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10. 제주의 봄(3)
“우어엉?”
곰이 기지개를 켜며 비틀비틀 앞으로 걷다가 차단막에 부딪혀 걸음을 멈췄다. 곰이 부딪힐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몇 번 못 버틴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곰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곰이 조명이 미치는 영역까지 나오자 자고 있을 때보다 모습이 좀 더 보이기는 했다. 10년 넘게 겨울잠 잔다고 좀 마르긴 했지만 위압감 넘치는 모습이다. 내 차단막에 머리를 계속 부딪치지만 않으면 더 위압감 넘쳐 보일 텐데.
얼굴 아래로, 가슴에 난 흰색 털이 보였다. V자 모양으로 나 있는 털이다. 그러고 보니 반달가슴곰이랬지······. 지리산에 살지 않았나? 왜 제주도에서 자고 있어?
“큭······. 버티기 힘든데 뭐라도 좀.”
속이 크게 울렁거렸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기껏해야 두 번이 한계다.
내 말에 가만히 곰을 지켜보던 박서원이 앞으로 나섰다. 놀란 얼굴이 아니다. 역시 베테랑은 다른가. 재수 없는 말투는 그렇다 쳐도 박서원의 무력은 믿을 만하다. 무려 전 세계 보증이 붙은 능력이다.
그래. 주인공님의 활약을 좀 보자.
“안녕하세요.”
······아, 뭐. 그렇지. 인사는 중요하다. 인사만 잘해도 첫인상 반은 먹고 들어간다.
“잠에서 막 깨셨으니 많이 놀랐을 텐데.”
박서원도 평범하게 대화가 가능했군. 단청 부회장 상대로도 속을 벅벅 긁기에 못 하는 줄 알았는데.
하긴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캐릭터적으로 재수 없는 것과 인간적으로 재수 없는 건 다른 법이다. 전자 쪽은 좋아할 수 있을지도 몰라도 후자 쪽은 좋아하기 힘들 것이다. 정해영 같은 애라면 몰라도.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말 하실 수 있습니까?”
“끄으응······.”
보호막에 머리를 박는 걸 멈추긴 했지만 곰은 딱히 의사를 전달할 의지가 없는 듯했다.
공격성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차단막을 거둘 순 없는 노릇이다. 갑자기 돌변해서 앞발을 휘두르면 누가 책임지나? 죽기 싫으면 처음부터 조심하는 수밖에.
동물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느 동물이든 100년 이상 묵으면 위험한 영물에 속한다. 우리나라에는 100년 영물이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눈앞의 곰은 무려 200년은 족히 된 영물이다. 최선의 방법은 곰과 대화가 통해서 싸움 자체를 피하는 거지만······.
“우어어엉.”
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하품을 했다.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앞발로 차단막을 툭툭 치는 걸 보면 저러는 것도 단순한 짐승 흉내인 것 같고.
“인간 친화적인 곰님은 아닌 것 같군요.”
장규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대로 둘 순 없는데······. 어떡하죠?”
인간을 잡아먹지 않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영물은 잠실의 청룡처럼 대한민국 국민······ 영물······ 소속······ 여하튼 그런 걸로 인정받고 지낼 수 있다.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영물에 한해서다. 인간을 공격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안 되면 불가능한 일이다. 보통 이런 영물들은······.
“차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우리는 곰을 상대하는 데에 최선과 차선, 두 가지 방법을 준비했다. 따라서 최선이 아니면 최악이라는 말이었고, 최악은 어감이 나쁘다는 의견에 따라 차선이라 부르기로 했다.
별건 아니다. 최선은 곰과 이야기를 잘 진행해서 평화롭게 끝내는 거고,
차선은, 무슨 수를 써서든 곰을 없애는 거다.
세상은 원래 다 그런 거다.
“최소 200년인데······. 괜찮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장규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곰을 보았다. 모른 척하며 바닥에 철푸덕 앉아있던 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깜짝 놀라서 조금 희미해져 있던 차단막에 정신을 쏟아부었다. 자고로 곰의 움직임은 주위에 이제 이쪽으로 움직입니다? 하고 신호를 보내며 하는 것이 최고로 치인다. 간 떨어지겠네.
“흐, 하아······.”
