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11. 액막이 부적
보통 마트에 가면 차 코너가 있다. 커피와 홍차, 허브차로 가득한 그 코너 말이다.
한 번도 관심 가져 본 적 없는 곳인데, 문득 장을 보다 생각이 나서 카트를 밀어 그리로 가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커피와 홍차, 허브차 사이로 병에 든 꽃차가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집어갔는지 한두 개씩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피부에 좋은 살살이꽃차.’
‘여성에게 좋은 피살이꽃차.’
‘아이가 튼튼해지는 뼈살이꽃차.’
……아무리 봐도 카피 문구가 좀, 촌스럽지 않나.
살살이꽃차를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지게 되었다. 살살이꽃을 그렇게 먹었는데도 피부는 딱히 변한 게 없어 보이는데…….
며칠 되지도 않은 추억에 잠겨 살살이꽃차를 카트 안에 넣으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피부에 좋을지는 몰라도 사실 맛 자체는 별로였다. 꽃을 열심히 다듬던 남자의 모습이 잠깐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순 없지.
“42,180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네. 종량제로 주세요.”
초능력자라도 먹고살아야 한다. 등급산정부서에 나가진 않지만 마지막까지 일했던 건 제대로 월급이 나왔다.
꼭 그게 아니어도 후원사에서 들어온 돈이 있으니 문제없다. 이제 매주 복권을 안 사도 된다.
어차피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없어질 돈이니까 마음껏 쓰고 가야지.
초능력이 있어도 육체는 그대로기 때문에 장본 걸 들고 버스를 타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았다. 나에겐 카드가 있고 세상에는 나 대신 움직여 줄 택시가 있다. 왜 걸어야 하지? 세 걸음 이상은 택시를 타야 하는 법이다. 인류는 이족보행에 적합한 몸이 아니다.
달칵.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직도 미세하게 복숭아 향이 있었다. 도대체 그 가짜 복숭아는 어떻게 만든 거길래 냄새가 가시질 않는 거지? 엉망이 된 가구도 바꾸고 도배도 새로 다 했는데도 은은하게 복숭아 향이 났다.
회사에서 설 선물로 받은 그 빌어먹을 가짜 복숭아가 터지는 바람에 집 없는 신세로 지냈던 게 한 달,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지도 한 달이 되어 간다.
집에 오고 나서도 중간에 제주도로 불려 가서 실질적으로 집에 있던 시간은 별로 되지 않는다.
장을 본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원래 이렇게 할 일 없는 휴일이 있으면 친구와 술을 마시곤 했다. 영화를 볼 때도 있었고 PC방에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음, 친구가 있을 때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친구 하나 없는 불쌍한 정해영 같은 애로 보이는데, 나라고 친구가 없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있었다.
빌어쳐먹을 드라마 세상으로 넘어오면서 모조리 사라졌을 뿐이지.
그나마 이쪽으로 와서 사귄 친구는 김석준 하나고, 많이 쳐 봤자 입사 동기인 이유나다. 하지만 오늘은 평일이고, 두 사람은 출근해서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다. 초능력자관리부서에 있는 김석준은 몰라도 등급산정부서는 3월이면 바빠 지금쯤 이유나는 죽어 가고 있을 거다.
“너무 할 일이 없는데…….”
능력 훈련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난 능력을 쓸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서 오래 훈련하지도 못한다. 하기 싫어서 변명하는 게 아니라 능력이 그런 걸 어쩌라고.
박서원이 지금 어디 있더라. 미국이던가.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으니 그 전까지만 8등급 따놓으면 되겠지. 그리고 솔직히 박서원은 나보고 초능력계의 금수저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난 좀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거실에 드러누운 채로 손을 휘적거렸다. 손에 하얀 빛이 생기면서 천장에 반투명한 하얀 막이 생겼다. 오래 유지하는 건 아직 힘들지만 만드는 건 그럭저럭할 만하다니까?
쿵!
그때 위층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차, 사람 있구나.
곧바로 차단막을 없앤 다음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서 집을 뛰쳐나갔다. 윗집에 사시는 분,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그래도 건강에 해로운 건 아니니까…….
* * *
“어, 왔냐?”
김석준이 반갑게 인사했다.
“내 담당이 너야?”
“담당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닌데, 연수원 동기라고 하니까 날 시키더라.”
