴게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강원도에 계셔서……. 그, 괜찮으시겠어요? 가는 건 제가 같이 갈 텐데…….”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다.
“괜찮다니까요.”
가서 내 능력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난 아직도 이 능력을 제대로 모르겠다. 이렇게 냅다 불 속에 던져져도 크게 힘들지 않은 거 보면 생각보다 더 괜찮은 능력일지도 모른다. 도서관에서 도깨비의 불꽃을 막았을 때는 좀 힘들었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세상 좁네요. 평원 씨 증조부께서 저랑 같은 능력을 가지고 계실 줄이야.”
“네?”
“박서원 씨가 워낙 희귀한 걸 본다는 듯이 말해서 우리나라에 보호 능력자가 저 혼자인 줄 알았다고요. 나이가 많으셔서 은퇴하셨다지만 임 팀장님이 얘기 안 해 주셨으면 아마 계속 몰랐을 겁니다.”
“어…….”
한평원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뭐야? 무슨 반응이지? 내가 뭘 놓치고 있나?
“그렇죠, 세상 좁죠.”
한평원은 내 말에 맞장구쳤지만 어색한 웃음이었다.
뭐지? 진짜 내가 뭘 놓친 거지? 불안하잖아. 불안하다고!
나는 게임을 해도 모든 공략을 다 찾아보고 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발매일에 맞춰서 안 한다. 최단 루트를 짜서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게 내 공략법이다. 이 드라마가 게임이라는 건 아니지만, 드라마 속의 주민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나만 모른다는 건 굉장히 불안한 일이었다.
내가 하루 종일 휴대폰을 끼고 사는 게 아니다. 정보는 곧 힘이다. 여의주만 봐도 그렇다. 알고 있는 게 많을수록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쉽다. 내가 그래서 정해영 때 이후로 보지도 않았던 동화책을 찾아서 읽고 있다.
그러니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한평원이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쟤 이름을 인터넷에 쳐보면 뭐라도 나오는 건 있겠지. ‘초능력자 한평원(북천 소속)이 비를 내려 불을 껐다’라는 기사 한 줄이라도 나오긴 할 거다.
“크르릉…….”
그때 타닥타닥 거리며 나무가 불타는 소리 사이로 낯선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한평원이 자세를 낮췄다.
“……들었어요?”
한평원의 살인마 페이스와 증조부 얘기에 깜빡하고 있었지만 원래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불개를 찾는 거였다.
일식과 월식에만 나타난다는 불개는 열이나 냉기를 내뿜는 것을 좋아할 뿐 사람을 먼저 공격하는 짐승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던 건 1월이다. 지금은 4월. 불개가 나타나는 시기가 아니다.
생긴 게 불개와 비슷할 뿐 전혀 다른 괴물일 수도 있다. 불개는 개니까 개와 비슷하게 생긴…… 아니면 갯과 요괴…….
“왈!”
울음소리는 개지만…….
“왈왈!”
너무 개인데…….
“왈왈왈!”
개…….
……그냥 개 아냐?
불길 속에서 튀어나온 짐승…… 아니, 개는 온통 붉은 세상 속에서도 구분이 가능한 검은 털을 가지고 있었다. 몸집이 커다랗고 긴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삽사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놈은 혀를 축 내밀고 헥헥거렸다.
“……진짜 불개잖아?”
한평원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삽사리가 불개라고. 하긴 산불 속에서 털 한 자락 그을리지 않았는데 평범한 개는 아니다. 생긴 건 개지만.
한평원이 깜짝 놀라며 불개에게 다가가자 놈은 금방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긴 털에 가린 눈동자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도깨비의 공격도 막을 수 있는 내 보호막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받는 건 피하고 싶다. 내가 한평원을 붙잡자 한평원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자 불개도 경계하는 걸 멈췄다. 다시 순해진 눈망울로 헥헥거렸다. 꼬리까지 살랑거리고 있다.
“음…….”
한평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준 씨, 불개한테 다가가 봐도 될까요?”
그 말에 나는 불개를 보았다. 좌우로 느리게 흔들리는 꼬리가 보였다.
“괜찮을 것 같은데요. 대신 천천히 움직이죠.”
“네.”
불개 쪽으로 한 발자국 걸었다.
“크르릉…….”
“흠.”
다시 뒤로 물러났다.
“헥헥… 헥…….”
“…….”
반응이 너무 노골적인 개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 경계할 뿐 불개는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보호막 반경을 조금 더 넓혀 안에서 움직여 봤지만 반응은 같았다.
한평원은 결론을 내렸다.
“그냥 다가가는 게 싫은가 본데요?”
“거 참…….”
고민하던 한평원이 제안했다.
