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10. 제주의 봄(2)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꽃 손질을 하고 있던 장규혁이 인사했다.
“뭐……. 눈이 떠지네요…….”
서천농원 폐교의 손님방에서 아침을 맞이한 지도 두 번째였다.
그동안 곰 기상 알람이 울렸던 것도 두 번. 어제 새벽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그때마다 득달같이 동굴로 달려가 곰이 일어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저녁에는 크게 뒤척거리기까지 해서 진짜 놀랬다. 저번에 왔을 때도 움직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크게 움직이진 않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가 여기서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곰은 다시 드르렁거리며 잠들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낚이고 나니 차라리 빨리 일어났으면 싶었다. 전형적인 시험을 앞둔 대학생의 마음이 되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만 남았다.
뭐, 막상 겨울잠에서 깬 곰을 보면 미친 생각이었다고 지금의 나를 욕하겠지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습니까? 짐도 제대로 못 챙겨 왔잖아요.”
쥐 잡는 거 구경한다고 밖에 있다가 그대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타고 내려왔으니 당연한 말이다. 장규혁의 옷을 빌려 입었다가 어제 결국 시내로 나가 필요한 물건을 사 오긴 했다.
“괜찮습니다. 이거 끝나면 나라에서 돈 준다니까요.”
공무원이 아니라 이런 건 칼 같다. 좋은 점이다.
“다 경비처리 하세요.”
“걱정 마세요. 영수증도 다 모아 놨습니다.”
장규혁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들한테 바짓가랑이를 물어뜯기면서 그런 얼굴 지어 봤자 하나도 안 비장해 보인다.
“걔가 황삼이던가요?”
“네, 얼굴이 좀 동글동글한 애가 황삼이고 뾰족한 애가 황이……. 야, 바지 벗겨진다…….”
박서원은 장규혁을 인간 개다래나무, 혹은 박스라고 불렀다. 호랑이들이 그렇게 장규혁을 좋아한다고.
“이 호랑이들은 언제까지 돌봅니까?”
“저도…… 알고 싶습니다…….”
꽃 손질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소일거리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장규혁을 도와줬다. 장규혁은 처음에는 괜찮다고 빈말을 몇 번 던지더니 정말 빈말이었다. 딱 세 번의 빈말이 끝난 이후 장규혁은 나를 능숙하게 부려먹었다.
“해준 씨, 저기 소쿠리 좀 가져다주세요.”
“큰 거요?”
“아뇨, 그 옆에……. 네, 그거요.”
장규혁과 말을, 나눌수록 과거에 도대체 뭐 하던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정보화 시대라는 21세기답게, 인터넷에는 많은 정보가 있다. 나는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아이답게 문명을 사용하는 데에 망설이지 않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휴대폰으로 검색하면 된다! 천도복숭아나 하멜른의 피리 같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말이 있으면 검색하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당연히 서천농원도 검색해 봤다. 지도에 뜨는 서천농원은 두 곳. 이곳, 제주서천농원과 강원서천농원이다.
살살이꽃과 뼈살이꽃, 피살이꽃에 대한 정보도 있지만 서천농원에서 그걸 키운다는 말은 없었다. 나름대로 정보가 통제되고 있는 듯했다. 정부 기관은 아닌 것 같은데 공기업인 걸까.
하긴 호랑이 같은 걸 키우고 있으면 숨길 만도 하다.
“박서원 씨는요?”
장규혁은 하늘을 보았다.
물론 박서원이 하늘나라에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드라마 주인공이 벌써부터 죽으면 쓰나. 걘 15화에서도 살아남는 애다.
“또요? 곰 일어나려면 어쩌려고…….”
“서원 씨는 우리와 다르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능력을 이용해서 검을 무슨 슈퍼보드처럼 타고 다니는 놈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과는 한 차원 다른 데서 사시는 분이란 소리다.
“주목받기 싫다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다니는데 날아다니면 눈에 띄잖아요. 초능력을 이용한 비행은 불법 아닙니까?”