집에서 나오자마자 타이밍 좋게 김석준의 연락이 왔다. 휴일에 회사로 부르는 건 블랙회사나 할 짓이지만 업무와 관련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진짜 심심해서 죽어 갈 지경이라 이렇게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교육은 다 받았고……. 아, 지난주에 제주도는 왜 갔냐?”
김석준의 말에 눈을 한 바퀴 굴렀다. 겨울잠 자는 곰 때문에 갔다고 말하면 믿을까? 이쪽 세계 애니까 믿기야 하겠지. 잠실에 청룡이 사는 세계인데.
딱히 비밀로 하라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해도 된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다. 괜히 함부로 입을 눌려서 뭐 되는 거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났다. 여기가 드라마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보통 이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입이 가벼운 놈부터 죽는다.
“끌려갔어.”
“누구한테?”
“박서원.”
그동안 알게 된 건데, 대체로 박서원 이름을 대면 많은 것들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진다.
“아, 그래? 같이 일하자고 했었지, 참. 요즈음 제주도에 많이 간다던데. 뭐라도 있나?”
이상형을 찾은 곰이 있기야 하지.
“어쨌든 오늘 작업복 나왔거든.”
“……작업복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이상한데.”
“작업복이긴 하잖아.”
“그렇긴 한데…….”
“색은 그냥 박서원처럼 까만색으로 맞췄고, 새날이랑 단청 로고만 들어가 있어. 비상근무 때는 어지간하면 입고 다녀. 여차할 때 사람들이 면허 대신 알아보거든.”
“너무 눈에 띄지 않아?”
“그래도 안 입는 것보다 나을걸. 날이 더 따뜻해지면 불 많이 나서 입는 게 좋을 거야. 괜히 화상 입지 말고.”
초능력자라고 하면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나와는 달리 김석준은 드라마 세계 주민이고, 초능력자관리부서에서 일하니 나보다는 많이 알 거다. 괜한 고집은 일찌감치 접었다.
“그리고 액막이 부적도 알아봐. 박서원한테 물으면 좋은 무당 소개해 주지 않을까? 너 종교 있어? 다니는 절이나 성당에 말해도 괜찮고.”
이 드라마에 들어오면서 종교도 때려치웠다. 세상에 신이 있으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었다. 정해영도 아니고 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 대가가 이거라니!
“흠……. 일단 알았어.”
그런데 어차피 난 앞에 나서는 것보단 뒤에서…….
아니구나. 제주도에서도 내가 제일 앞에 섰다. 여기 이 드라마는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 부적 같은 건 믿지 않았는데 사람으로 둔갑하는 쥐와 곰이 나오는 세상이니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괜찮겠지…….
김석준과 헤어지고 나서 옷이 든 가방을 옆구리에 든 채 생각했다.
박서원 지금 미국이라 연락이 안 되잖아?
그럼 누구한테 물어야 하지?
* * *
“……오늘 씨?”
“히익……!”
뒷모습을 보고 인사를 했을 뿐인데 너무 놀라는 바람에 도리어 나까지 놀라 버렸다.
오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매만지다가 꾸벅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 해요…….”
“오늘 씨가 죄송한 게 뭐가 있어요. 제가 억지로 부탁드린 건데.”
오늘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목소리가 작고 말을 더듬는 것 치곤 의사소통이 확실하다. 몇 번 만난 사이도 아닌데 연락을 한 것도 염치가 없는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오늘의 격한 반응을 보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바쁘시진 않고요?”
“괜, 괜찮아요…….”
바쁘지 않아 괜찮다는 건지 바빠도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온 걸 보면 시간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초능력특별수사과 소속 수사관이다. 정확히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짜 복숭아 때 나온 걸 아주 높은 직급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 경찰 쪽은 높을수록 책상에 앉아있는 법이니까.
그때 같이 나온 수사관이 오늘을 선배라 불렀으니 아주 말단도 아니겠지만.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어서 확신은 못 하지만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보건대, 그리 나이가 많지는 않아 보였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나와 동갑 정도.
“아무래도 주위에 물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오늘 씨가 생각나더라고요.”
“……박, 서원 씨는요?”
카페에 마주 앉아 얘기를 시작하자 오늘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박서원? 미국 간 걔는 왜?
“네?”
“아, 아아, 그, 그, 같이, 일, 일! 한다는 말을, 들어서…….”
같이 일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도대체 그 소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퍼진 거야? 저번에 최나라도 그러더니.
“같이 일하자는 말을 듣긴 했는데, 박서원 씨에 비하면 제가 많이 부족하죠. 그리고 지금 일 때문에 미국 가서 연락도 안 되고요.”