“음……. 물을 끼얹어 볼까요?”
“괜히 자극하는 거 아닙니까? 잘못하면 위험할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한평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애타는 인간들의 속을 모르고 불개는 태연하게 앉아서 꼬리를 흔들었다.
한평원은 뭔가 발견했는지 불개에게 다가갔다. 불개가 경계하지 않는 거리까지 아슬아슬하게 다가간 한평원은 손가락으로 불개의 발을 가리켰다.
“쟤 발밑에 잘 보세요. 뭐가 있지 않아요?”
한평원이 가리키는 곳을 잘 보자 불개의 검은 털 아래로 불꽃과는 다른 붉은 빛이 꿈틀거렸다. 불개가 불에 멀쩡해서 그냥 불을 밟고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저거…….
“뭡니까, 저거. 사냥감?”
“쟤도 불에 안 타니까 보통 짐승은 아닌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떠도 제대로 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작은 동물이기는 한데, 그러니까 저기가 머리고……. 저건 꼬리인가? 우리나라 산에서 저 정도 크기의 동물이 뭐가 있지? 다람쥐라 하기에는 너무 크고, 고양이나 삵이라 하기에는 무늬가 없다.
아. 혹시.
“여우?”
“여우요?”
한평원이 유심히 불개를 보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불개가 으르렁거리니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여우……. 듣고 보니 여우 같은데요.”
요괴 나오는 한국 드라마에 여우가 빠지면 섭섭하다. 토종 여우는 멸종했다지만 드라마는 다를 수도 있다.
“하긴 원래 봄 불은 여우불이라잖아요.”
한평원은 불개의 앞발에 눌린 짐승을 바라보며 말했다.
“쟤가 불을 냈나 본데요.”
토종 여우도 아니구나. 뭐? 불여우?
봄 불은 여우불이라는 건 그냥 속담 아니었어? 이렇게 직설적인 말은 아니었을 텐데……. 에라이, 이젠 나도 모르겠다.
“쟤가 불을 냈는데, 그대로 불개에게 붙잡혀서 불씨가 계속 타오르는 거라면 불이 안 꺼질 만하죠.”
“그럼 저 여우를 죽이면 불이 꺼진다는 겁니까?”
한평원은 경악에 찬 얼굴로 날 보았다.
“그냥 풀어 주기만 해도 되지 않아요?”
어떻게 저 가여운 여우를 죽일 수 있느냐 하는 얼굴이지만 그래 봤자 방화범 아니냐. 유해생물이다. 깔끔하게 없애는 쪽이 후환도 없고 세상에 좀 더 도움이 될 거다.
……까지 말했더니 한평원은 이제 날 무슨 사이코패스 살인마 보는 눈으로 보았다.
내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 아냐? 왜 그래?
“네…… 해준 씨 말대로 죽인다고 해도, 불개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떼놓아요?”
불개는 여우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을 부비며 놀고 있었다. 여우가 켕켕 거리며 버둥거렸다. 확실히 여우가 맞다.
“불개도 같이……. 아뇨, 네. 그러게요. 힘들겠습니다.”
불개가 이곳에서 안 움직이면 끌어낼 방법도 없다. 한평원의 말대로 저게 불여우라면 이 주위의 불도 안 꺼진다. 여기에 물을 퍼부으면 불개가 놀라 움직일 수 있지만 그걸 붙잡는 것도 일이다. 최악의 경우 불개가 불여우를 물고 달아나는 거다. 잘못하면 전국이 타 버린다.
“그럼 어떻게 해야 쟤넬 떼어놓을 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불개는 딱 봐도 여우를 그냥 놓아줄 것 같진 않았다. 불개의 앞발에 눌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불여우가 안쓰러웠다. 어린애 손에서 쥐어짜지는 인형 같다.
“왜 여우를 저렇게…….”
산불 한가운데가 아니었다면 TV 프로그램에 나올지도 모르겠다. 여우를 사랑하는 불개 정도의 제목을 달고.
“평원 씨.”
그러나 여우를 사랑하는 불개와 불쌍한 여우와는 별개로, 인간인 나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불개를 확인했으니 돌아가서 생각하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우리 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내 말에 한평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돌아가서 얘기해 보죠. 불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원래 목적은 불개로 추정되는 그림자를 확인하는 거였으니 목적은 충분히 이뤘다.
불개에게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불꽃이 넘실거렸다. 까무러칠 정도로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불 속을 걷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니. 역시 이런 세계가 현실일 리 없다.
드라마라서 그렇겠지.
불개는 가까이 다가오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는지 떠나는 우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여우에게 관심을 쏟았다. 여우가 살려 달라는 듯 구슬프게 울긴 했지만……. 나무 타는 소리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