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8. 제주서천농원(3)
곰이 잠들어 있다는 동굴로 가는 길은 점점 어두워졌다. 나무는 더 커지고 아직 해가 질 시간도 아닌데 햇빛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기온이 떨어지고 안개까지 꼈다. 사정을 알고 있을 것 같은 박서원이나 장규혁에게 묻고 싶어도 분위기에 짓눌려 입을 열지 못했다. 박서원의 개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분리 훈련 성공시켜요.”
비슷한 말을 언제 들었냐면, 대학교 때 알바하면서 들었다.
‘이거 할 수 있겠지? 해준이가 좀 해 줘. 응? 못 해? 괜찮아, 할 수 있어.’
못 한다고 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럴 거면 돈이라도 더 주던지.
……근데 박서원은 돈을 주긴 했다. 돈을 더 받을 수 있게 대기업 부회장을 소개시켜 줬다. 그래, 그건 합격점이다. 하지만 걸리게 차원이 다르다고!
판돈이 내 목숨이면 말이 다르다. 그러나 박서원은 저울의 반대편에 제주도를 올려놨다.
“처음에 잠깐이라도 움직임을 제압하면 대처가 편하니까요. 운이 좋으면 별문제 없겠지만, 나쁘면 살살이꽃밭이 문제가 아니라 제주도가…….”
진짜 나쁜 놈 아니냐.
“정해준 씨도 아시다시피 제주도는 그렇게 큰 섬이 아니잖아요? 알죠?”
나쁜 놈.
“그러니까 우리 훈련 잘 합시다?”
시발…….
내가 박서원의 수명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동안 호랑이들을 진정시키기 바빴던 장규혁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농원 관리인이라고 소개받았는데 야근에 찌든 회사원과 다를 바 없는 몰골이다.
“상태도 볼 겸 들어가죠. 해준 씨도 실물을 봐야 감을 잡을 거 아닙니까.”
전혀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드라마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내 의견은 언제나 묵살됐다. 애초에 내 의견이 먹혔다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나는 죽을상을 지으며 박서원과 장규혁을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어……. 생각보다 최첨단입니다?”
막연히 어둡고 축축한 동굴을 생각했다가 불빛이 약하지만 조명도 있고, 뭔가 병원에서 볼 법한 기계들이 잔뜩 있어서 당황했다.
“발견된 지 10년도 더 됐고, 깨어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정도는 해야 당연합니다.”
동굴 바닥에 널려 있는 전선에 주의하며 장규혁에게 다가가자 장규혁이 모니터를 보여 줬다. 곰의 심박 수를 체크하고 있다 했다. 심박수가 일정 이상 빨라지면, 즉 정상이 되어 가면 곧바로 알람이 울린다고.
조명이 미치지 않는 동굴 안쪽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짐승이 내는 숨소리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코를 찌를 듯한 짐승 냄새가 났다. 동물원에 가면 자주 맡을 수 있는 그 냄새 말이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도 눈은 어둠에 적응했고, 어둠에 적응한 눈은 동굴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짐승을 볼 수 있었다.
단언하는데, 내 생애 이런 위험한 짐승을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왕이면 마지막이었으면 싶기도 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겠습니까?”
장규혁이 태연하게 미친 소리를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곰은 자고 있었다. 어두운 색의 털이 곰이 숨을 들이켰다 내쉴 때마다 움직였다. 나의 어쭙잖은 지식에 의하면 반달가슴곰은 곰치고는 작은 체구라고 했다.
그럼 뭐 하나? 곰은 뭐가 되었든 곰이다. 앞발을 휘적거리는 것만으로 인간 머리통을 박살 낼 수 있는 존재다. 하물며 200년 묵은 곰이라고? 호호 할아버지길 바라는 쪽이 멍청하다.
……나는 왜 이딴 드라마에 들어왔는가? 왜 여기에 서있을까?
“영화나 만화 보면 보통 이 타이밍에 곰이 깨어나서…….”
“말이 씨가 된다잖아요!”
박서원이 아, 하며 내뱉는 소리에 욕이 절로 나왔다. 저 미친놈이 진짜. 자긴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 이건가?
박서원의 인성과 정해영의 남자 보는 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사이, 장규혁은 뭔가 조정을 끝냈는지 모니터를 두드리던 걸 멈췄다.
“크기도 확인하셨으면 슬슬 갈까요? 애들 밥 줄 시간입니다.”
다행히 곰은 일어날 기미는 없이 쌕쌕거리며 잘도 자고 있었고, 나는 개밥에 머리를 처박고 식사를 하는 다섯 호랑이를 보며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 * *
제주도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 장규혁은 떠나는 우리에게 화장품 통처럼 보이는 작은 통을 주었다. 살살이꽃으로 만든 연고라고, 이걸 바르면 새살이 솔솔 나와 흉도 안 남긴댔다.
새벽부터 일어나 꽃밭을 관리하고 호랑이들과 놀아 주는 장규혁이 퍽 안쓰러워 그냥 고맙다고 인사했다.
“육지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가망 없을걸요.”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박서원이 뜬금없이 말했다. 한 박자 늦게 그게 장규혁 이야기인 줄 알았다.
“왜요?”
“그 인간 뭐라고 불리는지 알아요?”
박서원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인간 개다래나무요.”
“개다래나무요?”
탑승구로 향하며 박서원이 설명했다.
“원래 그 호랑이들 강원도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일 때문에 규혁 씨가 간 적이 있는데, 호랑이들이 규혁 씨한테서 안 떨어지는 거예요.”
“아…….”
