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12. 주인 없는 박씨(2)
“준비되면 시작하세요!”
대학 다닐 때 이 도서관에 온 적이 있다.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 중 제일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와 같이 도서관 데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걔와 헤어졌던 곳도 이 도서관……. 아니, 이 얘긴 상관없고.
어쨌든 이곳은 내 대학 시절의 추억이 잠든 곳이다.
거창해 보이지만 대학 졸업한 이후로는 안 갔으니 틀린 말도 아니지. 시험 기간 때 사람 많은 학교 도서관 대신 여기 열람실에 앉아서 공부했다. 답답하면 도서관 앞을 산책하기도 했다. 청춘의 쓴 내다.
그리고 그 씁쓸한 추억은 불을 내뿜는 도깨비를 품은 박으로 인해 박살 나는 중이었다.
“시작해요?”
공격 담당은 느루의 이세빈과 이다혜, 그리고 김재현이었다. 김재현은 잔디 위에 올라서서 바닥을 지르밟았다.
“잠깐만…….”
기본적으로 내 능력의 형태는 구이기 때문에 아래를 트려면 집중이 필요했다. 자, 연습했던 대로. 어렵지 않다. 난 할 수 있다…….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멀미하기 직전의 감각과 비슷하다.
“와!”
손이 하얗게 빛나고 박을 감싼 희미한 반구가 나타나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작게 환호를 터뜨렸다. 나는 김재현을 보며 말했다.
“시작해.”
김재현이 발을 굴렀다. 큰 움직임도 아니다. 그러나 흙바닥을 거세게 울리는 진동은 모두 느꼈다. 흙이 아니라면 큰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흙 위라면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다. 더군다나 주위의 흙까지 끌어올 수 있는 능력 아닌가? 겸손도 정도껏 하라지!
흙으로 된 가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내가 펼친 차단막에 한 번 가로막히긴 했지만 아래로는 뚫려 있다. 김재현의 가시는 차단막 아래를 통과해 박까지 도달했다. 뾰족한 가시 하나가 박을 관통했다.
그리고 차단막 안이 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도깨비야? 아니면?!”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이다혜가 외쳤다. 그 옆에서 금, 금, 금 속삭이는 목소리도 있었다. 절절한 발라드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러고 있으니까 좀 깨는데…….
박에서 나온 금은 환수조치 된다고 했다. 불로소득을 노리는 건 국가도 마찬가지다.
차단막 안이라서 그런지 연기는 쉽게 걷히지 않았다. 그러나 박에서 나온 게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큭……!”
뿌연 연기를 거센 불길이 잡아 삼켰다.
내가 말했잖아. 아니었으면 하는 일은 일어난다고. 특히 이런 일에선 더 그렇다. 사고가 없으면 드라마가 아니지.
“도깨비! 세빈아, 준비해!”
“네, 언니!”
본래 흥부전에서 놀부의 박에서 나오는 건 도깨비가 아니다. 동생을 질투해 멀쩡한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린 놀부의 재산을 거덜 내기 위한 무리가 나오고, 마지막에는 눈이 부리부리한 장군이 나와 놀부에게 벌을 준다. 그런데 왜 도깨비가 되었나.
원래 흥부전은 판소리니까 꼭 이야기가 그와 같을 순 없다. 장군이 나와서 이놈! 하는 것보다 도깨비가 나와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편이 시청자들이 이해하긴 더 쉽다. 거기다 불은 가산을 홀라당 태워 먹기 좋지 않은가.
“준비됐어요!”
북천의 초능력자, 한평원이 말했다.
“윽, 차단막 풉니다!”
차단막 안이라 그런지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연기와 불꽃에 휩싸여 도깨비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차단막을 쾅쾅 치는 충격이 도깨비의 존재를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한평원의 신호에 맞추어 차단막을 풀었다. 꺼지지 않은 불길이 마른 잔지에 옮겨붙었지만 그걸 위한 한평원이었다.
툭.
빗방울 하나가 콧등에 떨어졌다.