“아…….”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오늘 씨께 전화 드렸는데……. 사건 같은 게 있으면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개인적인 일로 연락드린 것 같아서 염치가 없네요.”
“아뇨, 아니……. 괜, 찮아요……. 다음에, 도 불러… 주세요…….”
오늘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가까스로 알아들었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불만을 얘기하기는 좀 그렇지. 그냥 집중하는 걸로 말자.
“그, 액막이… 부적…… 궁금하다고요…….”
“네, 오늘 씨도 아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최근에 초능력자가 되었거든요. 원래 그쪽에 영 관심이 없어서…….”
“초능력자가 아니더라도……. 부적은… 들고, 다니는 게…….”
하긴 길거리에 머리 다섯 달린 도깨비가 나타나는 세상인데……. 부적 정도는 호신용품일지도. 그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쓸 것 같은 박서원도 집에 부적이나 드림캐처를 걸어 놓고 있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회사 입구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제일…… 간단한 건…… 드림캐처죠…….”
“드림캐처요.”
인디언들의 장신구라는 드림캐처는 악몽을 막아 주고 좋은 꿈만 남게 해 준다는 의미다. 악몽을 안 좋은 기운이나 저주로 해석하면 간단한 부적이 맞긴 하다.
드라마에서야 진짜 부적으로 사용되지만 원래도 인테리어 소품으로 많이 썼다. 인터넷에 치면 많이 나온다고.
“제대로…… 하려면……, 좋은 보석과… 실… 깃털로 직접, 마, 만드는 게… 최고고요…….”
오늘은 휴대폰으로 드림캐처 만드는 법을 검색해서 보여 주었다. 만들기 쉽지만 강력한 효과를 보려면 재료가 구하기가 힘들고 내구성이 좋지 않아 주로 집이나 차에 걸어 두는 용이라고도 덧붙였다.
“아니면…….”
오늘은 휴대폰을 툭툭 눌러 다른 걸 검색했다.
“휴, 휴대용으로…… 좋은 건…… 이거…….”
“나자르… 본주?”
“터키… 부적이에요…….”
파란 눈알처럼 생긴 장식을 단 팔찌가 휴대폰 액정에 떠올랐다.
“악마와 재앙을 막아 준다? 아, 그래서 부적.”
“축성 받은, 묵주나……. 덕이, 높은 스님이…… 지니고 다닌… 염주……. 영험한 무당이, 쓴 부적…….”
오늘은 보통 초능력자들이 부적으로 쓰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읊어 주었다. 드라마 세계에 연고자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
“오늘부터 성당이라도 다닐까 봐요.”
막막한 마음에 종교에 귀의해 볼까 했다. 나를 이따위 세상으로 보낸 신이라면 믿을 건 못 되지만.
드림캐처를 사서 집에 걸어 놓고, 질 좋은 나자르 본주라면 그럭저럭 부적 역할을 잘 한다고 하니 이것도 구하고.
……한국에서 파나? 직구 되나? 부적도 인터넷 쇼핑이 되는 세상일까? 짭이면 어떡해?
“저.”
오늘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거, 드릴게요.”
그러면서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었다.
아니, 팔찌라고 생각했는데 묵주다. 은색 십자가가 흔들거렸다.
“교황님, 축성 받은… 묵주에요…….”
갑자기 어마어마한 이름이 나왔다.
“받으세요…….”
“……아니, 저. 이런 물건을 받기에는 좀.”
“괘, 괜찮으니까…….”
오늘은 억지로 내 손에 묵주를 쥐여 주었다. 쥐여 주는 걸로는 안 되었는지 손목에 채워 주기까지 했다.
“……진짜 괜찮은 거예요?”
“네, 네……. 미, 미안해서, 드리는 거니까…….”
“오늘 씨가 저에게 왜 미안해해요?”
오늘은 입을 꾹 다물며 식은 머그잔만 내려다보았다. 정해영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는데, 죽어도 입을 안 열 표정이다.
받는 입장에서 계속 묻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고맙다고 인사만 했다. 손목에 있는 십자가가 괜히 신경 쓰였다. 나 성당 안 다니는데 괜찮은가, 이거.
“그런데 이거 귀한 거 아니에요? 교황님 축성이라면서요.”
식은 커피를 홀짝인 오늘은 그제야 살짝 웃으며 말했다.
“……바티칸 가면, 많이 팔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