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25화 (25/202)

# 25

12. 주인 없는 박씨(1)

후원사 로고가 박힌 검은색 슈트.

손목에서 반짝이는 은색 십자가.

“해준 씨, 이제 진짜 초능력자 같은걸요?”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데.”

“에이, 방금 전까지 잘 해 놓고선!”

이유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진짜 이틀 걸려요?”

“네?”

“갱신 시간이요.”

“네, 더 빨리해 드려요?”

“아뇨, 이틀도 충분히 빨라요.”

이유나는 능숙하게 촬영 장비를 정리했다. 함께 입사했던 동기는 악마의 주간이라는 3월을 거치더니 베테랑 느낌이 물씬 났다. 반년도 안 되었는데 저렇게 변한 걸 보면 3월이 무시무시하긴 했던가 보다.

“해준 씨는 특수 능력이니까 갱신이 빠른 거지, 보통은 일주일 이상은 걸려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흐응…….”

이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요즘 일도 없고 노니까 좋아요?”

“네?”

“해준 씨 능력은 비상근무 뛰기 애매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중 아니에요? 부럽다, 완전 내 꿈인데.”

“뭐, 그야……. 그렇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유나의 말대로 나는 하는 일이 없다. 보호막 자체는 쓸모가 많은 능력이긴 하지만 급하게 지원 나가야 하는 비상근무 같은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비상근무는 적은 피해로 빠르게 요괴를 제압하는 일이 보통인데 내 능력으로는 적은 피해면 몰라도 빠르게 제압은 무리다.

이건 차단막으로 인해 8등급으로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격리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처리 자체는 불가능하다.

“저번에 교육받을 때 들었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 휴대폰에 전화 올 사람은 한정적이다. 놀랍게도 이 휴대폰으로 가장 많은 전화를 받은 건 박서원인데…….

모르는 번호다.

“정해준 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보험 가입, 휴대폰 판매, 보이스 피싱. 셋 중 어느 걸까.

“재난안전대책본부 요괴대책팀의 임상규 팀장입니다. 지원 때문에 전화 드렸는데요.”

셋 다 틀렸다.

통화 내용이 들렸는지 이유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괴대책팀이라.

나 같은 특수능력자의 경우 초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따로 연락이 온다고 들었다. 바로 이렇게.

“오늘 8등급 능력테스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테스트가 끝나셨습니까?”

“네.”

“실례지만, 결과는?”

“이틀 뒤 갱신됩니다만.”

“잘됐군요! 지금 당장 북촌으로 와 주실 수 있습니까?”

의문문이긴 하지만 나라에서 전화 온 거니까 사실상 지금 당장 오라는 통보나 다름없다.

“막 갱신이 끝나서 지금 움직이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만……. 괜찮습니까?”

“예. 최대한 빨리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주소는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이유나를 보며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괜찮아요. 지원 업무죠?”

“네. 정리 못 도와줘서 미안해요.”

“원래 제 일인걸요. 촬영장비만 잘 챙겨 가면 돼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이게 현실이었다면 아이돌과 이런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드라마 속에 들어와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 할 수 있다……. 진짜 유일하게.

* * *

전화로는 북촌이라고 했지만 막상 보내진 주소는 도서관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서관 근처까지 가자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경찰들이 진입을 막고 있었다.

“지원 왔습니다. 여기, 초능력자 면허요.”

8등급 면허증은 이틀 뒤에 나와서 아직 6급이다. 어차피 면허증에는 초능력 종류는 써 있지 않으니 경찰은 면허증만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지원 오셨습니까?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의경 하나가 다가와서 물었다. 왜 이런 곳에 의경이 있는 거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생긴 얼굴에 눈을 찌푸렸다.

“정해준입니다.”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멜른의 피리 때처럼 도서관 앞은 이미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주차장은 물론, 깔끔하게 관리해놓은 잔디밭에도 딱 봐도 지원 나온 초능력자들과 경찰들로 가득했다. 도서관 건물도 모두 비워졌을 것이다.

“정해준 씨?”

“네.”

“아까 전화 드렸던 임상규입니다.”

드라마의 법칙은 간단하다. 단순히 이 드라마에서만 통용되는 법칙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드라마에는 어느 정도 생긴, 그러니까 잘생기고 예쁜 배우가 나오기 마련이다.