툭.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 늘어났다. 열기와 함께 붉은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뜬 도깨비가 나타났다.
쏴아아…….
그리고 그 위로 비가 쏟아졌다.
“윽, 한평원! 범위 좀 좁혀 봐!”
“제 능력은 그게 안 된다니까?!”
이다혜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박이 있는 도서관 앞뜰에만 비가 쏟아졌다. 정확히는 한평원의 능력에 의해 물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없었더라면 박을 열자마자 한평원이 물을 쏟아부어 도깨비불의 위력을 줄이려 했다고 설명을 들었다. 어차피 물을 쏟아붓는 건 내가 있어도 마찬가지지만 불을 끄는 것과 불 공격을 막는 건 다른 일이다.
“세빈아! 시작해!”
“네!”
이다혜는 검치고는 날이 조금 짧은 검을 들고 제자리에서 콩콩 두어 번 뛰더니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다혜의 모습이 보인 건 딱 거기까지였다. 어렴풋한 형체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속한 이다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멈췄을 때뿐이다.
“왼쪽!”
이세빈은 눈을 감고 외쳤다.
이다혜는 도깨비의 품속에 뛰어들려다가 멈추고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도깨비방망이가 이다혜의 왼쪽 바닥을 거세게 내려쳤다.
“오른쪽, 다음은 위! 언니, 점프!”
이세빈은 1초 앞의 미래를 볼 수 있다. 별 능력이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경우, 이다혜 같은 전투형 초능력자와 만나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아, 불! 불! 불이요!!!”
“윽……!”
물론 나도 넋 놓고 있는 건 아니다. 한평원이 물을 쏟아붓고 있지만 간혹 튀어나오는 도깨비의 불을 직접 맞으면 이다혜는 부상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입고 있는 초능력자 전용 전투복은 열기는 막아 주지만 불 자체를 막아 주진 못한다.
이세빈의 고함을 듣자마자 이다혜가 멈췄다. 이다혜의 머리 위로 차단막, 그녀를 보호하는 보호막이 쳐졌다.
“와! 보호막! 개쩐다!”
차단을 해 놔도 열기는 전달되어서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이다혜가 외쳤다. 불길은 한평원의 물 덕분에 금방 잡혔다.
그리고 그 틈에 김재현이 가시를 만들었다. 물 때문에 질척질척하게 흙이 질척질척하게 젖어 아까같이 무시무시한 위력은 내지 못했지만 도깨비의 발을 잡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이다혜는 도깨비의 뒤쪽으로 돌아가 등으로 뛰어올랐다.
* * *
“와, 나 보호 능력자랑 일하는 거 첨인데 장난 아닌데?”
쏟아지는 물이 멈춘 하늘은 아직 새파랬다. 비가 아니라 날씨 자체에는 영향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파란 하늘 아래서 쫄딱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던 초능력자들은 임상규가 어디서 구해 온 수건으로 얼굴만 겨우 닦았다. 사실 몸은 옷이 방수가 되는 터라 크게 젖지 않기도 했다.
“나 이렇게 도깨비 쉽게 잡은 거 처음이야!”
이다혜는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저도요.”
“저도예요.”
“……저도.”
이세빈과 한평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다혜의 말에 동조했다. 김재현도 소심하게 덧붙였다.
“정해준이라고? 새날 소속? 아깝다! 느루로 안 옮길래? 누나가 잘해 줄게.”
이다혜는 능력이 성격에도 영향을 끼치는지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아뇨, 옮길 생각은 없는데요…….”
“그래? 그럼 번호 좀 줘. 혹시 도움 필요하면 전화해도 돼?”
라고 말하며 이다혜는 내 주머니에서 멋대로 휴대폰을 들고 가더니 번호를 누르고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혹시 필요하면 언제든 이 누나한테 전화해, 동생!”
“언제부터 누나가 됐어요?”
“어?”
한평원의 말에 이다혜는 눈을 깜빡이다가 홱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혹시 서른한 살보다 많아?”
“네? 아뇨.”
“동생 맞네!”