“뭐……. 지역마다 다르긴 한데, 제주도는 20m까지는 괜찮습니다. 공항 주위만 아니라면…….”
장규혁은 무심하게 답했다.
“서원 씨가 제주도 와서 한라산 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알아서 잘 하겠죠. 그 나이에 서원 씨만 한 베테랑도 없습니다.”
박서원은 고등학교 때 초능력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것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드문 능력과 능력 사이에 상성이 좋아 금방 유명해졌었다. 지금이야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사나이고.
“한라산에 뭐가 있어서 매번 그렇게 찾아갑니까?”
“한라산에는…….”
장규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백록담이…….”
“…….”
역시 사람은 생긴 거에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얼굴을 보면 어디서 칼밥만 먹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사람이……. 생각이 없다. 꽃만 보고 살아서인가. 호랑이를 키워서인가.
“큼. 어쨌든 곧 서원 씨도 올 테고, 아침이나 먹을까요.”
“계속 신세만 지는 것 같습니다.”
“서원 씨는 가끔 내려와서 아무 말 없이 자고 갈 때가 많은데요, 뭐. 해준 씨는 일도 도와주지 않습니까.”
장규혁은 하, 하, 하, 하며 웃었다. 눈이 전혀 웃지 않아 무서웠다.
“박서원 씨랑은 안 지 오래됐어요?”
“뭐……. 적은 시간은 아니죠. 제가 제주도 오기 전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알게 된……?”
장규혁은 말린 꽃더미에 뛰어들려는 호랑이, 황삼을 급하게 잡으며 말했다.
“중국에서 지네 요괴 잡다가 알게 됐습니다.”
스케일이 크다. 더 이상 묻지 말자.
“그렇군요. 아침은 뭡니까?”
“……미역국 좋아합니까?”
“미역국에는 살살이꽃 안 들어가죠?”
* * *
곰 기상 알람이 울리는 간격이 짧아졌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곰 앞에 가서 한 시간씩 기다리곤 했지만 알람 간격이 짧아지자 이제 정말 일어날 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박서원도 칼 한 자루 타고 한라산 등반하는 걸 포기했다.
박서원과 장규혁, 나는 곰이 자고 있는 동굴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살살이꽃을 우린 차를 마셨다. 피부에 좋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요즘 얼굴이 만질만질하다.
“오늘은 좀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박서원이 중얼거렸다.
막상 닥치니 곰이 영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된 나는 기겁했다.
“왜요?”
“슬슬 기다리는 것도 지치고……. 제주도에 계속 매여 있기도 힘드니까요.”
가만히 듣던 장규혁이 물었다.
“서원 씨 일 밀렸죠?”
“그죠, 계속 제주도 왔다 갔다 하고……. 지금도 사실 오버됐어요.”
박서원의 초능력은 전투에 특화되어 있고, 심지어 출중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요청이 들어오면 도와주러 가는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이래저래 쓸모 많은 능력이긴 하다. 오죽하면 미국에서도 우주비행사들 훈련하는 데 도와달라고 하겠는가.
우주비행사라고 하니 생각나는데, 쥐잡기 작업은 잘 되고 있으려나.
“이다음엔 어디로 가는데요?”
“태안이요.”
“그다음은요?”
“미국 가야죠.”
“그다음은?”
“멕시코요…….”
“다음 일정도 있죠?”
“몽골…….”
박서원은 점차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하기 싫은 건 세계 최강 초능력자라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박서원의 일정을 듣던 장규혁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해외에 자주 나갑니까? 원래 안 그랬잖아요?”
“구민석 그 새……. 아니, 구민석 부회장님이 시켜서요. 미국이랑 멕시코랑 뭐 무역할 게 있다나.”
“몽골은요?”
“그건 나랏일. 저번에 몽골의 부진이 와서 미륵도 사건 해결해 줬잖아요. 그거 은혜 갚기에요.”
