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21화 (21/202)

# 21

10. 제주의 봄(1)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예로부터 명상이 최고랬다.

대학교 교양 시간 때 배운 복식호흡을 떠올리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왜 교양에서 복식호흡을 배웠는지는 묻지 마라. 거기에는 긴 역사가 있다.

어쨌든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이 더러운 드라마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정해영이 드래…… 아니, 여의주에 대해 언급했던 걸 떠올려 보자. 정해영이 분명 말했다. 이 드라마에는 악역이 있고, 그놈들이 여의주를 얻기 위해 지랄한다는 거. 주인공은 악당을 막기 위해 지랄을 하고.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박서원 옆에 붙어 있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는가.

그러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여의주는 드라마의 주 스토리이지만 드라마 방영 시간 내내 여의주에 대해서만 떠들지는 않을 거다. 분명 다른 이야기도 할 테다. 하멜른의 피리와 둔갑한 쥐를 키운 부부 같은 이야기. 제주도에서 자라나는 새끼 산주인이나…… 겨울잠 자는 곰 같은 이야기.

하다못해 화장실에 가면서 드라마를 잠깐이라도 볼걸. 왜 안 봤을까. 아냐, 아냐……. 자꾸 함정에 빠지는데, 애초에 드라마를 보고 말고는 문제가 아니다.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안 들어오면 되는 거니까!!

“등받이 올려 주세요.”

승무원이 말을 걸었다. 벌써 착륙할 때가 되었나 보다.

자, 어쨌든 나는 한국에서 이십칠 년을 살았다. 스물여덟 살의 새해는 이 드라마 속에서 맞이했으니까, 지난 이십칠 년의 경험만 되살리면 된다. 건너 주워들은 한국 드라마를 떠올려 어떻게든 스토리를 이어야 한다.

……케이블 드라마라고 뭐 다를 건 없겠지?

하긴, CG로 떡칠한 청룡 같은 게 나오는 드라마인데 다를 게 뭐가 있겠어. 더 막장이면 막장이겠지.

그건 불과 두 시간 전에 걸려온 전화로도 설명이 된다.

‘제주도 갑시다. 김포 공항으로 와요. 지금 당장.’

이게 드라마라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드라마 OST가 흘러나오며 화면이 멈췄을 거다. 물론 이건 드라마지만.

나보고 김포 공항으로 오라고 했으면서 박서원은 내가 도착하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제주도로 가 버렸다. 그럼 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어쨌든 홀로 제주공항에 도착해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정신 차렸다. 일. 일하자. 나는 왜 드라마 속에 들어와서도 일을 하고 있을까. 나도……. 나도 꿀 빨고 싶다.

“왔습니까?”

박서원이 보내 준 주소까지 택시를 타고 간 다음 전처럼 길 한가운데에서 내려 서천농원까지 걸어갔다. 장규혁은 호랑이 다섯 마리와 함께 날 맞이했다.

“곰은요?”

“비행기 타고 왔는데 좀 쉬십쇼.”

그놈의 곰 때문에 비행기 타고 왔는데 퍽이나 쉬겠다.

내 발치를 돌아다니던 새끼 산신령들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단체로 모레를 덮는 시늉을 했다. 이것들이……. 나한테 혹시 호랑이들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나는 걸까…….

“급하게 오라 해서 왔는데…….”

장규혁은 운동장에 펼쳐놓은 살살이꽃을 거뒀다. 시골 동네에서 할머니들이 말리는 고추처럼 늘어져 있던 살살이꽃들이 장규혁의 섬세한 손길에 정리되었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그러고 있는 게 언밸런스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어딘지 모르게 목가적인 분위기도 나는 게…….

“걱정 마시죠. 이번 주 안에는 눈뜹니다.”

굉장히 걱정하고 싶어집니다만.

“심박 수 가지고 저명한 수의사들이 말해 준 거니까 믿어도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박서원 씨는요? 먼저 간다고 했는데.”

“곰 상태 확인하러 갔습니다. 해준 씨 오면 전해 달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안 듣고 싶다. 그래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물어봤다.

“안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적당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적당히 쉬고 있으랍니다.”

“……아, 제 의사는 없는 거였군요.”