이다혜는 깔깔 웃으며 한평원의 등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이다혜의 손이 닿을 때마다 한평원은 몸을 뒤틀었다. 소리부터가 아파 보이긴 했다.
“아, 아파요, 그만 때려요……!”
“누나의 사랑의 매야!”
“제 등은 연약해서 누나한테 맞으면 멍든다고요. 아, 진짜 아파요!”
이다혜는 코웃음을 쳤다.
“사내새끼가 엄살은.”
“누나 서브 신체 강화잖아요……. 제발 자기 몸 좀 생각해요. 걸어 다니는 흉기, 아! 말 안 할게요! 그만 때려요!”
이다혜와 한평원이 아옹다옹하는 동안 이세빈과 김재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놀라는 기색은 없는 게 하루 이틀 이러는 건 아닌 듯했다.
뭐, 비상근무 뛰는 초능력자들의 수 자체는 거기서 거기다.
대한민국에 초능력자는 많지만 4등급 이상 되는 초능력자는 적고, 비상근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초능력자는 더 적다. 결국 이 일도 소수 인원으로 돌아가는, 소위 말해 사람을 갈아 넣어 해결하는 일이라는 거다.
좀 더 드라마적인 모먼트로 말하자면, 등장하는 배우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다 거기서 거기인 얼굴만 보이는 거겠지.
“저기…….”
이다혜에게 등을 얻어맞던 한평원은 이다혜가 이세빈과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말을 걸었다. 멋쩍게 웃는 얼굴이 곱상한 게, 여기도 드라마 등장인물이겠거니, 했다. 초능력자들은 대체로 등장인물이라 생각하면 될 듯싶었다.
“저도 연락처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살면서 인기 있는 순간이 세 번 온다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한평원의 뒤를 이어 이세빈도 내게 연락처를 받아 갔다.
물론,
“형, 저도요…….”
김재현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다들 왜 이래?
“그거야 보호 능력자는 여러모로 쓸모가, 큼, 유능하니까요.”
그런 내 의문에는 임상규가 대신 대답했다.
“대한민국에 등록된 보호 능력자가 몇 명인 줄 아십니까?”
내가 알면 불법이다.
등급산정관리부서에 일했던 만큼 알고자 하면 사실 알아낼 수는 있긴 한데 최소한 공무원 앞에서 말할 얘기는 아니지.
“해준 씨까지 포함하면 두 명입니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중 한 분은 90세가 넘는 노인분이시니까 실질적으로는 해준 씨 하나죠.”
혼자군.
“보통 이런 도깨비를 잡는 데는 시간이 배 이상 듭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초능력자도 일곱 이상은 부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 해준 씨 포함해도 다섯 명이죠. 그런데도 시간은 덜 걸렸습니다.”
임상규의 눈이 갈라진 박을 향했다. 도깨비가 튀어나온 박은 속이 빈 채로 껍질만 굴러다녔다.
“해준 씨 덕분이죠.”
“……전 별로 한 게 없는데요.”
“차단막 두 번 펼치셨죠? 보통은 그 두 번 동안 사상자가 발생하거든요.”
이 드라마는 도대체 몇 세 이용가지. 전 연령은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비상근무가 아니더라도 회사나……. 해준 씨 후원 있었죠? 후원사에서 종종 일을 맡기거든요. 좀 더 안전하게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해준 씨에게 연락할 겁니다.”
임상규는 마치 자기는 전화를 안 할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서 기대를 하고 물어봤다.
“임 팀장님은 전화할 일이 많이 없으시겠죠?”
“네?”
임상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제가 제일 많이 할걸요.”
그냥 노래나 부르지 왜 연기를 하겠다고 한 거야.
“임 팀장님.”
“네?”
“가수 하실 생각 없으세요?”
“제가 노래를 잘 부르긴 하지만……. 지금 직업도 좋아서요.”
대한민국은 발라드의 큰 별 하나를 잃었다.
그 별을 위해서라도 난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임상규 노래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고.
내 노래방 18번이 임상규 노래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아, 진짜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