“아, 그거……. 거, 고생 많이 하겠네요.”
“기뻐 보입니다, 규혁 씨?”
“하하, 기분 탓이겠죠.”
미륵도 사건이라. 모르는 일은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반은 간다. 나중에 휴대폰으로 검색해 봐야지.
어쨌든 잡담하는 것도 끝이었다. 장규혁이 폐교에서 가져온 알람이 요란한 진동을 내며 떨리기 시작했다. 곰이 겨울잠에서 깨기 위해 몸부림쳤다.
동굴은 여전히 축축했고 짐승 냄새가 났다. 크게 달라진 게 있으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여차하면 보호막을 펼칠 수 있는 내가 제일 앞에 있었고 그 뒤로 박서원과 장규혁이 차례로 따라왔다.
물론 나는 이 진형에 대단히 불만을 표했다.
“그러면 보호막을 상시 펼칠 수 있고, 거기에 더해서 이동까지 가능하게 훈련해 보는 건 어때요?”
바로 입을 닥쳤다.
“제일 첫 방만 막아 주면 그 뒤는 알아서 한다니까요?”
초능력을 각성한다고 해도 말 그대로 초능력만 생길 뿐 육체까지 초인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보호막을 펼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고, 박서원도 중력과 염력을 다룰 뿐 평범한 인간…….
도대체 어디가 평범한 인간이야.
“어차피 동굴 깊지도 않은데…….”
“인간은 설마를 대비해야 합니다.”
“저기요, 맨 뒤에서 그런 말 하시면 저는 도대체……?”
어쨌든 곰 앞까지 왔다. 괜히 자극이 될까 봐 최소한의 장비를 제외하곤 이미 치운 뒤였다. 조명이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않는 곳에서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곰의 몸을 보고 있으니…….
“역시 잘못 온 것 같은데…….”
사파리에서도 이렇게 가까이 곰을 보진 않는다! 집에 가게 해 줘!! 정해영, 듣고 있냐!!
“크르릉…….”
“이번엔 진짜 일어날 것 같은데요.”
장규혁이 뒤에서 속삭였다. 박서원이 등에 지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디까지나 최선은 대화로 해결하는 거다. 처음부터 검을 겨누는 건 곰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적대적인 행동은 제한하고…….
…….
다시 말하지만 제일 앞에 서 있는 건 나다. 그냥 곰을 죽이고 끝내라고 하고 싶었다.
“보호막.”
박서원이 바로 뒤에서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충분히 알아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곰이 일어날까 설레발 치면서 대응했던 덕분도 있다.
집중했다. 나를 중심으로 보호막을 치는 건 쉽다. 처음에야 어려웠지 감각에 익숙해지고 나니까 쉬워졌다. 하지만 ‘내’가 중심이 아닐 경우는…….
속이 울렁거렸다. 남을 중심으로 치는 보호막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등급 갱신도 못 했다. 박서원은 썩 만족한 눈치는 아니지만 급한 대로 이거라도 써먹자고 했다.
‘사실 남을 중심으로 친다는 점에서 더 이상 보호막은 아니죠.’
‘남을 지킬 수도 있잖아요?’
‘인간은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거든요.’
박서원은 다른 나라에 있는 보호 능력자들을 보아 왔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는 ‘남’을 중심으로 펼치는 보호막에 대해 말해 주었다.
‘보통은 이걸 차단막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더운 기운이 훅 끼쳤다. 봄바람에 섞인 더운 기운과는 존재부터 달랐다. 그래. 저 곰은 십 년 넘게 한 번도 깨지 않고 자는 영물이다. 박서원이 제주도에 붙잡혀 있는 것만 봐도 평범한 곰이 아니다.
“정해준 씨.”
박서원이 날 불렀다. 부르지 않아도 안다. 안다고……!
곰이 일어났다. 천천히 일어나는 짐승의 그림자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차단막을 펼쳤다.
손이 하얗게 빛나며,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이는 희고 투명한 막이 곰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