장규혁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바싹 마른 살살이꽃을 소쿠리에 옮겨 닮았다. 가만히 지켜보기가 뭐해서 나도 일손을 거들었다. 꽃잎이 떨어지지 않게 꽃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새끼 호랑이 다섯 마리가 흙바닥을 뒹구는 걸 배경 삼아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데, 장규혁이 문득 물었다.

“해준 씨 등급은 뭡니까?”

“네?”

“초능력 등급이요.”

“5등급이요.”

조심스럽게 꽃을 옮기던 손이 멈칫했다. 장규혁이 멀뚱히 날 바라봤다.

계속 말하지만, 장규혁은 무섭게 생겼다. 지금이야 농원에서 호랑이나 키운다지만 전직이 뭐였을지 정말 궁금하다. 아무리 봐도 칼로 그인 듯한 관자놀이의 흉터는 평범하게 직장 생활 하는 사람이 얻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해준 씨는…….”

장규혁은 느릿하게 말했다.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군요…….”

이 사람은 왜 또 개소리하는 거야.

나는 장규혁이 내게 가진 오해를 수정했다.

“누구보다 삶에 미련이 넘칩니다만.”

“……5등급이라면서요?”

“네.”

“……박서원 씨 돈 떼먹었습니까? 등에 칼을 꽂았다거나?”

“그런 걸 시도한 사람이 있습니까? 용감한 사람이네요.”

“5등급이라면서요?”

“네.”

장규혁과 대화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왜지?

“저도 특수능력이라 아는데 이 능력은 등급 갱신이……. 굉장히 빨리 되거든요. 증명에서 갱신까지 이틀 정도 걸려요.”

처음 듣는 소리다. 전자도 후자도.

“그래요? 장규혁 씨는 어떤 능력입니까?”

“아직까지 6등급이라면……. 보호막 5등급은 자기중심으로밖에 못 치잖아요?”

아……. 그런 쪽의 질문이었군.

“그게요.”

나는 힘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노란 살살이꽃을 쥐고 있던 손이 하얗게 빛났다. 동시에 하얀 막이 장규혁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장규혁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거?!”

“오래 유지를 못 해서 그렇지 할 수 있긴 있어요.”

회사에서 신입 초능력자를 위한 교육을 받고, 토할 정도로 훈련을 하고, 반쯤 기절하듯 쓰러져 자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박서원이 내게 억지로 시키진 않았다. 그저 내 노력과 제주도를 두고 등을 떠밀었을 뿐이지. 아무리 드라마 속이라고 해도 멀쩡한 제주도를 날리고 싶진 않다.

……최고는 그냥 평화롭게 일이 끝나는 거지만.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 드라마는 15화 때 작가가 서울을 날려 버린 드라마라는 걸.

제주도 따위야 언제든 날려 버릴 수 있지 않을까?

* * *

이 드라마 속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제 봄이 되었다. 서울은 아직 추웠는데 제주도는 싱그러운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박서원을 기다리는 동안 장규혁을 계속 도왔다. 장규혁은 그 짧은 사이에 분리 보호막을 펼치게 된 나를 보며 굉장히 놀라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초능력을 각성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최소 6등급에 8등급 예정이라니. 나 혹시 천재 아닐까?

“개소리고요.”

“…….”

“정해준 씨는 그거죠. 초능력계의 금수저. 금수저가 금수저 부모를 고르는 데 무슨 노력을 했겠습니까? 정해준 씨도 마찬가지예요. 우연히 능력을 잘 얻어서…….”

“그러면 박서원 씨야말로 다이아몬드수저급 아닌가요?”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정해준 씨와는 시작부터가 다르지요.”

“…….”

재수 없는 새끼……. 다시 한번 정해영의 취향에 의문이 들었다. 얘는 도대체 남자 보는 눈이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문득 박서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해영…….

“식사하시죠.”

장규혁은 따끈하게 끓인 국수를 내왔다. 고명 위에 노란 꽃잎이 올려져 있었다. 이 꽃은 안 들어가는 데가 없네.

“이렇게 먹어도 되는 꽃입니까?”

“못 먹을 건 뭐 있습니까.”

“아, 네…….”

그럼 나도 할 말은 없지.