곰이 뒷걸음질 쳤다. 곰의 몸이 다시 어둠에 파묻혔다. 숨소리가 들렸다. 조명이 닿지 않아 정확한 모습을 보긴 힘들어도 어렴풋한 형태는 보인다. 곰의 그림자가 흔들렸다가, 순식간에 얇아졌다.
“으응······.”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색 바랜 한복을 입은 여자가 고운 손가락으로 차단막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이거, 열어 주지 않으시려나요?”
······웅녀 소리는 그냥 농담 아니었어? 진짜야? 아무리 드라마라도 심하지 않아?
그러든 말든 곰은 차단막을 손으로 긁으며 생긋 웃었다.
“흐으응······?”
인간으로 변한 곰은 어느 양가댁 규수 같은 미인이었지만 웃는 걸 보니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동굴이라서 추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게 껍데기가 어찌 되었든 짐승이기 때문일까?
뭐, 곰이 사람이 되었는데 소름 좀 돋을 수도 있지. 그게 내 잘못인가.
“말······ 제대로 하고 있나요?”
곰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과 대화하는 것도 오랜만······. 목소리를 내는 것도 오랜만······.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여요.”
“네, 네. 제대로······ 하고 계십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나서는 성격이 아닌데 제일 앞에 있는 게 나라서 반사적으로 대답해 버렸다. 곰의 시선이 날 향했다.
“흥.”
곰은 코웃음 쳤다. 무슨 반응이야, 저거.
“당신은 별로여요.”
“······?”
곰은 내 옆에 있는 박서원을 보았다.
“곱긴 하지만 당신도 별로여요.”
곰은 마지막으로 우리 뒤에 있는 장규혁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화사하게 혈색이 돋았고, 끝이 올라가 조금 사납게 보이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색이 연한 입술이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낭군님!”
“컥.”
“큭.”
“켁, 콜록콜록.”
너무 놀라서 기침을 하는 바람에 차단막이 풀렸다.
곰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처럼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장규혁에게 달려갔다.
내가 당황해서 보호막을 펼치고 박서원이 급하게 검을 염력으로 들어 올렸을 때 곰은 이미 장규혁에게 도달했다.
“아, 제가 꿈에 그리던 낭군님이셔요!”
곰은 장규혁에게 찰싹 달라붙어 가슴에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 * *
“네에, 곰이어요.”
곰은 방긋방긋 웃으며 장규혁의 팔에 매달렸다. 박서원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리다가 나이를 물었다.
“흐응······. 잘 모르겠지만, 인간의 셈으로 하면 이백오십 살 정도······?”
“그럼 어떻게 제주도에 오게 되셨습니까?”
“자기 싫어서 따뜻한 곳을 찾다가 그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장규혁은 눈을 부릅떴다. 그딴 쓸데없는 거 말고, 이 사태를 빨리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그렇습니까······.”
박서원은 장규혁의 눈빛을 무시하고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럼 인간을 공격할 의사는 없으신 거지요?”
“인간이 절 공격하면 모르겠지만······. 낭군님도 계시는데 괜히 시끄러워지는 건 별로여요······. 아, 혹시······ 지금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고 있나요?”
“아뇨, 아닙니다.”
“네에, 그럼 별로 생각 없사와요.”
반달가슴곰은 성질이 난폭하였던가. 아니면 영물이란 건 원래 다 저런 건가.
“잠들기 전에는 인간 세상에서 살던 건 아니시죠? 원하신다면 인간 세상에서 사는 데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전 낭군님만 있으면 괜찮어요.”
“네, 그럼 신분 정도는 있으신 게 편할 테니 조만간 관련된 인간이 찾아올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곰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 못한 장규혁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
“네, 낭군님.”
“······전, 그, 곰님의 낭······ 그게 아닙니다만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닐련지요.”
“네에?”
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가만히 있으면 인간 같지 않게 감정 하나 없어 보이는 차가운 인상인데 장규혁을 볼 때마다 표정이 휙휙 바뀐다.
“그럴 리가 없어요!”
뭐 전생이라든지 환생이라든지 얘기가 나오는 걸까?
초능력도 있고 영물도 있고 용과 호랑이, 그 외 동화 속 이야기가 판치는 드라마다. 전생 이야기가 안 나오면 오히려 아쉬울 정도다.
곰은 장규혁의 팔을 끌어안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늘 그리던 얼굴인 걸요! 낭군님 같은 분을 만나면 꼭 시집가기로, 약속하였답니다.”
흠.
“······누구와요?”