내가 왜 박서원을 한눈에 알아봤을까? 다른 모든 걸 제쳐 두더라도 저 새끼가 주인공이겠구나, 할 만큼 잘생겼기 때문이다.

아이돌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나도, 국민배우 얼굴을 하고 있는 구민석도 같은 의미로 알아봤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남자도 최소한 드라마에서 한 가락 이상 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난 드라마는 잘 보지 않아 배우 얼굴은 잘 모르지만, 노래 듣는 걸 좋아해서 가수 얼굴은 좀 안다. 그게 아니더라도 10년 이상 뛰어난 가창력으로 유명했던 가수라면 누구나 알아본다.

최근에 연기 시작했다고 욕먹었었는데 여기 출연했었냐……. 정해영은 왜 이런 건 안 알려준 거야.

“정해준입니다. 별로 급해 보이진 않는데, 무슨 일입니까?”

임상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주인 없는 박이 나타났습니다.”

“……네?”

늘 느끼는 거지만 이 드라마에 들어오고 난 뒤로 네? 소리를 너무 많이 한다.

“원래 제비 구해 주는 건 불법이잖습니까.”

……그랬어요?

“그런데 발견된 곳이 한옥 게스트하우스라서……. 처벌을 하려고 해도 주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가까스로 제비와 박이 나오는 전래동화를 떠올렸다. 흥부전. 흥부와 놀부.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치료해 줘서 흥부는 박에서 금은보화가 나왔고,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치료한 놀부의 박에서는 도깨비가 나왔다.

“그리고 주인도 모르니……. 박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고요…….”

임상규가 가리킨 곳에는 거짓말 살짝 보태서 집채만 한 박이 놓여 있었다.

집채는 너무 거짓말을 보탠 것 같고, 정확히는 자동차만 한 크기였다. 보고서라도 써야 하는지 사진을 찍는 경찰들이 몇 명 있었고, 좀 더 떨어진 곳에서 웅성거리며 이야기하는 초능력자들이 있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차단막을 펼칠 수 있다고 하셨죠? 박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차단막을 펼쳐 주시면 됩니다.”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았다. 여긴 드라마 세계다. 제비가 금은보화와 도깨비가 나오는 박을 물어다 주는 세계다. 놀라지 말자, 놀라지 말자, 놀라지 말자…….

“그럼 박은 어떻게 엽니까?”

“그건……. 재현 씨! 이쪽으로 와 보세요!”

아까 나를 안내했던 의경이 다가왔다.

“재현 씨가 박 열기로 했으니까 둘이서 얘기해서 정리하면 말해 주세요. 저는 다른 분들과도 이야기를 해 봐야 해서.”

임상규가 초능력자 무리들에게 걸어가고, 의경, 김재현이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김재현입니다.”

“네, 정해준입니다.”

“그…….”

김재현은 내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서원 형한테 많이 들었어요.”

“……박서원 씨를 아세요?”

“그,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도 새날 소속이니까…….”

“아……. 그래?”

초능력자들은 군복무를 어떻게 하나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하나 보군. 대민지원 느낌인가.

“의경 소속 초능력자들은 별로 안 빡빡하고……. 어차피 전역하면 또 회사에서 보니까…….”

김재현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얼굴도 하얗고, 눈도 큰 게 딱 감이 왔다. 얘도 등장인물이다. 박서원과도 친하다잖아.

뭣보다 얼굴이 익숙하다. TV에서 몇 번 봤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너도 그냥 형이라 불러.”

주인공이랑 친하다는데 좋은 인상을 남겨야지. 얘도 뭔가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 그래도 돼요?”

“왜? 부르면 안 돼?”

“아뇨, 그건 상관없는데…….”

대신 애가 좀 소심하다. 남자애가 패기 없이.

“알아서 해. 그래서 저 박은 어떻게 여는데?”

김재현은 눈을 굴리다 말했다.

“그… 해준…… 형 능력은…….”

김재현은 작은 목소리로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가 내가 별말 없자 얼굴이 밝아졌다. 얘 혹시 괴롭힘당하는 설정인가? 왜 이렇게 주눅이 들어 있어?