“다친 곳에도 좋고, 먹으면 피부 미용에 좋습니다.”

장규혁은 국수를 후루룩 먹으며 말했다. 국수 맛은 좋았다. 맛이라도 없으면 억울할 뻔했다.

남자 셋이 모여 있어봤자 친구 사이도 아니고 좋게 말해도 직장 동료다. 장규혁이 있으니 사실 직장 동료도 아니다. 업계 종사자다. 잡담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다. 저녁 식사 시간은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다.

자, 비행시간이 짧아서 비행기에서 끝내지 못했던 생각을 다시 해 보자.

이건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한국 케이블 드라마. CG로 떡칠되고 말도 안 되는 설정이 난무하는 드라마다.

박서원은 주인공이다. 보통 드라마에는 여주인공도 있기 마련이다. 박서원과 이어질 만한 여자라. 박서원이랑 이렇게 같이 있어도 박서원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옆에 계속 있으면 알게 되려나……. 아니면 요즘 드라마는 여주인공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드라마를 거의 안 보니 만약을 대비해 가능성은 열어 둬야 한다.

주인공 옆에는 보통 스토리를 함께하는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최소 한 자리는 꿰차고 있을 만한 얼굴들을 떠올렸다. 등급산정부서의 이진혁 대리, 이유나. 김태욱 차장은 애매하지만 박서원과 친해 보이니 조연이긴 할 거다.

그리고 단청의 구민석이 있다. 이 사람이 왜 주인공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니, 왜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비싼 배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드라마에서도 중요 인물이긴 할 거다. 어쩌면 중간에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 유의하자.

그다음으로는 백성찬과 최나라가 있다. 백성찬은 몰라도 최나라는 틀림없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최나라도 아이돌이긴 할 거다.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호랑이 황삼이 물고 있는 휴대폰 충전기를 필사적으로 사수하려는 장규혁을 보았다. 확신은 못 하지만 저 남자도 조연이겠지…….

드라마 등장인물일 법한 사람을 추려 보니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어쩌면 아직 드라마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일지도 모른다. 여주인공이 없는 걸 보면 기대해도 될 법하다.

그래. 그렇다. 보통 드라마 1화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운명적인 만남이 등장하지 않던가? 박서원같이 재수 없는 남자주인공이 인기인 모양이니, 정석대로 여주인공과 원수로 만나 아옹다옹하며 사랑을 쌓아갈 게 분명하다.

나는 걔네가 사랑싸움할 때 대충 여의주에 대한 정보를 얻어 손에 넣으면 된다. 좋다! 완전 쉽네!

“자고 있다가 알람 울리면 바로 일어나세요.”

“알람요?”

“곰 심박 수와 연결돼서, 일어날 것 같으면 울립니다.”

미간을 꾹꾹 눌렸다. 내 손이 허옇게 빛나는 것에도 아직 깜짝깜짝 놀라는데 곰! 곰이라니!

하멜른의 피리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건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양이랑 다른 사람들이 다 해 줬다. 그렇지만 이건 내가 직접 끼어들어야 한다.

한때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제주도 폐교 교실에 이불을 펴고 누워 그 생각만 하고 있으니 잠이 오기는커녕 달아나기만 했다.

일어나서 뭔가 해 볼까 했지만 모르는 사람 학교에서 그러기도 망설여졌고…….

“킁.”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누워만 있는데, 킁킁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다가왔다. 강아지만 한 게……. 어두워서 색을 구분할 수 없지만 작은 산주인이다.

따끈따끈한 체온이 옆구리에 붙었다. 짐승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그보다는 꽃냄새가 더 확 풍겼다. 꽃밭을 뒹굴었구나……. 강아지 쓰다듬는 것처럼 쓰다듬으려다가 움찔했다. 하는 행동이 딱 개 같긴 했지만 그래 봬도 호랑이고, 산주인이랬다. 개 취급을 해도 되는 걸까……?

“킁킁. 에취.”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몸을 말고 있던 호랑이는 코를 씰룩이다가 작게 재채기를 했다. 그러고는 앞발을 들어 내 몸에 모래를 덮는 시늉을 했다.

“이 새…….”

산주인한테 욕했다고 벌 받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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