장규혁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호랑이들이 떠올랐다. 오늘도 장규혁의 무릎을 차지하기 위해 호랑이들은 혈투를 벌였다.
“규혁 씨가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전설로 남았을 텐데……. 산신령들이 아낀 인간으로…….”
장규혁은 절대 원하지 않을 전설일 거다.
어쨌든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정해준 씨 되십니까?”
“네. 누구세요?”
“특수과 수사관 이산래입니다. 선도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전화는 그동안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수사종료 안내였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복숭아!
복숭아가 터진 걸 맞아 본 적 없는 인간은 입도 열지 마라. 가짜고 뭐고 간에, 복숭아 과육은 진짜 같았다. 물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복숭아 과육을 닦으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정해영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무슨 생각을 더 했겠냐.
가짜 복숭아라서 그런지 터진 복숭아는 이상할 정도로 양이 많아 보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 셋을 복숭아 덩어리로 착각하게끔 만들었으니까.
“별문제가 없는 걸 확인했고, 이번 주 금요일부터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약 한 달간의 고생이 떠오른다. 한강뷰를 바라보는 고급 아파트에서 하는 고생이었다. 파란만장한 시간이었지…….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끝내자 박서원이 묘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뭡니까?”
“아뇨, 정해준 씨가 집을 참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긴, 그동안 박서원의 성격을 보건대 내가 박서원 집에 계속 지내도 별말 안 할 것 같긴 했다. 박서원은 처음에 말했던 대로 집에 잘 있지도 않았고, 자기 방만 건들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관계는 여전히 박서원이 강자였다. 내가 회사 사무원이 아니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갓 초능력자가 된 사람과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최강이라 불린 초능력자의 간극이다.
그러니 내가 박서원한테 이렇게 끌려다니지 않는가? 한강뷰 고급 아파트가 아쉬워서 하는 소리는 아니고.
불쌍한 내 인생. 어서 바삐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용을 잡을 자신은 없으니 이무기에 대해서라도 알아보자.
“집에 중요한 게 있어서요.”
그러나 솔직히 얘기할 순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한강뷰 고급 아파트가 아쉽긴 해도 내 집이 아닌 건 맞았고,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진 않다. 잘 모르는 사람한테 신세 지는 것도 적당히 하고 싶고.
그리고 뭣보다 박서원 얼굴을 볼 때마다 아직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해영의 ‘내 새끼’ 타령이 귓가에 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박서원 얼굴만큼은 배우감이 맞으니까.
“그래요?”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해준 씨가 어디서 지내든 알 바 아니긴 한데, 전화는 제때 받으세요.”
이거 날 부려먹겠다는 소리 같은데.
“튀어나오랄 때도 바로 나오고.”
맞네.
뭐 그렇게 말해도, 금요일까지는 박서원 집에서 지내야 한다. 아름다운 한강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조금 아팠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 지긋지긋한 훈련도 쉬엄쉬엄…….
“그리고 내가 안 봐준다고 훈련 대충 하지 말고.”
시발…….
“저 없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박서원 씨 등급 생각하면 제가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제발 나를 놓아줘……. 아니지, 주인공 옆에 붙어 있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긴 한데, 그래도 난도가 너무 높지 않아?
난 어디까지나 초능력 같은 건 없는 평범한 세상의 평범한 인간이다. 200년 묵은 곰을 막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박서원은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
“지금 같은 능력이면 뭐……. 방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역시 나를 놓아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냐, 하지만 여기 오래 있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면 얘 옆에 붙어 있는 게 15화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보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긴 하지만 없는 건 아니거든요.”
김석준에게도 들었던 말이다.
“어느 공격까지 막아 낼 수 있냐가 중요 기준이긴 한데, 보호막을 칠 수 있으면 기본적으로 6등급은 가능해요.”
지갑 속에 있는 초능력자 면허증을 떠올렸다. 나도 5등급부터 시작했다.
대부분의 초능력자, 좀 더 정확한 수치를 말하자면 전 세계의 초능력자 중 80퍼센트가 3등급 이하이다. 일반생활에서만 간간이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이란 얘기다.
“그리고 그쪽 능력자 중에는 본인이랑 분리해서 치는 게 가능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몇 등급일 것 같아요?”
“어…….”
박서원이 이렇게 얘기하는 거 보면 꽤 높은 등급일 거다.
“……7등급?”
너무 높이 부른 것 같은데.
“8등급이에요.”
“……그렇게 높아요?”
소수점까지 표기가 되지만 어쨌든 현재 초능력자 등급에서 제일 높은 등급은 10등급이다. 9등급이면 그 바로 아래 등급이다.
“정해준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활용도가 높거든요.”
인터넷에 보호 능력 좀 검색해 봐야겠다.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라는 괴리감만 커져서 검색도 자제하고 있었는데, 역시 나에 대해 모르는 건 불편하다.
“그런데 모두가 분리가 가능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저도 분리를 못 할 수도 있잖아요?”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정해준 씨는 가능하거든요.”
“……왜요?”
“정해준 씨는 보호막 안에서 자유롭잖아요? 분리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보호막을 펼치고 나면 움직이지 못해요. 혹은 보호막과 계속 접촉하고 있어야 하거나.”
그러나 나는 손이 빛날 뿐 아무런 제약이 없다.
“그러니까 제주도 곰이 깨어나기 전까지 훈련, 잘 하세요?”
협박같이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일까.
그렇지만 한쪽 저울에 훈련과, 다른 쪽 저울에 제주도가 걸려 있다면 저울이 어디로 기울지는 분명하다.
별수 있나. 고개를 끄덕였다.