“형태가 어떻게 되나요? 서원 형한테 그건 못 들었는데…….”

“형태?”

“보통은 구 모양이라던데……. 아니면 반구라든지……. 형태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어요?”

박서원은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만 내게 요구했다. 차단막이 그 결과다. 그렇지만 초능력 경력이 10년이 넘는 세계 최강자는 나름대로 조언을 해 주긴 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확실히 알아 두세요.’

살벌한 말도 덧붙였다.

‘그게 정해준 씨 목숨을 구할 테니까.’

항상 사족을 붙이긴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서 회사에서 교육을 받고, 차단막 연습할 때 틈틈이 내 능력에 대해 연구했다.

게다가 요즘 세상은 좋아서 아무리 희귀한 능력이라도 인터넷에 치면 어느 정도 정보가 나온다. 영어 페이지긴 했지만 알아서 번역도 잘 되는데 뭐가 문제람? 다른 사람들의 능력들을 참고하며 내 능력에 대해 알아갔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80퍼센트 정도는 알게 되었지 않나 싶었다.

……내 능력이 그걸 받쳐 주는가는 다른 문제고.

“기본적으로 구 형태야. 사각형으로 만들 순 없지만 반 이상이 구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만 해.”

“그럼 반구도 가능하시단 거죠?”

그렇다고 대답하자 김재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일이 쉬워지겠어요.”

“그래? 어떻게 하려고? 나 아직 네 능력 못 들었거든.”

김재현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 직접 보시는 게 빠른데.”

김재현은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있는 잔디밭에 슬쩍 발을 댔다. 잔디 아래에 있는 흙이 태풍이 치는 바다처럼 거칠게 울렁이더니 뾰족한 가시가 되어 솟아올랐다. 크기가 작아서 장난감 같은 느낌이었지만 꽤 살벌한 능력이긴 했다.

“이건 일부러 출력을 낮춘 거고, 크게도 돼요.”

“그래서 박을 잔디밭에 뒀어?”

“네.”

김재현이 어떻게 하려는지 감이 왔다. 확실히 내 보호막이 구 형태만 가능했다면 먼 길을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럼 내가 반구 형태로 차단막을 만들고, 네 능력으로 박을 연다고?”

“네. 나오는 게 금이면 상관없고, 도깨비라면…….”

자, 여기서 드라마의 법칙을 떠올려 보자.

지금 이 자리에는 드라마 등장인물이 최소 두 명 있다. 그렇다면 저 박에서 나오는 건 금일까, 도깨비일까?

뻔하다. 도깨비다. 도깨비일 수밖에 없다.

굳이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뻔한 일이다. 원래 아니었으면 하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 세상이란 건 원래 그렇다. 불공평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런 빌어먹을 드라마 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그런 건 입 밖으로 내면 안 돼요. 말이 씨가 된다잖아요.”

“……내가 말했어?”

“아뇨. 근데 얼굴에 보여서요.”

눈치 좋은 녀석.

김재현은 흙으로 된 뾰족뾰족한 가시를 발로 대충 뭉갠 다음 임상규와 초능력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임상규도 초능력자들과 이야기가 대충 끝났는지 초능력자들을 소개해 줬다.

“느루의 이세빈 씨와 이다혜 씨, 북천의 한평원 씨입니다. 여긴 새날의 정해준 씨.”

“저, 인원이 너무 적지 않나요? 도깨비가 나온다면 힘들 것 같은데.”

느루의 이다혜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임상규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내 이름을 팔지 않았으면 나도 믿을 수 있었을 텐데.

“정해준 씨는 보호막과 차단막이 가능합니다. 차단막을 펼치고, 박을 열 테니까 보통 박 열 때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마를 짚고 싶은 걸 참았다. 박 열 때의 불상사? 보통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그러니까 정해준 씨, 만약 도깨비가 나타날 경우 무슨 일이 있어도 첫 공격은 막아야 합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공격이요?”

내 노래방 18번 곡을 부른 임상규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상쾌하게 말했다.

“보통 박에서 나온 도깨비는 제일 먼저 불을 내뱉으니까요.”

역시 이 세계는 나 같은 연약한 인간에게는 너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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