장규혁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저와요!”
곰은 활짝 웃었다.
이거 그러니까······. 그거잖아, 그거.
“그러니까, 곰님의 이상형이 장규혁 씨다, 이겁니까?”
박서원이 결론을 냈다. 장규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머머, 낭군님 이름이 장규혁인가요?”
“곰님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멋진 이름이여요.”
“곰님?”
“어쩜, 이름도 멋지고 얼굴도 멋지고······.”
박서원은 장규혁에게 눈짓했다. 장규혁은 질겁하긴 했지만 박서원의 뜻을 알아들었다.
“이름은 어찌 되십니까?”
“제 이름을 물어봐 주신 건가요? 친절하시기도 해라.”
“아니,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지······.”
“낭군님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괜찮답니다.”
250살 곰이 그런 말 해 봤자 그대로 실천할 만큼 깜냥 있는 인간이 여긴 없었다.
장규혁이 한사코 그럴 수 없다고 하자 곰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혜사라고 불러 주시어요.”
“네, 혜사 님.”
장규혁은 곤란한 얼굴로 곰, 혜사를 슬쩍 밀어냈다.
“저는 인간입니다. 혜사 님의 그······, 그······ 라 불리기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장규혁은 차마 낭군이라 말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박서원이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낭군님이 인간이라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혜사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인간입니다만······.”
혜사는 장규혁의 어깨에 매달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인간으로 변신하면 무게도 인간처럼 되는지 장규혁은 곰의 무게에 괴로워하진 않았다.
“호랑이 아니신가요? 이렇게, 킁, 냄새가······ 킁, 나는데······.”
“아, 그건······. 제가.”
장규혁은 이래도 되는지 안 되는지 긴가민가하면서 혜사를 밀어냈다. 장규혁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혜사는 순순히 물러났다. 정확히는,
“하아, 낭군님의 손······. 참으로 멋지어요.”
장규혁의 손에 정신이 팔렸다.
“그, 제가······. 어린 산주인들을 돌보고 있어서.”
“하아아······? 어린 산주인들요······?”
혜사는 장규혁의 손에 얼굴을 묻고 코를 킁킁거렸다.
“음, 확실히······. 어린 호랑이 냄새······. 덮였을 뿐이지, 인간 냄새가······.”
혜사는 고개를 반짝 들고 장규혁에게 들이댔다. 가까이 다가온 웅녀의 얼굴에 장규혁은 질색하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간택 당했군요!”
“큭······.”
박서원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혜사는 듣지 못한 듯했다. 장규혁만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박서원을 보았다.
“어린 산주인을 돌보는 인간은 도력 높고, 성품도 올곧으신 분이지요. 그런 분이라면 당연히 저, 혜사의 낭군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오히려 제가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요.”
아, 이건 무리다.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니, 그러니까 전 혜사 님의 그, 그게 아닙니다!”
장규혁의 역할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살살이꽃밭을 관리하는 험상궂은 생김새의 남자. 드라마 속의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캐릭터성은 차고 넘친다.
박서원이 제주도를 그렇게 오갔으니 중간중간 얼굴을 내미는 조연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강원서천농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으니 나중에 강원도에 가게 되면 또 나올지도 모른다. 적당히 나와서 적당히 얼굴을 내미는 조연.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부족하신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자신에게 매달리는 곰에게 쩔쩔매는 장규혁을 보니 생각을 고쳤다.
원래 드라마에는 심심할 때마다 등장해서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는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나름대로 서사를 가지고 있는 엉뚱한 커플이라면 시청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을 것이다. 때때로 주연보다 조연이 더 사랑받고 하지 않던가.
거기다가 커플 중 하나가 영물이라서 이런저런 조언자 역할까지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금상천화다.
그런 면에서 장규혁은 개성 넘쳤고, 곰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앞으로 장규혁 얼굴은 자주 보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일이 잘 해결된 것 같군요.”
“그러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열심히 훈련했어요.”
“하하, 일이 이것뿐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박서원이 재밌어 죽겠다는 눈으로 장규혁을 보며 즐겁게 말했다.
“네?”
“저랑 같이 일하자고 했잖아요. 이건 나랏일이니 같이 일하는 게 아니죠.”
박서원은 장규혁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보았다. 동굴 속의 어둠과 희끄무레한 조명 아래서 박서원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8등급 찍어 놔요. 일은 그때부터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